2012.8 |
책의 추억 - 서점 이야기
관리자(2012-08-03 16:05:29)
서점 사라지니 거리가 외롭고 제도 빈약하니 문화는 빈집이더라
임주아 기자
초판 1500~2000부씩 찍던 출판사가 이십년이 흐른 지금, 600~800부를 찍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책이 팔리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제 책을 더 내고 싶어도 전시하고 진열할 서점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에 비해 전국 서점수가 3분의 1 토막난 2000개 수준에 불과하다는 얘기는 더 이상 강 너머 불구경이 아니다. 어려운 경제상황과 맞물려 합법적 할인법으로 전락해버린‘도서정가제도’도 동네서점의 생존권을 위협한다. 온라인할인서점의 가격경쟁에 짓밟히고 벼랑 끝으로 내몰린 서점. 이제는 디지털 전자도서까지 서점의 사막화를 가중시키고 있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서점.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이십여 년 전, 전주 경원동 동문거리에는 책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홍지서림을 비롯한 민중서관과 스무 곳이 넘는 헌책방들은 이 거리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강산이 변한 지금, 동문거리는 쓰나미가 지난 듯 잠잠하다 못해 고요해졌다. 그 많던 헌책방은 단 네 곳만이 힘겹게 자리를 지키고 있고, 홍지서림은 이 거리에서 하나 남은 유일한 서점이 됐다. 대형서점인 교보문고와 인터넷서점의 출현으로 동네 서점들은 맥없이 쓰러졌고, 세기 말의 출판 불황은 전주 동문거리에도 어김없이 닥쳐왔다.
민중서관 본점 경영난에 문 닫고, 전주교보문고 건물주 변경에 문 닫고
아니나 다를까. 반세기 가까이 명맥을 이어온 전주의 민중서관 본점이 올해 2월 경영난으로 끝내 폐점했다. 대한문고도 비슷한 이유로 문을 내렸다. 3개월 뒤에는 건물주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교보문고도 돌연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각에서는 교보문고 폐점이 매출 부진을 고민해 오던 중 건물주 변경을 이유로 발을 빼려한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시민들은‘무책임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백주원 씨(31)는“민중서관과 대한문고가 폐점한 지 얼마 안 돼 교보문고까지 문을 닫아 황당하고 씁쓸하다”고 했다. 최영복(55) 씨는“몇 년 안 된 동네서점들조차 문화적 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버티는데, 교보문고의 이번 사태는‘기업은 기업일 뿐’이라는 인식만 심어줬다”고 꼬집었다. 교보문고가 고사동에 입점하기 여러해 전, 먼저 금암동 교보생명빌딩 지하에 둥지를 틀려 했다. 간판도 달고, 책도 들이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영세 서적상들이 전주시내 전 서점 무기한 휴업을 선언하고, 교보생명에 대한 투쟁의사를 밝혀 압박한 끝에 교보문고 입점은 백지화가 됐다. 2006년, 교보문고가 다시 입점 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지역 서적상들은 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전만큼 격렬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교보문고는 4390m²(1300평) 규모로 도서 7만종 17만여권을 갖춘 서점으로 전주 객사 거리 한복판에 입점했다. 전주에도 대형서점 시대 막이 열린 것이다. ‘홍지서림’양계영대표는“2000년대에 들어서 지방에도 이마트나 홈플러스 등 대형 업계가 속속 발을 들인 것처럼 교보문고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서적상들이 허탈해 했고 다같이 기운이 빠졌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탑외국어사’관계자도“대형서점은 인터넷서점도 함께 운영하니 모든 점에서 게임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며“지방은 책 구매력이 현저히 낮기 때문에 서점 운영이 갈수록 어려운데 여기다 대형서점이 들어오니 속수무책이었다”고 회상했다.
