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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6 |
[기획특집] 채용신의 초상, 인물을 역사로 기록하다
관리자(2012-06-05 14:41:39)
채용신의 초상, 인물을 역사로 기록하다 조은정 미술평론가 조선 말기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린 채용신(蔡龍臣, 1850 ~ 1941)은 한국회화사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서양화가 적극적으로 도입된 때에 전통의 초상화기법과 사진의 특성을 혼용하여 대상의 진영을 잡아낸 근대기 초상화의 대가로서 전통회화와 근대회화 모두에, 또 현대초상미술에서도 결코 그 영향을 간과할 수 없는 작가로 우뚝 선 것이다. 채용신은 1850년 돌산진수군첨절제사를 지낸 통정대부 채권영과 밀양 박씨의 3남 중 장남으로, 조상은 원래 전주에 살았는데 조부가 이사하여 삼청동에 살았으므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용덕이었으며 1886년 무과 급제 후부터‘용신(龍臣)’이라 하였다. 대원군과 친하게 지내던 부친이 서울에서 살다가 대원군이 실각하자 낙향하였으므로 이후 전라도 지역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으며 활쏘기를 잘하여 37세 때인 188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888년(39세)에 정6품직인 사과, 1891년(41세)에는 종5품직인 의금부도사, 1893년(44세)에는 종3품직인 부산진 수군첨절제사, 1896년에는 돌산진수군첨절제사에 제수되었다. 돌산진수군첨절사를 하는 동안 조석진과 함께 <고종어진>과 <대한제국동가도>, <칠조영정이모사> 등을 하였다. 선원전에 봉안할 어진을 모사하기 위하여 화사를 물색하던 중 이미 대신 민병석의 초상을 그렸던지라 그가 채용신을 추천하자 고종이 친히 확인하고는 불러들인 것이었다. 당시 그는 중추원의관의 지방관인 칠곡군수로 봉무하고 있었는데 고종임금은 특별히 어진제작으로 부임지를 비운 동안에도 칠곡군수직을 유지하게 하였다. 어진제작 이후 그는 가선대부 종2품을 제수 받았다. 음직이거나 토목공사 등에 공이많은 자에게 주는 허직으로서의 무관직이 아니라 정식 무관으로 입제하였으면서도 화사의 역할을 수행하였기에 석지의 관료서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더 심도 있게 진행해야 할 것이다. 1901년 부친이 돌아가자 관직을 버리고 전라도 장암에서 3년간 칩거하였다가 상을 마친 그를 총리대신 윤용선은 정산군수로 천거하였던 것을 보더라도 조선말기 관료이자 화가로서모두의 역할을 수행한 경력을 지닌 것이다.1905년 그는 면암 최익현의 초상을 그렸다. 화면 좌측에 자신의 관직을‘정산군수’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1905년 정산군수가 된 이후에 그린 것이다.1906년 종2품직으로 승급하였지만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전라도로 낙향하였다. 이후 10년 동안 익산, 변산, 고부, 나주, 남원그리고 경상도 지역까지 활동하다가 신태인에 정착하였다고 알려져 있다.1941년 92세로 세상을 떠난 채용신은 87세 때인1936년 작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그림 값을 쌀로 받았으며 말년에는 화가인 손자 채규영과 합작하기도 하였고‘채석강도화서’를 차려 초상화 주문도 받았다. 초기에 주로 척사계열의 유림을 그리다가 이후에는 일반인의 주문제작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그의 작품제작 방식은‘서화주문광고’를 통해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석지가 노령으로 여행이 어려우니 사진을 보내주면 그림을 그리겠다는 내용은 전체 여섯 항목 중 세 항목이 사진에대한 설명에 할당되어 있다. “사진이 있으면 본인의 비(費)로 송부하되 그 의양(衣樣), 입좌상(立坐像), 소착관물(所着冠物)을 명기하십시오. / 사진을 갖고 있지 못할 때에는 본인이 사진사를 보내어 찍어 오겠습니다. / 사진으로 초상을 회화한다고 한즉 그 실형(實形)과 다를까 의심하실지 모르나 결코 오류의 염려는 전혀 하실 필요가 없으며, 혹시 실형과 닮지 않을 적에는 그 책임을 본인이 지겠습니다.”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리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이 문건은 또한 그가‘사진사를 보낼 수 있는’관계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 채상묵은 종로 우미관 근처에서 종로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채용신 초상화의 특징은 일찍이 조선미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조선조 초상화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서양화법이나 사진술로부터 필요한 요소를 수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이루어내었다”는 데 있다. 시각적 호소력과 핍진력에 압도되고 인물의 현존성과 직접성에 긴장감마저 느끼게 하는 초상의 세계를 이룬 것이다. 유림의 초상을 그리던 채용신은 당시 세력을 떨치던 새로운 종교의 지도자인 강증산의 상도 그렸고 후에는 원불교의 인물도 그렸다. 그의 기나긴 인생과 화가로의 영광 속에서, 초상의 주인공과 화가의 관계는 교유한 인물뿐만 화가의 환경이 반영된 결과이다. 유림을 중심으로 벌어진 위정척사와 2차 의병봉기의 주역들이 전라도에 밀집해 있던 시대적 배경, 한일합방 이후 동학을 이어받은 종교를 비롯한 증산교 등 여러종교가 민족주의와 전라도 자본의 힘으로 확장되던 지역의 특이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채용신이라는 한작가의 초상화를 통하여 그 시대의 인물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가의 이데아로서 구국의 이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이 칠십이 넘어서도 세필이 흔들리지 않는 기량과 90이 넘는 수를 누리며 화가로서 활동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들 손자와 함께 운영한‘채석강도화서’의 존재를 통해서 보더라도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던 때문에 그의 작품례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증가추세는 그의 작품 대개가 진영이었던 탓에 사당이나 세대를 통해 가전되는 경우가 많아, 점점 세간에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근대기 작품 중 큰 편에 속하는 한 폭당 169x183cm 나 되는 화면이 8폭으로 구성된 <삼국지연의도>(조선민화박물관 소장)는 중국 역사의 일부이자 소설의 내용이기도 한『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그린 것이다. 