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6 |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김기덕과 칼 바움가르트너가 만나다
관리자(2012-06-05 14:45:54)
김기덕과 칼 바움가르트너가 만나다
문화저널에 실린 나의 첫 글은 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 대해서였다. 그게 2010년 1월호였는데,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로카르노 영화제로 돌아왔다. 2003년에 이 영화제에서 화제가 됐던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서다. 그러고 보니 둘 다 불교주제의 작품이었는데, 두 영화는 영화의 극적 내용이나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아주 달랐음에도 각각 “그 해의 최고영화”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수상 면에서 배용균 감독은 황금표범상을 받았던 반면에 김기덕 감독은 대상에 이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해서 대상을 못 받은 게 아니라 주지 않은 것이다. 심사에 걸린 문제는 국제영화제에서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라 별로 새로울 게 없지만 영화제의 잘못된 정책이나 간섭으로 그런 일이 생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데 문제점이 있으며 이 면에서 로카르노 영화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글을 통해 김기덕 감독의 2003년 작품의 국제 공동제작에 걸린 이런저런 에피소드와 로카르노 영화제의 공정치 못한 수상 문제가 왜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되짚어 보려고 한다.
극적인 공동제작 성사, 성공으로 이어지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로카르노 영화제에 처음 갔던 건 1989년이었으며, 이때부터 나는 한국의 영화전문지들에 글을 쓰기 위하여 또는 부산영화제에 추천할 영화를 고르기 위하여 십여 년을 해마다 끊임없이 로카르노 영화제에 찾아갔다. 그러다가 2003년에는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국제경쟁부분에 올려지면서 영화제로부터 김 감독의 통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참가했다. 김기덕 감독은 로카르노 훨씬 이전에 베를린, 부산, 전주, 도쿄, 베니스 등의 영화제에서 비교적 자주 만났던터라 충분히 낯익은 사이었다. 그런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하 ‘봄 여름…’)은 내가 제작 초기에 짧게나마 개입했었던 영화였으므로 그의 통역을 맡게 된 것은 즐겁고 뜻있는 일이었다.<봄 여름…>은 엘제이 필름(LJ Film) 영화제작기획사(대표 이승재)와 독일의 판도라 제작사(Pandora Production))가 공동으로 만든 국제적합작품이며, 영화의 크레디트에는 올라있지 않으나 두 제작사를 연결해준 사람은 나였다.원래 취향이 개인 영화사보다는 공공조직체에서 일하는 걸 더 좋아하는 나였지만 친지들의 부탁 때문에 사적으로 두어 번 개인 영화사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하나는 장선우 감독의 <꽃잎>에관련된 것으로서 삼호 제작사의 해외담당자 곽경희씨가 파리에서 진행되는 <꽃잎, 1996>의 영어자막 작업을 도와 달라고 부르는 바람에 파리의 티트라 자막 전문회사에서 이틀 동안 곽경희씨와 일을 했다.그리고 두 번째는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으로, 나를 엘제이 필름에 끌어들인 사람은 이 회사의 기획담당자였던 김소희(전 씨네21의 편집장)였다. 나는 김씨를 1996년 베를린 영화제에서알게 됐는데, 그 시절 시네21의 기자였던 그가나를 인터뷰(씨네21 49호)하면서 우리 사이는 가까워졌다. 그 뒤 김소희는 엘제이 필름으로 자리를 옮겨 주로 해외사업을 맡는 한편 김기덕 감독의 제작품에 대한 홍보용 책자들을 만들었다. 김 감독의 국제 공동제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시기는 내가 2000년 10월 중순 부산 영화제를 마치고 서울의 엘제이 필름 사무실에 들렀을 때였는데 김씨는“김기덕 감독의 여섯 번째 영화 제작에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유럽의 제작자를 찾는다.”며 나의 도움을 청했다. 솔직히 내가 잘 알고 있는 제작자는 없었지만 유럽과의 공동제작은 그 자체로서 꽤 좋은 구상이라고 생각되어 귀가 솔깃해졌다. 