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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6 |
[기획특집] 내 뜻으로 붓을 든다, 호생관 최북
관리자(2012-06-05 14:41:23)
내 뜻으로 붓을 든다, 호생관 최북 권혜은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1712~1786년경)은 18세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직업화가 중 하나이다. 최북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등에 따르면 조선시대 중인 가문이었던 무주 최씨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무주 최씨는 조선시대 잡과雜科 출신들을 주로 배출한 중인 가문이었다고 한다. 집안의 뿌리가 전북 무주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지역에서 마땅히 주목받아야 하는 인물이다. 이번 특별전은 최북을 주제로 한 전시로는 처음으로 열리는 것으로, 그의 주요 대표작들과 기록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하겠다. 최북은 그 유명세에 비해 생애와 가계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당대 손꼽히는 화가였지만 선비화가도 아니고,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도 아닌 중인 직업화가였기 때문이다. 중인화가들의 기록이 모두 전무한 것은 아닌데, 도화서 화원들은 대를 이어 화업畵業을 이어갔기 때문에 조선시대 기술관의 합격자 명단인 『잡과방목雜科榜目』이나 가문에서 내려오는 세보世譜 등을 통해 가계나 생애가 파악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북은 도화서 화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그는 앞서 언급하였듯 무주 최씨 출신으로 알려졌는데, 무주 최씨는 호조戶曹의 하급관리직을 주로 배출했던 가문으로, 조선 말 사멸되어 없어진 성씨로 추정되기 때문에 가계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은 그와 교류했던 문인들의 기록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워낙 많은 일화가 전해졌던 인물이어서, 그와 가까웠던 문인이나 그의 일화를 전해들은 후대 문인들의 기록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애호하면서도 한미한 가문 출신에도 신분에 얽매이지 않았던 최북에 대해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번 전시구성의 한 부분인‘타인의 시선’에서는 이러한 문인이나 중인들의 기록에서 그를 보는 엇갈린 시각들에 대해 소개하고자 하였다.기록들에 따르면 최북의 어릴 적 이름은 식埴이었고, 자字는 성기聖器 혹은 유용有用이었는데, 훗날 이름을 북北으로 바꾸고 北자를 나누어 ‘칠칠七七’이라는 자를 지어,‘七七’이라는 인장을 찍기도 하였다. 또한 호號로는 호생관毫生館을 비롯하여 거기재居其齋·삼기재三奇齋·성재星齋 등을 다양하게 남겼다. 이 중 가장 유명한 호인‘호생관’은 뜻 그대로 풀자면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비하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지만, 거꾸로 보자면 “오직 붓으로만 사는 사람”이라는 화가로서의 자존감을 나타내는 의미가 더 강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삼기재’라는 호는 세 가지에 능한 사람, 즉 ‘시서화에 능한 사람’으로 풀이될 수도 있어, 최북이 품었던 당당한 예인의 자긍심을 잘 보여주며, 이러한 호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그림만 잘 그린 사람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최북의 자유로운 성품과 풍부한 식견은 당대 최고의 정치가이자 문인이었던 남공철南公轍(1760~1840)의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문집인 『금릉집金陵集』의 「최북전崔北傳」에는 최북을 만나보고 느낀 평을 적고 있다. 그에 따르면 최북은 본래 술을 즐기고구경 다니기를 좋아해서 금강산 구룡연을 보고 “천하의 명인인 나는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며 몸을 날려 뛰어들었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또한 만족스러운 그림의 값을적게 주면 벌컥 화를 내고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흡족하지 못한 그림인데도 값을 후하게 주면“저 자는 그림 값도 모른다”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왕실 종친인 서평공자西平公子 이요李橈와 내기 바둑을 두다 서평공자가 한 수를 무르자고 청하니, 바둑돌을 훑어버리고 다시는 서평공자와 바둑을 두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와 관련한 여러 일화들을 통해 최북을 기행을 일삼았던 사람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돈과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자했던 그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남공철은 최북을 말하는 글의 마지막에 세상 사람들은 최북을 주정뱅이니 환쟁이니 하며 심한 경우에는 미치광이라 손가락질 하였지만, 그의 말에는때로 기묘한 깨우침과 실용적인 것이 있었고, 여러 책을 즐겨 읽었으며 고아한 시 또한 지을 줄 알았던 식견있는 사람이라 덧붙였다.이렇듯 최북은 분명 직업 화가였음은 틀림없지만 자신의 예술관이 뚜렷한 화가였다. 