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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6 |
[아름다운 당신] 타악 연주자 조상훈
관리자(2012-06-05 14:44:19)
고집과 기다림이 빚어낸 전통의 숨소리 황경신 객원기자 도시에서 자란 내가 풍물 가락을 들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명절 때 친척이 사는 시골의 어른들이 마을을 돌며 흥을 돋우는 길놀이나 대학시절 학생운동 집회에서 시위대를 이끄는 학교 동아리의 그것이 전부였다. 제대로 그 장단과 가락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사회생활을 하고서도 한참동안 풍물은 나에게 낯선영역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제대로 된‘판’을 만나고 난 후 풍물판의 가락은 낡은 조명 아래서도 선명해졌고, 장단은 내 마음속에서부터 춤을 췄다. 그렇게 풍물을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해준 사람,타악 연주자 조상훈(44)이다. 30년 넘게 전통 타악 연주를 해 온 그가 이끄는 농악대가 길을 내면 길이 함께 춤을 췄고, 그가 사물놀이 앉은 반으로 자리를 틀면 무대가 출렁였다. 따로 또 같이 내는 그 소리 맛을 알게 해준 그를 만났다. 일찌감치 와버린 봄이 어느새 초여름을 부르고 있는 일요일 오후였다. 30년 넘게 전통 타악 연주를 해 온 그가 이끄는 농악대가 길을 내면, 그가 자리를 튼 사물놀이 앉은 반의 구슬땀이 보일 때면, 따로 또 같이 내는 그 소리 맛이 제대로 났다. 무대에서 그는 주로 상쇠로 나서지만, 그에게 음악의 길을 연 것은 꽹과리가 아닌 장구다.“선친의 고향이 남원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농악은 우리 생활 속에 있었기 때문에 시골에서는 때마다 어르신들의 농악놀이를 보는 일이 흔했죠. 어린 나이에 그저 신이 나서 쫓아다닌 것뿐만 아니라 입버릇처럼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나중에 크면 저 장구 내가 치겠다고.”어린 조상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농악대를 이끄는 상쇠가 아닌 명주 끈을 끼고 몸에 찰싹 달라붙은 장구였다. 운 좋게도 그가 진학한 군산 동중학교(지금의 동원중)에는 학생 농악단이 집중 육성되고 있었다. 40명으로 구성된 학교 농악단에서본격적으로 그는 장구채를 잡았다. 삼채가락을처음 배울 때의 흥분은 지금도 살아있다. 재미삼은 줄 알았던 그가‘장구 치러 등교’를 하니 가족들은 반대를 하고 나섰다.“옛날 어른들은‘속이 빈 것’을 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말렸죠. 학교에서 재미삼아 하는 줄 알았는데 본격적으로 배워보겠다고 하니 집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막내 고집 좀 피웠습니다. 3일 굶기를 결심했는데, 한 이틀쯤 되니 포기하시더군요.”우리 음악을 하기로 이미 진로를 정했지만 그는서울에 있는 예술고에 갈 만한 형편이 안됐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 진학 후 우리 음악을 배우기 위해 찾은 곳은 군산국악원이다. 가락을 배울 때마다, 연습이 끝날 때마다, 학교를 벗어난 무대에서한 판 신나게 농악놀이를 하고 올 때마다 차곡차곡 그만의 공연노트를 채워갔던 그를 기특히 여긴 중학교 선생님이 손수 이끌고 찾아간 곳이다.“일기처럼 작성했던 공연노트나 식구들한테 고집을 피우고 했던 제 모습이 선생님 눈에는 기특해 보였던 것 같아요. 학교 농악단에서 수장고를맡거나 자진해서 상쇠를 맡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저에게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셨는지 국악원에 직접 데리고 가주셨고, 첫 달 레슨비도 내주셨어요.”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우리 음악의길에 나서게 된 조상훈. 성운선과 조소녀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며 기본과 다양한 가락을 익혔고,농악 공부를 위해서는 전주까지 원정을 다녔다.1983년부터 그에게 농악을 사사한 스승은 다름아닌 호남우도농악의 명인 나금추 선생이다. 일반 대회 무대에서 본 나금추 명인의 몸짓과 장단은 소년 상쇠 조상훈에게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정말 그 모습이 선녀 같았어요. 흥과 장단에만귀 기울여 있던 저에게 다른 흥분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때 꽹과리를 시작했어요. 일주일에 한번, 한 달에 한 번 선생님과 시간을 맞춰 전주 로 호남우도농악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소리, 꽹과리, 장구... 우리 음악에 빠져드는 시간이 시작된 셈이죠.”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해 혼자 기량을 쌓아가던 그가 학교에서의 시간을 그냥 보냈을 리 없다. 이미 학생 농악단을 이끌어 본 경험이 있던 터라 관심 있는 친구들을 찾아내 농악단을 꾸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설픈 실력이나마 그가 직접 친구들에게 장단과 가락을 가르치며 나름대로 외부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전국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 전국국악대전 타악 부문 장원에 이르는 등 학창시절 이미 그는 흥을 끌어내는 상쇠가 되었다. 판소리로 전북대학교 한국음악학과에 입학했지만 386세대인 그의 장단과 가락은 현장을 울렸다. 