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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6 |
[서평] 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Human & Books, 2012) - 김기현·안도현 편역
관리자(2012-06-05 14:47:57)
파격에 대한 예의로서의 직역과 의역 너머의 매화시 읽기 문 신 시인 시를 읽기 어려운 시절이다. 아니, 시를 읽기 어려운 시절이라기보다는 시를 알아주는 이가 없는 시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시는 예나지금이나 변함없이 쓰여지고 발표되지만(엄밀하게 말하면 예전보다 시를쓰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시를 읽는 이는 점점 찾아보기어렵다. 종자기가 죽자“내 음악을 알아주던 이가 없으니 더 연주해서 무엇하겠는가”라며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백아처럼, 이 시대의 시인들이단체로 절필을 선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그런 점에서“우리는 직역을 넘어, 아니 의역까지도 탈피하여 파격적인실험을 하기로 하였다.”는 김기현 교수와 안도현 시인의 실험이 혹한에핀 매화처럼 아슬하면서도 믿음직하다. 어려운 시절을 나름대로 돌파해보고자 하는 고뇌와,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사소한 아름다움에도 감동할줄 아는 시심(詩心)을 지녔을 거라는 기대감이 책 곳곳에 보인다.매화가 피었다가 지고, 그 열매가 살을 올리는 늦봄 저녁,『열흘 가는 꽃없다고 말하지 말라』를 읽는다. 퇴계 선생의 매화시 107편 가운데 94편을 고른 선집이다. 원문과 원문에 충실한 직역시, 그리고 우리 시대 삶의 무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의역시와 시심(詩心)을 담아낸 그림까지 잘 차려낸 만찬이다. 직역과 의역 사이의 거리를 잘 가늠해내고, 독자와의 거리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라는 편저자들의 고민을 함께 따라가본다. 퇴계(1501~1570) 선생과의 500년 가까운 시간이 쉽게 좁혀질 리없고, 퇴계의 경지를 감히 넘볼 수도 없지만, 편저자들의‘파격’에 기대보는 것이다. “다툼”과“더불어”의 格 이 책에 따르면 퇴계 선생의 종언(終言)은“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것이다. 평생을 곁에 두고 동무 삼아 지냈을 매화에 대한 퇴계 선생의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퇴계 선생은 매화를 통해 자신을 바로 세우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이치를 깨우쳤던 것 같다. 매화가 외로울까 안타깝게 여긴 하늘이 이 꽃 저 꽃 더불어 흰 꽃망울 열었구나 난초꽃이 먼저 피네 마네 따지지 말라 순결한 그 영혼은 시절을 다투지 않나니 이 시에 대한 김기현 선생의 풀이는 이렇다.“싸리꽃이든 장미든 모든 꽃들은 제각각 고유한 색깔과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것이거늘. 자신의 꽃을 피우는 데에 집중해야지, 남들과 비교 경쟁할 일이 아니다.”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하게도 실행하지 못하는 게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닐까? 나 아닌 타인을 그려보는 것은 마음을 나누기 위함이지, 비교하면서 흘겨보기 위함이 아니다. 하지만 사는 일이 어디 그러한가?“먼저 피네 마네”따져보는 것이 처세의 매끄러움이요 덕목이니, 또한 잘 따질 줄 알아야 사람 행세를 할수 있다. 이 말은 당위가 아니라 견고한 믿음이 되어 있다. 그러나 시에서 볼 수 있듯, 꽃은“더불어”피어 있다. 그런 꽃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다만 그 꽃을 보고 그것을“다툼”으로 아전인수하는 사람의 마음이 문제다.이와 같은 불편한 거리를 퇴계 선생은 경계하고 있다.“꽃 피고 시드는일에 일찍부터 마음 두지 않”(「寓感」)고,“드문드문 꽃망울들이 봄철을 다투지 않는”(「庭梅二絶」) 자세란 불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를 펴드는 순간, 이미 우리는“다툼”의 자세가 아니라“더불어”의 폼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너머의 파격, 그 궁극은 본질이다. 퇴계 선생의 매화시를 읽으며 그의 학문적 경지나 생활의 곧은 자세를 도모할 엄두는 내지 않는다. 대신 선생이 늘 곁에 두었던 매화 한 가지를 얻을 수 있으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선생의 뜻에 반하는 일.“화분에 심은 매화/섣달도 못 되어 피었다 / 한 겨울 시냇물에 눈송이들이 떠다니는데 / 매화 한 가지 꺾어 보낸 그대 생각에/맑은 기운이 사무치네요 //‘맑음을 떠올린다[挹淸]’는 그대의 호가/진정 빈말이 아니었군요”라는 시 앞에서 매화 한 가지는 마음에서 접는다. 도무지“맑음”을 내 안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대신「김신중이 달밤에 구경하며 지은 시를 다시 차운하다」를 읽으며“맑음”을 구해보고자 한다. 화분 속 매화는 맑은 운치를 튕겨내고 시냇가에 쌓인 눈은 찬 물가에서 반짝인다 여기에 달그림자가 어리니 이 모두 술을 부르게 한다 아득한 신선의 세계요 아름답고 참한 막고야(藐姑射)의 모습이다 힘들여 시 읊으려 하지 말라 시도 많으면 티끌에 불과하니 김신중은 퇴계 선생의 제자다. 그 제자가 달밤에 매화를 구경하며 지은 시를 읽고, 제자의 운(韻)을 빌어 지었다. 김기현 선생의 풀이를 보면“단순히 매화의 아름다움이나 가볍게 읊으려 하지 말고, 매화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하라”는 가르침을 담은 시다. 무릇, 합리적인 사리판단에 앞서 공감을 일깨우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 앞에 무릎을 친다.“많으면 티끌에 불과하”다는 파격의 가르침이 서늘하다. 『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에 엮인 퇴계 선생의 매화시 감상은 원시와 직역과 의역을 넘나드는데 묘미가 있다. 하나의 뿌리에서 사방으로 가지가 뻗고 가지마다 제각각의 꽃잎을 틔우는 매화의 생리처럼, 한편의 시에서 여럿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러한 경험은 예사롭지 않은 파격임에 틀림없으니, 애초에 편저자들이 의도했던바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독후의 감상은 또다시새롭게 변화된 정서를 형성하게 한다. 이 또한 의역에 대한 의역, 의역을넘어선 감상이 아닐까?의역의 의역을 지나면 결국에는 원래의 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 무게감이 실리는 것은 아마도『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의편저자들이 깔아놓은 파격적인 실험의 노림수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좀처럼 시를 읽기 어려운 시절에, 모처럼 시다운 시를 읽었다. 책을 덮고 나니 한 점 그림이 선명하게 남는다.「보름달과 매화, 2001」(187쪽) 다. 부디 꼭 감상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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