80년대 이후 동네서점 3분의 1 폐점… 도서정가제, 보호법인지 할인법인지 모를 ‘유령 법안’
실제 한국서점조합연합회(한국서련)가 펴낸 <2010 한국서점편람>을 보면 지난해 말 현재 국내 서점 수는 2천8백46개로 2007년에 비해 4백1개가 줄어들었다. 이 가운데 50평 미만 소형 서점은 2천2백42개로 2007년보다 4백9개가 감소했다. 반면, 5백평 이상 초대형 서점은 여덟 곳이 늘어났다. 이제 동네서점 문 닫는다는 소식은 뉴스거리도 못 된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된 계기는 잘못된‘도서정가제’에 있다. ‘도서정가제’는 과도한 할인 경쟁을 방지하고 유통질서를 확립하고자 2002년 처음 도입됐다. 당시에는 인터넷 판매 시에만 정가의 10%를 할인할 수 있도록 했고, 도서정가제를 5년간 한시적으로만 유지하도록 했다. 이에 오프라인 서점이 반발하자 10% 할인율을 오프라인 서점에도 확대했고, 도서정가제 적용대상도 발행 뒤 12개월 된 서적에서 18개월로 크게 늘렸고, 동시에 시한제한도 없앴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의 경품고시에 의해 할인된 가격에서 다시 10%를 할인할 수 있게 됐고, 발행 뒤 18개월이 지난 도서(구간)와 실용서, 초등학생 학습참고서는 정가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인터넷서점에는 10% 할인과 무제한의 마일리지(판매금액 누진 할인)까지 허용했다. 결과적으로 도서정가제가 19%를 할인할 수 있는‘할인법’으로 바뀐 것이다. 결국 당초 법제정의 목표와는 전혀 상반된 성격으로‘도서정가제’는 오히려 출판시장에 극도의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책의 종수가 현격하게 줄어드는 가난한 현실. 책, 생필품 아닌 문화의 가치로
한국서련 박대춘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우리나라 전 산업별 소매점 평균마진율 25%에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동네서점과는 달리, 19%할인으로 경쟁을 부추기는 온라인 할인서점과 할인매장의 증가가 동네서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며“공정한 공급가격이 존재한다면 불가능한 할인율”이라고 비판했다. 공정한 공급가격에서 출발하고 정직한 소매가격으로 매겨져야 하는 책이 가격경쟁에 내몰려 문화가치로서 빛을 잃어가고 있다. ‘홍지서림’양계영대표도“책은 쌀과 라면 같은 생필품이 아니다. 가격경쟁으로 가면 결국 가장 손해 보는 사람은 독자들”이라며,“자료를 보면 상위 2~300개 출판사가 80~90%의 매출을 차지하고, 10~20%는 나머지 출판사들의‘자리 뺏기 싸움’이 됐다. 출판계의 빈익빈 부익부가 점점 심화 돼 팔리는 책만 만들게 된다. 수년 후에는 사라진 동네서점 후유증을 인터넷서점에서도 앓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최근 인터넷서점의 정체와 부진에 대한 이야기가 출판 관계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고, 책의 종류가 급격히 줄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5월 한 일간지에서는“올해 인터넷 서점은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보일 가능성이 높으며, 팔리는 책의 종수가 현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도했다. 가령 작년까지는 인터넷 서점에서 하루에 40여 종 100권이 판매됐다면, 올해는 똑같이 100권 판매라 하더라도 20여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프랑스 완전도서정가제‘랑법’본받아 작은서점도 살려내야…
한국서련 박대춘 회장은“프랑스‘랑법’처럼 완전 도서정가제가 실현돼야 동네서점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프랑스 도서정가제인‘랑법’은 출판사가 도서정가제를 결정한 후 2년 동안은 정가를 바꿀 수 없다. 할인율은 직·간접 할인을 모두 포함해 정가의 5% 이내로 제한된다. 프랑스에서도 1970년대까지는 책도 자유경쟁 아래 있었지만 1981년 미테랑 정부가 들어서면서 도서정가제 법안인‘랑법’이 채택되는데 이로써 작은 서점들도 살 방법이 마련됐다. 당시 도서정가제가 도입될 수 있었던 것은‘책은 문화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프랑스는 문화 살리기정책의 일환으로 도서정가제 법을 만들었고, 이 법안이 채택되지 않았다면 작은 서점들이 거의 전멸했을 것이라는 게 서점상들의 하나같은 의견이다. 당시 정가제가 도입되지 않은 디스크의 경우 지금은 소규모 가게가 전멸한 사실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팍팍하기만 하다. 올해가‘국민 독서의 해’임에도 불구, 예산은 5억원. 국민 1인당 10원꼴이다. 현재 독서진흥기금은 다 합쳐도 1년에 200억 안팎이다. 300조원에 달하는 전체 예산의 0.07%에 불과하다. 얼마 전 케이팝 공연장 건립 등 한류 열풍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올해 관련 예산을 2배로 늘려 5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한 것과는 극명한 대조다. 카운트다운을 하듯 거리의 서점이 하나 둘 사라진다. 수 십 년의 역사가 뻥 뚫린 제도 앞에 무너지고, 가난한 문화 앞에 외로워진다. 인터넷서점들마저도‘도서정가제’를 외치고 있는 지금, 그들이 가야할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거리의 영세 서적상들은 오늘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외로운 대결. 사라지는 것은 추억뿐 만이 아니다. 그 빚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