당시 풍물은 시위 현장의 함성과 행진을 이끄는 역할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함께 풍물을 치는 친구들과 시위현장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선 전문적인 문화운동으로의 방향을 고민했다. “음악적인 고민도 했던 거죠. 시위현장의 선전대 역할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문화운동으로서의 가치와 방향 안에서의 역할에 대해 토론이 이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개인의 기량을 갈고 닦는 것을 넘어서 음악과 연주 혹은 전통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지는 시기였다. 거기에 전통에 새로운 옷을 입히고 대중과 함께 실험적인 작업을 이끈 임동창과 김덕수는 그의 음악에 더 넓은 스펙트럼을 선사한다.이후 휴학을 하고 전북대로 출강을 나오던 김덕수 선생을 따라 서울에 올라간 조상훈은 김덕수,이광수 명인에게 사물놀이를 사사 받으며 제대로 사물놀이와 만나게 된다. 그렇게 남다른 기량을지니며 성장한 그에겐 <동남풍>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붙는다. “1994년 전문 타악연주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전국의 대학을 돌며 단원들을 찾았어요. 대학 풍물패를 찾아다니며‘열정’있는단원들을 손수 모았습니다. 창단 무대를 앞두고100일 동안 하루 6시간, 10시간씩 정말 미친 듯이 연습을 했습니다.” 군산시민회관에서 사물놀이와 호남우도농악을 선보인 <동남풍>의 첫 무대는 자체로 값진 것이었다. 전문 타악 연주단이 거의 없던 시절, 시절마다 가장 가까이 삶의 현장에 있었던 사물놀이와 농악을 연주하는 젊은 연주자들의 무대는 그들의 기량을 넘어서는 의미가 더욱 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19년을 이어오고 있는 <동남풍>의 무대는 매년 새롭다. 전통의 깊이가 더해져 새롭고, 우리 것을 헤치지 않는 시도가 더해져 참신하다.그를 비롯해 단원들 모두가 지금은 각자의 영역을 구축했지만, 지금도 매주 모여 <동남풍>만의 장단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실 <동남풍>은 전통타악연주단의 성격이 강하죠. 우리 음악에도‘퓨전’이 대세가 됐지만 본질을 잃은 실험은 지양하고 있습니다. 내 몸은 잃어버리고, 산소 호흡기를 꽂은 연주는 저희가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대중들에게 더디게 다가가더라도 전통이 살아있는 연주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개인과 단체 활동을 오가며 사물놀이의 물이 오를대로 오른 그에게 음반 취입의 기회도 주어졌다. 그는 이 때 남다른 과정으로 녹음을 하게 된다. 사물놀이의 악기 모두를 직접 연주해냈다. “악기 소리를 하나하나 따로 연주해서 녹음을 했어요. 녹음해 둔 연주를 들으며 다른 악기를 녹음했고, 또 덥혀진 연주를 들으며 연주하고 녹음을 했어요.” 오롯이 조상훈의 손에서 나온 가락과 장단으로 만들어진 음반이었다. <동남풍>의 대표로서, 개인 연주자로서 우리 음악,전통에 대해 조상훈의 생각은 확고하다. 전통 타악을 버리지 않는 <동남풍> 무대를 봐도 그렇고, 특히 장구와 꽹과리 하나만 들고 나서는 그의 독주회 무대는 더욱 그러하다. 그의 독주회‘조상훈의 길-장구와 놀다’,‘조상훈의 길- 쇠와 놀다’는 달랑 장구 하나 들고, 꽹과리 하나 들고 오른 무대다. 선율이 없는 타악기 하나씩을 들고 나와 공연시간 80분 동안 그는 장단과 가락으로 관객을 조이고 풀었다. “어려운 무대였지만, 1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않고 연습하며 준비한 무대였기 때문에 자신도 있었습니다. 완벽할 수 없으니, 그저 관객들을 상대로 놀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그의 공연을 본 관객들은 사물놀이 이상의 흥을느꼈다. 선율 없는 타악기에서‘멜로디’를 들었다. 주거니 받거니 타악기 본연의 맛을 느끼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호평을 들었다.전통을 단단히 기본으로 세운 그는 더 가까이 사람들 속으로 걸어 나갔다. 입 앙다물고 전통만을고수하는 바보짓을 모르지 않는 그는 아는 만큼보이기 마련이라고, 우리 전통 타악을 알리는 활동도 꾸준히 해왔다. 터 잡고 있는 군산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교육은 물론 <동남풍>을이끌고 일본에 우리 전통 타악을 알리기 위해 이미 여러 차례 워크숍을 진행한 바 있다. 또 최근에는 군산의 연습실 지척에 있는 전통찻집에서작은 무대를 정기적으로 열며 더 가까운 대중과의 호흡을 시작했다.“전통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없는 대중들에게,연주자들에게 우리 전통만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죠. 철학과 의식을 위한 교육이나 문화 활동은 그래서 더욱 중요합니다. 사실 들여다보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절로 크는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물을 주며 기다려보는 겁니다.”30년이라는 세월의 깊이를 얻었지만 그의 반경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연주자의 기본인 기량을 갈고 닦기 위해 지독하게 배우고, 연습을 하는일도, 숙성된 전통의 맛을 지켜가는 그의 고집도여전하기 때문이다.한 눈 팔지 않고 오롯이 전통 타악의 맥을 잇고있는 타악 연주자 조상훈. 더디게 혹은 삽시간에두드려지는 그의 장단과 가락이 가슴팍까지 치달아 오를 때, 우리는 듣게 될 것이다. 그의 고집과기다림이 녹아든 전통의 숨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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