게다가 이승재 대표의 장기적 안목의 경영방식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알다시피 그는 <수취인 불명, 2001>,<나쁜 남자, 2002>와 <해안선, 2003>을 잇따라만들었으나 세 영화 모두 국내의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끄떡없이 김기덕 감독의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독일의‘판도라’는 김소희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유럽의 여러 제작사들과 연락을 하던 중에 찾아진 전형적인 예술영화 제작사로서, 대표 칼 바움가르트너는 독립영화 감독들의수작을 수 없이 만들어낸 거물이었다. 1981년프랑크프르트에 자리를 잡은 판도라는 과거에페드로 알모도봐, 안드레 타르코프스키, 우디 앨런, 테오 안게로풀로스, 자코 반 도마엘, 장룩 고다르, 에미르 쿠스리챠, 아키 카우리마키스, 알랑르네, 빔 벤더스, 짐 자뮤시 등 서구의 일급 감독들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리고 중동과 동양에서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키타노 타케시, 아키라쿠로사바, 샤오 시엔, 왕 웨인 등의 작품 제작에참여했으며 한국에서는 김기덕 감독이 최초였다.제작사는 가까스로 찾았으나 바움가르트너 대표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느냐가 큰 문제였다. 그의 비서는 2001년 베를린 영화제 기간에 만날걸 권고했으나 말처럼 쉽지 않았다. 호텔에 연락하면 그는 항상“부재중”이었고 핸드폰은 통화중이거나 아니면 끊겨져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내가 아는 독일 제작자를 통해 그가 스위스 대사관에서 열리는“스위스 영화의 밤” 파티에 온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파티 당일 김소희씨와 함께 스위스 대사관에 일찍 가서 무턱대고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가 파티장으로 들어왔는데 그를 전에 본 적은 없었으나 인터넷에서 본 사진과 똑같아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인사가 끝난 다음 우리는 파티장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회의에 들어갔다. 나는 김소희씨가 준비해온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의 구상을 그에게 넘겨준 다음 김 감독의 작품경력에대해 요령껏 설명했다. 내 말을 듣던 그는“김기덕 감독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우선 시나리오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조금 전에 받은 한 장에 담긴 김 감독의 구상을 훑어보더니어이없다는 듯“이게 다냐”고 물었다. 그러자김소희씨가 재빨리“김 감독에게 시나리오는 거의 필요치 않고 구상 한 장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시나리오 문제는 감독과 상의하여 해결책을마련하겠다.”며 김 감독의 작업스타일을 에둘러 말했다. 그러자 바움가르터는 알아들은 듯“그렇다면 구상을 읽어 본 다음에 결정하겠다.”며 바쁜 듯 자리를 떴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바움가르트너가 받은 구상은 김기덕 감독이선댄스 영화제에 가있을 때 호텔방에서 쓴 것이었다. 아무튼 바움가르트너는 베를린의 만남 이후 얼마 가지 않아 엘제이 필름의 문을 두드렸고,그렇게 만들어진 <봄 여름…>은 유럽에서 크게성공함으로 이승재 대표는 물론 바움가르트의이력에도 주요 작품의 하나로 남게 됐다. 참고로,칼 바움가르트너는 2012년 1월에 타계했다.
여성들이 움직이는 로카르노 영화제
2003년의 로카르노 영화제는 여러 면에서 여성중심의 행사였다. 그런 경향은 2001년에 이렌 비냘디 집행위원장이 들어서면서부터 빠르게 짙어져 갔다. 비냘디는 로카르노에 부임되기 전에 이탈리아의 주요 일간지“라 레퍼브리카”의 영화편집장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시나리오 작가로서 또는 베니스 영화제의“베니스의 밤” 프로그래머로서 활동 범위가 아주 넓었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사람답게 그는 매체를 다루는 데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보임으로 스위스에 온지 반년이 못 가서 매체로부터 크나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로카르노 영화제는 활달한 성격에다 사교적인 비냘디를 두 손 들어 환영했고체격이 큰 그에게“로마의 여사자”라는 애칭까지 달아줬다.
