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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6 |
클래식 뒷담화
관리자(2012-06-05 14:44:47)
145년만에 돌아온 하이든의 머리 문윤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 프란츠 요세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이 사망한 지 10여년이 지난 1820년, 하이든과 오랜 인연을 맺었던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에서는 하이든과의 인연과 업적을 기려 하이든의 묘를 빈에서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본거지인 아이젠슈타트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하이든이 사망한 1809년, 하이든은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빈은 나폴레옹 군대와 전쟁 중에 있었고, 에스테르하지 가문 역시 나폴레옹 군대와 맞서는 형편에 있었습니다. 결국 하이든은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빈에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전쟁 중이라 하이든의 주검은 빈의작고 초라한 묘지에 묻혔고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30년 가까이 아이젠슈타트에서 가문에 봉사해 온 하이든을기억하고 성대한 묘를 만들어주기로 한 것입니다.이장을 위해 하이든의 묘를 파내고 시신을 살피던 중 경악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몸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하이든이 평소 쓰고 다녔던 가발만 남겨놓은 채 머리 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군대가지배하던 시기에 사망했지만 나폴레옹은 위대한 음악가인 하이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비록 적국의 음악가이긴 하지만 하이든의 집 앞에 보초를 세워 보호할 만큼 하이든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이든에게 그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았는데 시신에서 머리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사연은 얼마 안가서 밝혀졌습니다. 당시 빈에서는 F.J.갈이라는 해부학자가 골상학이라는 학문을 태동시켰는데 이는 인간의 도덕적, 지적 능력은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으로 뇌를 보호하고 있는 두개골의 모양을 통해서알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골상학에 심취해 있던 요하네스 페터라는 대학생이 하이든이 사망한 며칠 후 과거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비서였던 카를 로젠바움이라는 작자와 공모하여 하이든의 두개골을 몰래 절취한 것입니다. 하이든 같은 위대한 인물에 대해 골상학자들이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을까는 이해가 갑니다만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지요.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는 범인이 밝혀졌으니 하이든의 두개골을 금방 찾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요하네스 페터는 연구를마친 후 로젠바움에게 두개골을 넘겨주었는데 문제는 로젠바움의 부인이 하이든의 두개골을 가지고 장사에 나선 것입니다. 로젠바움의 부인은 주로 음악가들이 모이는 작은 살롱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손님들에게 하이든의 두개골을 보여주곤 했답니다. 그녀는 경찰이 하이든의 두개골을 찾으러 오자 감춰두고 오리발을 내밀며 버텼고, 하이든의두개골을 꼭 찾고 싶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는 결국 돈을 주고 하이든의 두개골을 넘겨받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로젠바움의 부인은 이 약속마저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돈을 받고도 다른 사람의 유골을 하이든의유골인 것처럼 넘겼습니다. 이런 사실은 로젠바움이 죽기 직전 양심고백을하며 하이든의 진짜 유골을 빈의 음악동호회에 기증하면서 드러났답니다. 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는 소송을 통해서 하이든의 유골을 찾으려 했고 계속된 전쟁과 혁명으로 소송의 진행이 지지부진해지면서 하이든의 유골을 되찾는 일은 100년을 넘어 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하이든 사후 145년이 지난 1954년, 하이든의 머리는 본래의 주인을 되찾아 왔고 지금은 아이젠슈타트의 갈보리교회 안에 있는 웅장한 묘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하이든의 유골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애쓴 에스테르하지 가문도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이든이 살았던 시대만 하더라도 예술가들은 귀족이나 교회 같은 후원자의 도움없이는 존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귀족이나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그들의 후원이나 보호아래에서 생활해야 했지요(대부분 거의 하인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답니다). 이런예술가와 패트런(후원자)의 관계 중에 가장 바람직한 관계로 바로 하이든과 그의 패트런이었던 예스테르하지 가문의 관계를 들고 있답니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 30년간 봉사하며 음악을 좋아하는 주인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선물했고,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는 그런 하이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자신의 음악을 꽃피우도록 기회를 주었으니까요. 하이든과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서로를 얼마나 잘 이해했는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답니다. 1772년 후작이 소속 악단을 데리고 피서를 떠났는데 다른 해보다 두 달이나 더 오랫동안 피서지에 머무르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자 고향집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기를 원하는 단원들을 위하여 하이든은 기발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보통 교향곡의 마지막 끝부분은 화려하게 피날레를 꾸미는데 새 작품에서는 오히려 애절하게 간청하는 듯한 느린 선율로 작곡하고 연주자들이 자신의 연주가 끝나면 악기를 정리하고 보면대 위의 촛불을 끄고 하나씩 퇴장하게해서 마지막에는 단 두 명의 연주자만 남아서 작품을 끝맺도록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후작에게 들려주자 후작은 그 의미를 알아채고 단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이름이 <고별교향곡>입니다. 이처럼 하이든은 매우 유쾌하고 센스가 넘치며 유머러스한 사람이었습니다.하이든의 유머러스한 면은 그가 남긴 많은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연주회에서 조는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피아노시모(아주 여리게)로 연주하다 갑자기 포르테시모(아주 세게)로 연주하도록 작곡한 <놀람교향곡>, 또음악이 끝난 것처럼 마무리했다가 관객들이 일어나려 하면 다시 연주가 계속되는 현악사중주 <농담, The Joke>, 또 항상 깔끔했던 하이든은 면도기가 잘 들지 않아서 불만이었는데 한 출판업자로부터 최신 면도기를 선물받고 그 댓가로 선물한 현악사중주 <면도칼, The Razor> 등 하이든의 작품은우리 주변의 일상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들이 많아서 매우 흥미롭습니다.하이든은 무려 108개의 교향곡을 작곡하여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서양음악사에서는 교향곡의 기본이 되는 소나타형식을 완성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럽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두 인물과도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지요. 23살이나 어린 모차르트와는 나이를넘어서 친구처럼 지냈고(서로 작품을 헌정할만큼 너무 좋아했는데 모차르트가 하이든보다 18년이나 앞서 세상을 떠납니다), 또 38살이나 어린 베토벤에게는 음악을 가르치는 스승이기도 했습니다(그런데 베토벤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유머러스한 하이든과 고지식한 베토벤, 성격차이가 좀 있어 보이네요).참! 골상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요하네스 페터의 하이든 두개골 연구 결과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페터는 하이든의 두개골은‘아주 잘 다듬어진음악적 재능을 담고 있는 두개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큰 소란에 비해 너무 싱겁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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