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7 |
[서평] 북항(문학동네, 2012) - 안도현 저
관리자(2012-07-05 11:33:43)
나쁜 세상, 좋은 시인
박준 시인
안도현 시인의 열 번째 시집 『북항』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나는 그의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다시 읽는다. 그리고 곧 내 눈은 시인의 자서(自書)에 아프게 머문다.
“기왕에 멋들어지게 한마당 놀다 가려면, 앞으로 더 험하게 살아가는 나를 보아야 하리라. -1985년 8월”
그런데 위의 문장은 첫 시집을 내는 스물다섯의 젊은 시인의 자서치고는 너무 담백하지 않은가? 그리고“험하게”살아가야 할 것 같다는 젊은 시인의 저 예감은 무서울 정도로 미래의 현실과 맞아 떨어지지 않았는가? 「풍산국민학교 」,「사월」 등 첫 시집에 수록된 굵직한 시들을 읽고 나서도 나는 아직 안도현의 열 번째 시집을 말할 자신이 없다. 대신 나는 1989년 간행된 해직교사 10人 신작시집『몸은 비록 떠나지만』(실천문학사 간행)를 편다. 시집을 두 권 낸 스물아홉의 해직교사 안도현이 이 책에 있다. 시집의 제일 끝부분에 시인의 「해직의 변」중 일부를 읽는다, 여기에도 옮겨 적는다.
“창호야 가을이 왔구나. 지난여름은 너무나 가혹한 계절이었다. 이 세상에서 한 조각 양심을 갖고 산다는 일이 너무도 벅차다는 것을 나는 느꼈고, 너와 3학년 7반 친구들은 갑자기 벌어진 일에 대하여 무척 당혹스러워했겠지. (……) 그렇지만 창호야, 나는 곧 교실로 돌아갈 것이다. 누구도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다. 너희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내 가슴 속에 살아남아 있는 한 나는 꼭 돌아갈 것이다. 세상이 나쁘다고 너무 투정부리지 말고 우리가 좋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자. 그럼 안녕.”
나는 이제야 『북항』을 든다.“들판은 초록인데 붉은 눈으로 운다.”는 시인의 말이 나는 퍽 다행스럽다. 그의 시는 고맙게도(?) 여전히 나쁜 세상에서 쓰여지고 있었고 시인은 여전히 무엇인가에게 끊임없이 미안해하고 있었다.“한낱 서생인 내가 서책 따위를 읽으려고 불을 밝힘으로써 박쥐가 배변 주기를 놓치”(「박쥐 똥을 쓸며」)는 일에도, 16층 고층에서 날아가는 기러기의 등을“통증도 없이”(「등」) 본 것에도 시인은 미안함을 갖는다. 그리고“내가 몹시 잘못했다”고 말한다.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
불 꺼진 삼십 촉 알전구처럼 어두운 북항,
포구에 어선과 여객선을 골고루 슬어놓은 북항,
탕아의 눈 밑의 그늘 같은 북항,
겨울이 파도에 입을 대면 칼날처럼 얼음이
해변의 허리에 백여 빛날 것 같아서
북항, 하면 아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이
있을 것 같아서 나를 버린 것은 너였으나
내가 울기 전에 나를 위해 뱃고동이 대신 울어준
북항, 나는 서러워져서 그리운 곳을 북항이라
하였는데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였다
-「북항」 부분
이번 시집에 들어와서 시인 특유의“미안”은 그동안의 것들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 시기의“미안”들이 함께 나쁜 세상을 견뎌야 하는, 혹은 아직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라면 시인의 현재적“미안”은 이 나쁜 세상을 먼저 떠난 벗과 존재들에 대해 갖는 감정일 것이다.“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직 온전하게 패하지 않은,“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떠나지 못한 시인의 정서가 이번『북항』에 온전히 녹아들어 있다. 『북항』을 내려놓는다. 나는 눈을 감고 내성천으로 향한다. 내성천이라 하면 시인의 고향인 예천을 감아 도는 순하고 고요한 하천이 아닌가. 내성천의 맑은 물은 입자가 고운 모래톱을 만들고, 백로와 수달의 발을 씻기고, 버드나무 군락을 지나고, 흰수마자나 수수미꾸리 같은 물고기의 아가미에도 들락거리다 낙동강으로 향한다. 하지만 현재 계획대로 영주댐이 완공되면 내성천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결 더 나빠진 세상이 올 것이고, 그 나쁜 세상에서 쓰여지는 안도현의 시는 더 깊은 울림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안도현의 시를 사랑하지만 그가 이제 좋은 시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대신 좋은 세상에서 쓰여지는 그의 나쁜 시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