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6 |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로제타
관리자(2012-06-05 14:45:15)
밥벌이의 처연함, 생존의 아름다움
송경원 영화평론가
정의란 무엇인가. 이 해묵은 질문의 답은 시대마다 다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질문 그 자체의 정당성에 있다. 우리는 그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메우려 묻고 또 묻는다. 이제는 거장이란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다르덴 형제 역시 <로제타>(1999)를 통해서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는 도덕적 기준들이 언제나 옳은 것인가를 되묻고 있다.
로제타는 하루하루가 생존의 위협을 받고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지 성실히 일할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부당하게 해고당하고 성실하게 일해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던 그녀는 와플 가게에서 함께 일하던 남자 동료 하나의위기를 목격한다. 그를 구해주지 않으면 그 대신에 자신이 와플가게에서다시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는 그를 외면한다. 이 때 우리는 그녀가 남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은 것이 잘못된 행위라고 신랄한 비판을 가할 수 있을 것인가.로제타의 외면은 스스로 살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자 저항이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그 직장은 행복을 위한 탈출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녀를 비난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인식한다고 해도 용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럴 정도로 절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을 구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도 우선시 되어야 할 도덕적 가치라고 기준을 정한 채 안타깝지만 냉랭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로제타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스러져 간다면 우리는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주겠지만 악착같이 살려고 발악하는 로제타의 생존 본능, 혹은 행복을 위한 갈구가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를 종종 뭉개고 지나갈 때 우리는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믿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가치들은 누구를 위해 누구를 기준으로 적용되는 것인가. 로제타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러한 상황에서 도덕적 명제들을 들이미는 것은 안전한 위치에 서 있는 자들의 비겁한 변명이며 경험해 보지 못한 자의 무지의 소치이다. 우리가 로제타의 행동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진정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벗기고 벗긴 후, 세상을 까발리고 까발린 후에 드러날 진실에 가까운 모습은 언제나 불편하다.특히나 아직 안전한 영역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러한 적나라함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어쩌겠는가. 먹어야 살고, 행복해지고 싶고, 그저 살아가고 싶은것, 그것이 인간인 것을.
영화는 우리에게 진짜 현실을 직시하라 말한다. 시종일관 핸드 핼드 기법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배경음악도 없이 친숙한 영화적 문법을 거부하고 있다. 화면의 느낌이나 기법은 오히려 다큐멘터리와 닮아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보여주는 로제타의 모습이 사실임을 웅변하기 위한 수단이다. 친절하지 않은 다큐멘터리적 화면도 그러하거니와 극적 서사와 긴장감을 담지 않은 채 로제타의 삶의 단면을 잘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는 로제타의 일상이라는 사실을 나열식으로 배치하여 전체적인그림을 그려낸다. 다르덴 형제가 얘기하는 중첩되고 중첩된‘사실’은 점점 그 폭과 울림을 크게 하다가 결국에는 이것이 하나의 진실, 혹은 현실임을 관객이 자각하게 만드는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다. 죽고 싶어도 가스가 떨어져서 죽을 수 없는 로제타가 가스통을 옮기며 낑낑대는 모습은이러한‘사실’의 울림이 정점에 달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아이러니를 빚어내는 것이다. 우리 삶의 매 순간이 바로 이러한 아이러니가 아닌가.어떠한 상황에도 로제타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일견 섬뜩할 정도이지만 결국 이것이 로제타의 이야기를 허구의 영역에서 현실로 끌어당기는 힘을 제공한다. 다르덴 형제는 꾸며진 사실의 조각들을 중립적인 시각으로 능숙하게 이어 붙여 관객에게 현실의 거대한 그림을 펼쳐 보인다. 이 같은 연출은 상업 영화의 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을 다소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영화에 몰입될수록 로제타를 그저 비난하거나 동정할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한다. 로제타의 일상은 선악 또는 희극과 비극의 기준이 정해지지 않은 삶의 한 단면 그 자체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저 묵묵히 로제타의 삶을 담아내어 영화를 가상의 영역에서 현실의 영역까지 옮겨온 다르덴 형제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삶, 그 자체이다. 우리는 때때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전쟁 한 가운데에 있는 개인이 그러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극빈계층이 그러하고 거대한 사회에 짓눌려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이 그러하다. 평범한 우리는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불가피성에 둘러싸인 채, 때때로 살아가는지 살아지는지 알 수 없기도 하다. 로제타가 처한 현실 또한 이러한 불가피성의 연장선에 있다. 로제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심지어는키에르케고르가 유일한 실존의 영역에 있다고 말한 자살조차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먹먹함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타는 살아간다.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외면하고 살아남기 위해 자살도구였던 가스통을 운반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 치면 칠수록 상황은 악화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녀지만 그녀는 기어오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어쩌면 그저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로제타>는 그 서늘하고 불편한 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영화다. 결국 인간은 동물이고 먹어야 산다. 이것이 속수무책의 세상에 남은 유일한 진실이다. 하지만 생존에 대한 의지의 손을 놓지 않는 모습, 바로 그 지점에서 삶의 미학이 피어난다. 여기에 이 영화의 역설이 있다. 삶을 위해 버티는 모습은 그것으로 이미 아름답다. 로제타는 내일도 모레도 평범함을 갈구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겠지만 그것 때문에 그녀는‘살아지는’존재가 아니라‘살아가는’존재가 될 것이다. 그렇게 로제타는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거울이되어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전한다. 당신과 나, 살아남기 불가능한 이세상에서 로제타처럼 꿋꿋하게 버티는 대다수의 일반인들, 우리야말로 기적이며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