그 중 <적벽도>는 울울한 바위의 표현을 통해 화가의 기량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로 사용될 정도였는데 채용신의 경우, 크기에서 뿐만 아니라 산수와 인물의 조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기량을 갖춘 작가였는지를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최익현 이외에도 채용신은 특정 인물을 여러 점 제작한 경우가 있었는데 <박해창초상>이나 <이덕응초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작품은 한 인물의 고유성과 차림의 다양성, 자세의 변화와 배경처리를 통한 화조와 문양표현의 난만한 기량 등 채용신 초상화의 변주를 볼 수 있는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는 관념적으로 선비들의 모임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함께하였던 인물들이 함께 살고 뜻을 함께하였던 인물을 묘사한 집단 초상화이다. <송정십현도>에서는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과 곱게 묶은 책들, 푸짐한 주안상 등이 이실하고도 정감 넘치는 모임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는데 책을 읽고, 듣고 종이를 펼쳐든 인물들의 대화가 무르익은 듯 인물들의 모습은 옛사람들의 한때를 보여준다. <칠광도>는 광해군대의 정치적 상황을 피하여 미친 척하며 낙향하며 지낸 일곱 인물을 엄청나게 큰 자연 속에서 작은 인물들이 흐드러진 꽃 속에 호탕한 인물들로 묘사하고 있다. 거침없는 몸짓이며 갓을 쓰거나 유복을 입거나 상투를 드러낸 모습은 채용신이 이들 인물을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관초상>, <김철상초상>, <김직술초상>, <서병우초상> 은 이들 인물의 세밀한 묘사에 대해 이미 정평이 난 작품이다. <실명씨 초상>(고려대빅물관 소장)은 문관복을 입은 인물 주위에 높다랗게 책을 쌓아 선비의 높은 학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19년 12월 상순에 제작한 이 그림은 이미 저물어버린 나라의 말단 관리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공개된 작품 중에는 사찰의 대시주질로 부부상이 함께 모셔져 있던 중, 남편인‘정만재68세진영(鄭萬在六十八歲眞影)’이 채용신의 작품이었다. 이는 부부상을 동시에 제작하거나 또는 동시에 한 작가에게 의뢰하지 않은 경우 등 발주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관복의 <허담초상>은 단학의 문관복을 입었는데 옷감의 성긴 올을 통해 하복을 입은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세부적인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그는 기울어가는 조선의 마지막 관리 중 하나였을 것이며, 호패에 새긴 이름을 통해 관직에 나아간 때와 생년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의 사실성을 보여준다. 유복이나 관복을 입은 인물들과 달리 구군복을 입은초상은 채용신 자신의 <자화상>과 육군박물관 소장품 2점만이 전하고 있다. 이번에 출품하는 구군복을 갖추어 입은 초상은 소장자 집안에서는‘오연기초상’이라 불리고 있다. 화면 우측에“오위장행수군첨절제사처헌공오십칠세상(五衛將行水軍僉節制使處軒公五十七歲像)”이라 하여 수군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육군박물관 소장본에서는 손에 칼을 들고 있는 것과 달리 부채를 쥐고 있게 한 점이 달라서, 문관의 경우처럼 무관도 전형성을 지닌 도상 아래 인물의 세부적인 얼굴표정이 변별되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현재도 집안에서 모셔지고 제사지내지는 대상으로 존재하는 초상이 그의 작품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표구되고 액자에 넣어져 보관되는 작품이나 유물이아니라 후손들을 돌보아주고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조상(祖上)으로서 존재하는 초상화의 기능을 보여주는작품들인 것이다. 평시에 영정을 모셔두는 전각 형태보관함의 세부적인 장식과 술장식, 부작들은 이들을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를통해 가장 흥미 있게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작품생산 시스템이다. 직접 보지 않고 사진을 보고그려서 닮지 않을까봐 것을 걱정하지 말 것이며 만약정말로 닮지 않았다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호언장담은 차치하고라도, 전신상 등 초상작품의 크기와 자세에 따라 작품가를 달리 한 점도 그가 초상미술을 얼마나 합리적인 생산물로서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상범이 대작이 500원일 때 그의 초상화는 100원이었다는 사실은 근대기, 초상미술의 위상을알려주는 자료여서 씁쓸하기도 하다.아들이 여러 고을을 돌며 주문을 받으러 돌아다녀야했던 그의 초상화가 이제 미술시장에서는 수천만 원을 호가할 뿐더러, 그의 작품을 보러 전국 각지에서몇 시간이고 차를 달려 미술관을 찾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다른 나라 미술관에서도 그의 초상화가 자랑스러운 소장품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은 필시 그를 기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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