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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8 |
[문화칼럼] 세계 문화의 정원에서 꽃피는 전북 문화
관리자(2012-08-03 16:04:23)
세계 문화의 정원에서 꽃피는 전북 문화 임왕준 출판사 이숲 대표 프랑스에서 십여 년 살면서 저는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특히, 매년 여름이면 3개월이나 되는 긴 휴가 기간을 낯선 도시에서 보내곤 했습니다. 뭐, 부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가난한 여행자 신분이었고, 대부분 유학생이 여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돌아다녔던 것뿐이니까요. 그런데 유럽의 어느 도시를 가든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도심에는 반드시 넓은광장이 있고, 주변에 교회가 있고, 시청이 있었습니다. 동심원을그리는 다음 블록으로 넘어가면 경찰서, 학교, 우체국, 병원, 박물관 같은 공공시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멀리 그다음 동심원에는 주민이 사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도시의 이런방사형 구조는 주민의 일상적인 삶을 규정하는 질서를 그대로반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는 주민 삶의 준거가 되는 정신적가치를 상징하고, 행정기관은 시민의 공적인 삶을 관장하는 권위를 의미하며, 광장은 여론 혹은 민중의 소리vox populi를 대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리고 중심에서 주변으로멀어질수록 동심원의 층위는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전이하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도시들도예외는 아니지만, 단지 공화국이 국교로 정한 종교가 없기에 광장 주위에서 교회나 사찰을 찾아볼 수 없을 뿐입니다.도시의 이런 구조는 우리 삶을 조율하는 이데올로기를 그대로형상화한 모습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도시의 내적 구성뿐 아니라, 도시와 도시 사이에서도 중앙과 주변의권력관계는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옛말에도 말이 새끼를 낳으면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고 하지않았습니까? 이런 권력관계를 개인 차원으로 환원해도 사정은마찬가지입니다. 근대화 이후 개인주의가 사회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은 이래 누구나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여러 겹의 동심원을 그리며 가족, 친지, 동료, 지인, 생면부지 낯선 사람의 위치를 결정합니다. 결국, 이것은‘세상’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은‘나’라는 생각인데, 이런 생각은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구분하는나라와 나라 사이뿐 아니라, 수도와 지방 도시 사이의 문화적 권력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주체’라고 여기는중앙의 주도적 권력과 문화가‘타자화한’지방으로 퍼져 나가는 현상이 당연시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인식은 지난 세기부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사고의 경향이 등장하면서 그때까지 중앙과 주변을 나누던 이념적인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겁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심지어 데카르트가 말했던‘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조차도 비판합니다. 근대 합리주의적 사고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세상 만물의 존재를 모두 허깨비라고 의심해도, 그것을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대단한 발견을 통해 근대 이성적 사고의 토대를 세운 분이죠. 그런데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조금 불경하게도‘네가 생각하여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 것은 네 문제일 뿐, 거기에 다른 사람의 존재 문제는 아무 상관 없는 것 아니냐?’는 반박까지 내놓습니다. 다시 말해‘나’,‘주체’,‘중앙’을 언제나 우선시하는 계급적 사고, 중앙집권적 사고를 비판하는 것입니다.이처럼 문화의 영역에서도 동심원의 핵심을 이루는 중앙의‘주도적’문화가 따로 있고, 동심원의 주변을 이루는 지역의‘특별한’문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문화가 중심이 된 수많은 원이 문화적 환경을 이루는 것이 포스트모던 시대 문화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저는 한 시대의 문화를 아주 넓은 정원과 같은 것으로 상상합니다. 나무도 자라고, 풀도 자라고, 온갖 식물이 자기만의 향기와 색으로 꽃을 피워 온 정원을 수놓을 때 우리는 그 정원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정원 한가운데 커다란 장미꽃 한 송이만 덜렁 피어 있다면, 혹은 색도 향기도 똑같은 꽃만 바닥을 메우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정원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또 아름답다고 말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것은 정원이 아니라 화훼 농가의 밭이겠죠. 물론 어느 시대에나 주도적인 문화적 경향이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경향을 주도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런 경향과 주도적 인물이 한 시대, 한 지역의 문화를 독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어떤 권력을 획득하고 그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야말로 문화적 독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겠지요. 저는 서울에서도 가장 중심지였던 종로구 인사동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20여 년을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대문 밖에만 나가도 어디 멀리 낯선 곳으로‘원족’이라도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인사동에서 동대문까지는 자동차로 십 분 거리지만,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던 겁니다. 어린 제마음속에도 우주의 중심은 인사동이었고, 사대문 밖은‘주변’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서울의 도심 종로구 인사동과 중구 명동에는 문인과 화가들과 정치가들이 모여들었고,그곳이 4·19와 5·16의 현장이 되었으며, 독특한 전후 세대의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문화가 상업적 자산이 되어 인사동과 명동은 밀려드는 외국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졌습니다. 만약 한국전쟁 이후 자생적으로 형성된 독특한 문화가 없었다면, 저는 이 지역이 오늘날과 같은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서울을 떠나본 적이 없었던 저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3년간 군대생활을 하면서 통신 가설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전봇대에 어지럽게 얽혀 있던 전화선을 지하 케이블로 전환하는 작업이 한창이었기에 눈만 뜨면 전주 시내와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설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다 보면 끼니를 제대로 찾아 먹지 못할 때가 잦았는데, 밥 먹을 때가 되면 논에서 김을 매던 농부들도 밥을 나눠주셨고, 시내 허름한 식당에 가도 아주머니들이 고봉밥에 밥 한 숟가락을 더 얹어 주시곤 했습니다. 서울이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르고 JTV 전주방송이 개국하면서 무슨 인연인지 그곳 제작부장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전주’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차차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햇살이 유독 맑고 투명했으며, 사람들은 고단한 삶에서도 나름대로 여유를 잃지 않았고, 서울과는 전혀 다른 속도감과 리듬으로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전주와 군산과 부안과 진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삶의 이야기를 화면에 담아내던 시절이 무척 그립습니다.전주대사습놀이는 정말 멋진 문화 이벤트이며 국가적으로도 보존 가치가 높은 행사이지만,전북의 문화는 문화적 성과 자체가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즐겨온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그 너그럽고 따듯하고 넉넉한 마음들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문화적 성과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최근에 정부기관이나 기업단체에서 지역문화를 활성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2006년 설립된 CJ 문화재단이나 한국메세나협의회 같은 단체에서도 지역의 문화행사에 지원을 늘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일은 전북인이 스스로 문화적 삶의 주인이 되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가슴에 깊이 새겨진 그 아름다운 삶의 방식을 아끼고 즐기는 후세에 전하려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가장특별한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된다’는 진리가 문화의 영역에서도 실현되고 전북의 문화가 대한민국의 수도권만이 아니라세계 어느 지역의 어느 문화와도 잘 어울려 진정으로 아름다운세계 문화의 정원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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