비냘디 체제가 들어서면서 영화제는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조직위원장 자리를 빼놓고는 영화제의 주요 직책이 모두 여성들에게넘어갔다. 이유는“남성이 싫어서가 아니라 여성과 호흡이 더 잘 맞기 때문”이었는데, 그 밖에도 비냘디의 여성 위주 정책은 심사위원과 경쟁 작품 선정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일반적으로 스위스 사람들은 갑작스런 변화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데다가 이웃 나라들에 비해 여성의사회적 위상이 좀 낮은 편이었는데 그런 현실을감안하면 비냘디의 새로운 정책은 변화의 폭과속도에 있어 상당히 급진적이었다.비냘디를 나는 1995년 로카르노 영화제서 만났다. 그는 내가 속해있는 국제평론협회 심사위원의 위원장이었는데, 9일간 같이 심사를 하면서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그 이후 1996년에 독일의 도트문드 여성영화제와 베니스, 토리노 영화제 등에서 우리는 계속 만났고, 그가 1999년 부산영화제를 방문한 것도 내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가 로카르노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개막식 무대에 올랐을 때 나는 기쁜 마음으로 힘껏 박수를 쳤다. 그리고 영화제 중간쯤에나는 비냘디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다음은씨네21(315호)에 실렸던 그 때의 인터뷰의 일부를 옮겨 쓴 것이다.
Q : 2001년 영화제의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흔히 보이던 표범(영화제의 상징)의 맹렬한 모습 대신 표범 가죽으로 만든 노란 하이힐을 신은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올해부터 로카르노 영화제가 여성체제로 넘어갔음을 상징하는 듯 한데 그 신발로 표범처럼 뛸 수 있을지.
A : 실은 어느 광고회사가 구상한 것인데, 반응이 아주 좋다. 당신의 지적대로 새로운 여성체제의 등장을 시각적으로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 없는 부분도 있다. 내가 발을 디딜 곳은 피아짜 그란데(로카르노 영화제의 노천극장)이다. 그 곳은 바닥이 울룩불룩한 돌로 되어있어서 그 신을 신고 뛰다가는 넘어지기 쉬울 테니까.
Q : 여성영화제를 빼면 여성들이 이끄는 큰 영화제는 유럽에서도 처음인 것 같다.
A : 처음은 아니다. 10년 전쯤 런던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은 여성이었고 그 밖에도 여성들의 활동이 컸으나 무슨 이유인지 오래가지 못했다.
Q : 올해 심사위원 아홉 명 가운데 일곱이 여성이다. 그리고 경쟁 영화 19편 중 7편이 여성감독의 작품인데 어느 영화제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여성영화인들의 등장이다. 취임 당시 거론한“여성영화인의 파워”를 실감케 한다.
A : 페미니즘 차원에서 여성파워를 말한 건 아니다. 영화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감독을 비롯한 여성영화인은 사실 아주 많다. 나는 이들과 일하고 싶었고 이들은 기꺼이 따라줬다. 남성을 차별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Q : … 로카르노 영화제는 칸과 맞먹는 전통에다 수준 높은 영화제로 널리 알려져있으나 대형영화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르코 뮐러 전 집행위 원장은 로카르노를 큰 영화제로 만들고 싶어 했으나 스위스영화계의 반대에 부딪쳐 성공하지 못했다.
A : 전통적으로 로카르노 영화제는 대형영화제와는 달리 감독의 초기 작품에 초점을 두어왔다. 감독의 나이나 작품경력 보다 새로운 언어를 창작한 작품에 관심이 많다. 영화제를 더 키울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올해부터 영화제작자와 배급자들이 만날 수 있는 장으로“인더스트리 오피스”를 만들었다. 로카르노의 장점은 참가자들 누구나 같이 어울릴 수 있고 관객 참여율이 항상 아주 높다는 점이다.
Q : 마르코 뮐러는 알려지다시피 중국과 일본에는 많은 관심을 쏟았지만 한국영화에는 그렇지 않았다. 2001년에 문승욱 감독의 <나비>가 경쟁부분에 초청되어 반갑다. 한국의 젊은 감독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면.
A : 앞으로 한국의 젊은 감독들이 만든 좋은 영화를 기대하겠다. 개인적으로 베니스에 초청된 한국영화에 관심이 컸다. 하지만 한국 쪽에서 로카르노 보다 베니스를 택했으니 어쩌겠는가. 요즘 서구 영화제서 아시아 영화가 구심점이 되고 있는데 나도 아시아 영화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