최북을 이른바‘조선의 반 고흐’라 부르기도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잘 살펴보면 의외로 굉장히 점잖은 문기文氣가 흐르는 화풍을 구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북은‘최산수’,‘최메추라기’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산수화, 화조영모화, 인물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능숙히 다룰 줄 알았던 뛰어난 화가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다양한 장르의 작품과 내면세계를 그린 시의도詩意圖들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유명한 옛시들을 그림으로 표현해 낸 시의도는 조선 후기 문인들이 즐겨 그렸던 장르인데, 지식인 화가였던 최북은 중국과 조선의 명시들을 여러 편의 그림으로 남기고 있어, 문인의 삶을 살고자 했던 최북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이러한 최북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해 학계에서 주목하게 된 것은약 20여년 전 쯤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최북은 시기적으로 본다면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사이에 활동한 인물이다. 진경산수화에서는 정선의 영향이 보이기도 하고, 김홍도와 같은 호방한 필치를 과시하기도 하다. 직업화가로는 일찍 중국의 남종문인화를 섭렵하였고 화보를 연마하였으며 이러한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문기와 개성을 갖춘 자신의 화풍을 정립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시서화에 모두 능한 사람을‘삼절三絶’이라고 불렀는데, 이 경지에 이르는 것은 문인 사대부들이 추구했던 이상향이기도 했다. 중인이면서도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시서화를 즐기며 문인의 삶을 살고자 했던 이른바 여항문인閭巷文人은 그가 활동한 시기에 등장한다. 최북이 바로 이러한 18세기 지식인 직업화가의 전형적인 모델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최북은 젊은 시절 작품들은 당시 유행했던 중국의 화보나 새로운기법 등을 연마하며 조심스럽고 차분한 화풍을 구사하였다. 꾸준히기량을 연마하고 문인들과 교류하며 식견을 갖춘 중년기 이후의 작품에서 비로소 그의 호방한 필치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시의도詩意圖들이 등장하게 된다.“빈산에 사람 하나 없고,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空山無人 水流花開”라는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1037~1101)의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중 한 구절을 화제畵題로 삼은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와 같은 대표작은 그의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또한 알려진 그의 대표작들은 산수화들이 대부분인데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듯 작품 수로 보자면 세필이 돋보이는 화조 영모화가 더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수하인물도 등 여럿 인물화들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강세황이나 심사정과 함께 화조도나 소채도의 소재를 공유했던 정황도 파악되는 등, 그가 다양한 장르에 능했던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시에서는 선보이지 못했지만 새롭게발굴되어 도록에서 소개한 주자 영정이 있다. 기록과 정황으로 미루어 최북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최북의 초상은 알려진 바가 없는데, 이 작품이 최북의 연구에 또 다른 쟁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도 놀랐던 것은 최북이 시의도들을 상당수 남겼다는 점이다. 시서화에 능했던 문인들이 자신의 내면세계나 이상향을 시와 그림으로 풀어내기 위해 그렸던 시의도를 직업화가인 최북이 일찍이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높은 식견과 자의식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시의도와 그 속에 담긴 시의 내용을 풀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특별전“호생관 최북”에서는 300년 전 돈과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예인藝人으로서의 삶을 살다 간 화가 최북이 지금의 우리에게 자신의 얘기를 술회하는 구성으로 담아냈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최북은 중인 출신의 직업 화가이면서도 일찍이 시서화에 모두 능했던, 식견을 갖춘 지식인 화가였음은 작품을 통해 투영된다. 또한 전시와 연계하여 다양한 체험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전시실 옆에 마련된 체험공간에서는 최북의 화조영모화 그리기, 인장 체험, 산수화 그려보기, 최북에게 쓰는 편지 등 다양한 체험활동을 해볼 수 있다. 전시실에서는 작품을 활용한 Flash Art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으며, 전시실에 비치된 활동지를 풀어보면서 보다 쉽고 재미있게 최북의 회화세계를 이해하고 체험해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우정을 나눈 선비 이현환李玄煥(1713∼1772)과 나눈 대화에서, 최북은 이렇게 말한다. 그림은 내 뜻에 따른 것일 뿐! 세상엔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드무네. 참으로 그대 말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 그린 나를 떠올릴 수 있으리. 뒷날 날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고 싶네. 그의 이러한 바람은 약 300년이 지난 지금, 전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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