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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8 |
[기획특집] 책으로 여름을 만나니. 백가흠의 책이야기
관리자(2012-08-03 16:05:15)
마르께스 씨와 여름, 그리고 남자의 전주 全州 혹은 사랑의 전주 前奏 백가흠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장편“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이렇게 시작한다.‘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 받았던 것이다.’결국 이 소설은 노인의 사랑이 아니라 남자의 사랑, 영혼의 발견 정도가 되지 않을까.흔히 소설가들이 글을 쓸 때 왠지 사용하면 안 될 것만 같은 강박증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들이 있다. 그것들은 대개 아주 큰관념을 포함하는 것들이다.‘생(生)’이라던가,‘자궁’,‘죽음’,‘창녀’, ‘존재’, 등등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단어들이대부분이다. 시를 배울 적엔 이런 단어들을 아예 쓰지 못하게 하던 선생도 계셨더랬다.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우주만큼 큰 단어 안에 삶과 인생을 압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란‘현자’들의 현명한 판단의가르침이겠거니. 그러나 그렇다하더라고 그 단어들은 이제 너무 거대해져서 나는 한번 사용해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기껏해야 귀뚜라미나 트렁크 같은 미물이 아직도 내겐 알레고리의대상인 까닭이다. 그러나 마르께스는 어떠한가. 벌써 제목에서위축감을 도래하여 책을 펴는 순간부터 그 맨 끝장을 덮을 때까지 저 속을 알 수 없는 우주의 주제를 펼쳐놓고 있지 아니한가.뭐 다시 경배할 따름.이 여름, 마르께스를 다시 읽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 중남미에는 가본 적이 없으나,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름의 찐득함을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분명 내가 기억하고 가지고 있는 여름과닮아있다. 나는 이 여름을 전주와 익산과 구이, 그 일대에서 나고 있다. 오랜만의 귀향이라면 귀향이다. 기껏해야 두 달 남짓이겠지만,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간 후,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고향에머문 적이 없었다. 이 여름은 그리하여 특별하다. 물론 여름이지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많은 비와 장렬한 태양의 빛을 고스란히 안고 돌아갈 것이다.툇마루에 앉아 강렬한 햇빛을 바라본다. 간혹 흔들리는 나뭇잎을 눈으로 쫓고, 흐르는 개울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소설 속떠 있는 중남미의 태양은 고스란히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구이의 햇빛과 겹쳐진다. 한 늙은 작가의 침침한 눈이 타는 불볕, 햇빛 속에 녹아 있다. 도달하고자 했던 욕망의 진위와 절대적인 미에 대한 집착이 담긴 태양을 바라본다. 속수무책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타는 고통을 견딜 수밖에 없는 구이의 여러것들을 바라본다. 아무 일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등줄기에 엉기는 땀을 훔치며, 달려드는 벌레를 손으로 쫓으며 떠나가는 사랑과 다가오는 사랑의 진위에 대해, 그 찐득함과 견딤에 대해, 내게서 멀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마르께스의 죽어도 죽지않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던 차, 모기가 도저히 긁을 수 없는 곳을 물었다. 도망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고, 숨고 싶어도 숨을 곳이 없고, 오롯이 견뎌야만 하는 간지러움 같은 고통의 가벼움,아픈 것인지, 아프지 않은 것인지 잘 분간도 되지 않는 아픔 같은 소설에 물렸다. 마르께스의 소설“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전작들과 그 선이 맞닿아 있다. 이름 없이 나오는 칼럼리스트 노인은 마르께스 자신을 연상케 하는 동시에 전작“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나오는 플로렌티노를 떠올리게 한다. 무수한 여인들을 탐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동정은 하나뿐이라는 남자가 내린 사랑의 정의와 그것은 평생 지키는 것임에, 강행되어야만 하는 집요하고 고집스런사랑의 방식이 소설에 흘러가는 주된 이야기이다. 마르께스 왈(曰)‘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다, 라는 허망하고 허무한 사랑의 진실 앞에 노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것을 찾기를 원한다. 자신이 평생 그토록 사랑했던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인 셈이다.그러나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헌사 하고자 했던 추억의 위안은저물어가는 영혼을 일깨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은 눈으로 쫓았던, 탐했던 시간이 아니었음을 깨닫게된다.‘현자’노인은 그 많은 섹스의 추억이, 더불어 그토록 고집스럽게 간직하고자 했던 동정이‘내게 등을 돌리고 태아 같은자세로 잠들어 있는’소녀를 보고서야 겨우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허상은 자신이 그토록 간직하고자 했던 사랑 없음에대한 위안이 아니라 사랑 자체였음을, 이제 사랑이 훨훨 타오르기 시작한 소녀를 통해 느낀다. 소녀가 가진 열정과 싱그러움은고통으로‘현자’를 타락시킨다.‘사춘기 소년처럼 앓으면서스스로도 알아보지 못한 지경’에 이른 남자, 우리는‘남자’가결국엔 무엇을 좇아 이 우주를 배회하며 결국 영혼의 완숙함에이르러 겨우 자신을 발견하는 지를 읽게 된다. 남자는 늙어서‘걸핏하면 눈물을 흘리는 울보’가 된 것이 아니었다. 늙었기 때문에 열정적인 감정에 충실해져 마음이 약해진 것도 아니었다.다만 아흔의 나이가 되어서 겨우 감정에 충실하고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는 울보라는 것을 깨달은 것뿐이었다.남자는 평생 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사랑하는지 알지 못한다. 섹스의 추억이 위안이 아니라 매순간 동정을 바치던 여자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릴 때 즈음,죽음의 환희는 눈앞에 다가온다. 자신의 영혼이 저물어 갈 때에‘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 받’은 것에 감사할수 있는 것, 남자다. 여름이다. 이제 내년이면 나는 마흔이 된다. 삼십대의 마지막 여름을 이곳 전주에서 갈무리하고 있다. 더 특별할 것도 없고, 새삼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뭔가 허물어지는 하나의 격정과, 장렬한 태양이 내뿜는 열기를 고스란히 견디고 있는 그 무엇을 이곳에서 보고 있다. 마르께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가 평생 탐했던 세월의 가치에 대한 시선을 이곳에서 갖길 원한다. 바람이다. 이 도시의 세월을 빗긴 듯, 오랜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하게 견뎌온 골목과 고택 사이에서, 현대적인 것과 마주선 조화에 대해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침묵 속에서, 그것들을 비추고 있는 짱짱한 햇빛 속에서 나는 아직 실체화 되지 않은그 무엇을 쫓고 있는 중이다.나는 이제 늙어갈 것이다. 마흔부터는 늙어갈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에 대해 욕심 부릴 것이다. 이 여름의 전주(前奏)가 끝나고 나면, 강렬한 태양을 견디던 도시의 여러 날과낮게 불어오는 바람과 작게 흔들리던 잎의 움직임에 대해 기억할 것이다. 내가 써야할 것은 그런 것이다. 이 여름과 마르께스씨와 태양을 견딘 도시가 내게 건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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