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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6 |
[백제기행] 지리산 자락과 문화의 교차로 ‘남원’
관리자(2012-06-05 14:43:40)
만나고 부딪쳐 어우러진 땅 황재근 사단법인 마당 기획팀 햇살이 따사로움과 따가움의 경계 즈음에 위치한 5월 20일, <백제기행_다시 문화유산답사> 두 번째 여정이 시작됐다. 오늘의 목적지는 남원이다. 춘향과 이몽룡의 고향, 멋과 풍류의 고장, 지리산 자락에 안긴 아름다운 땅. 남원에서 연상되는 수식어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번 기행의 주제는 그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지리산 자락과 문화의 교차로 남원’, 특히‘문화의 교차로’에 초점이 맞춰진 일정이다. 다시 시작하는 백제기행 문화유산답사의 키를 잡아주신 조법종 교수님의 안내로 그간 몰랐던 남원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만나러 떠났다. 암각화에 담긴 남원의 키워드 첫 번째 답사지는 대산면 대곡리 상대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선사시대 암각화다. 인근이 모두 평탄한 지형인지라 커다란 바위덩어리들이 갑작스레 솟아있는 모습이 범상치 않다. 풍수적으로는 뒤로 펼쳐진 거대한 산줄기가 봉황의 날개형세를 하고 이 바위를 알처럼 감싸고 있어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라 봉황대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그 꼭대기 부분에 정체를 알수없는 문양이 새겨져있다. 새겨진 시기는 청동기 후기로 추정된다. 2천년 전의 누군가는 어떤의미를 담아 이 문양을 새겼을까? 후세사람들은 그저 이런저런 추측을 할 뿐이다. 문양이 새겨진 바위 위에 올라서니 사방 탁 트인 벌판이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서도 이곳에서 올리는제의를 우러러 볼 수 있었으리라.대곡리 암각화가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패형암각(牌形岩刻)’또는‘검파형암각(劍把形岩刻)’이라 불리는 이런 암각화는 오직 한반도에서만, 그것도 영남에서 주로 발견되는 양식이다. 호남 쪽에서 발견된 패형암각화는여수와 이곳, 남원 대곡리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추정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영남 내륙을 중심으로 한 어떤 청동기집단이 세력을 넓히면서서쪽 내륙으로 진출하는 통로로 남원을 선택했다고. 이는 남원의 지형적 특성과도 연결시켜생각해볼 수 있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인 남원의 길을 통해 때로는 교류의 목적으로, 때로는 침략의 목적으로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오고가며 어우러지고 부딪쳤을 것이다.‘문화의 교차로’라는 주제가 그제야 와 닿았다. 천리타향에 정착한 고구려유민의 운명은 한반도 고대사의 주역들은 대부분 남원을 거쳐 갔다. 일단 호남지역의 맹주였던 마한이 있을터이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백제가 있다. 최근의 발굴성과에 따르면 남원 운봉지역에는 상당한 규모의 가야권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신라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집단을 추가할 수 있다. 천리타향에 자리잡은 고구려 유민들이다.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당과 격돌한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우군으로 끌어들여 당과 맞섰다. 부흥군의 핵심세력인 안승과 검모잠은 당군에 밀려 점차 남하했고 신라 문무왕은 이들을백제의 고토인 금마로 이주시켜 보덕국을 세우고 당의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그러나 부흥군내부에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자 신라는 보덕국을 폐했고, 이후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남원소경을 설치해 유민들을 이주시켰다. 두 번째 답사지인 만복사지는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려시기 세워졌지만 고구려 가람배치인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式)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복사와 고구려 유민들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지금은 황량한 절터를 당간지주와 석탑, 좌대와 석불이 지키고 있다. 만복사의 흥망을 지켜본 그들은 아마 그 사연을 알고 있으리라. 남원과 고구려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진다. 신라에 거문고를 전파한 옥보고는 지리산 운상원에서 고구려인에게 거문고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남원소경이 설치돼 고구려유민들이 이주한지 50여년 후의 이야기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고구려의 전통을 지켜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록과 유적이 비어있는 부분은 후세의 상상력이 들어갈 자리다.‘사실’이라고 우기지만 않는다면 역사는 상상의 여백을 허락해준다. 남성적인 동편제 소리의 원형이 고구려의 음악전통에서 온 것은 아닐까. 조법종 교수님의 상상이다. 그 말씀을 듣고 나도 따라 상상해본다. 타향에 정착한 망국의 백성들이 그 전통을 후대로 이어와 천년이 지난 후 또 하나의 예술로 꽃피우게 되는 과정을 말이다. 남원과 일본, 그 오래된 악연 이번 기행에서 자주 마주치게 된 또 하나의 이름은 바로 일본이다. 만인의 총, 여원치 마애불을 지나 오후 일정인 황산대첩비와 실상사까지 내륙 도시 남원에 섬나라 일본과 관련된 흔적들이 이토록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시대 순으로 따지면 실상사가 먼저 나와야 한다. 선종 구산선문의 첫 번째인 실상사에는 비보풍수 사상에 따라 일본으로 흘러가는 지기를 막기 위한 장치들이 있다. 바로 일본의 지도가 그려진 동종과 일본이 있는 방향인 동남쪽을향해 좌대 없이 맨땅에 앉은 거대한 철불여래 좌상이다.‘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쇠하고 일본이 쇠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말도 전한다하니 그 관계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여원치 마애불과 피바위는 시대순으로는 두 번째다. 태조 이성계는 지리산 자락의 황산에서왜구를 섬멸하고 고려 조정과 군부 내에서 탄탄한 입지를 만들었다. 좀 더 멀리보자면 조선건국의 발판이 이 전투로 만들어진 것이다. 태조에게 계시를 내린 노파를 기념해 만들었다는여원치 마애불 전설과 태조가 물리친 왜구들의피가 스며들었다는 피바위 전설은 조선 건국이라는 서사시의 서시부분이 될 것이다.일본과 남원의 또 한 번의 악연은 정유재란 때맺어졌다. 호남의 관문 남원성이 무너지며 조명연합군 4천명과 백성 6천명이 순국했고 일본군은 이들을 한데 모아 묻었다. 바로 만인의 총이다. 이 때 일본으로 끌려간 남원도공들은 일본도예를 일으켜 세우는데 일등공신이 됐다.운봉면에 있는 황산대첩비는 남원과 일본이 맺은 악연의 집합점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자신과 장수들의 이름을 새긴 어휘각, 임진왜란의 고초를 겪기 전에 선조가 세운 황산대첩비는 식민지시대 말기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일제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따로 보면 각각의 유적, 각각의 사연이지만 이렇게 엮어서 생각하니 또 다른 재미와 의미가 보인다. 수많은 세력과 집단이 만나고 부딪쳐 어우러진‘문화의 교차로’남원에서 배운 새로운 역사읽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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