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는 스와니강을 본 적도 없다 문윤걸 예원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 “머나먼 저 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미국 민요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스와니 강’이라는 노래입니다. 아마 초등학교 때 하모니카 좀 불어 보신 분들은 다 한번쯤 불러보았을 겁니다. 또 이 노래를 작곡한 사람이 포스터(Stephen Collins Foster, 1826~1864)라는 것도 다 아는 얘기구요.‘스와니강’의 노랫말은 스와니 강 주변에 살던 한 흑인이 고향을 떠나 방랑생활을 하던 중 나이가 들어 고향과 젊은 날을 회상하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경을 담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몇 가지 사연이 있답니다. 포스터는 이 노래를 25세가 된 1851년에 만들었습니다.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를 만들기로 작정하고 먼저 선율부터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제목을‘고향의 옛 친구들(Old Folks at Home)’이라고 정해놓고 선율에 맞춰 가사를 써내려갔습니다(포스터는 작사가로도 훌륭했습니다. 대부분의 노랫말을 자신이 직접 썼습니다). 미국 남부 흑인 노예들의 애환과 떠돌이 생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적으로 담아내려던 중에 강 이름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땅한 강 이름을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 모리슨과 함께 미국 남부 지도를 펼쳐놓고 강 이름을 찾던 중 서정적이면서도 발음이 부드러운 플로리다의 스와니강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포스터는 그 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요. 이렇게 만들어진‘고향의 옛 친구들’이라는 노래는 어느 날 부터‘스와니강’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이 노래는 빅히트했습니다. 악보가 무려 13만장이나 팔렸고, 남북전쟁 때는 남군, 북군 할 것 없이 애창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또 영국에까지 널리 알려지면서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한 영국 병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플로리다에서 멕시코만으로 흐르는 작은 강, 스와니강은 세계사람 누구나 다 아는 강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플로리다주는 이 노래를 주가(州歌)로 정했고 강변에 포스터 기념관을 만들고, 포스터의 또 다른 노래‘금발의 지니’를 따서 해마다 미인선발대회를 열고 있답니다‘( 켄터키 옛 집’은 켄터키주의 포스터 기념관으로 관광명소가 되었답니다). ‘금발의 지니’라는 노래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포스터가 사랑했던 여인인 노래 속 지니는 포스터의 부인인 제인이라고 하는 데 그녀의 머리 색깔은 금발이 아닌 갈색머리였습니다. 그런데 왜 노래 제목이 금발의 지니일까요? 포스터가 그렇게 노래 제목을 쓴 것은 아닙니다. 포스터는‘밝은 갈색머리의 지니(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라고 제목을 제대로 붙였는데 이 노래가 일본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일본인 번역가가 갈색머리 지니 보다는 금발의 지니가 더 멋있어 보여 그렇게 번역했고(일본인은 금발의 외국인 여성에 대한 환상이 있답니다) 그게 우리나라로 다시 수입된 것이지요(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서양음악은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일본을 거쳐 수입된 탓에 일본식 제목과 노랫말로 번역되었거든요). 이외에도 포스터가 작곡한 노래들은 유명한 노래가 너무 많습니다. ‘오 수재너’,‘ 올드 블랙 조’, ’벤조를 울려라‘ ’캠프타운 경마‘, ’컨터키 옛집‘, 그리고 ’꿈길에서‘ 등 초중고 음악 교과서에 가장 많은 곡이 실린 작곡가 일 겁니다. 우리는 포스터를 당시 미국 흑인노예들의 애달픈 삶에 대해 연민을 가지고 그들이 삶을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선율로 담아낸 작곡가라고 배웠습니다(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가 흑인노예들이 고통 받고 살았던 미국 남부 태생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동북부 지방인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났고 작곡활동은 고향과 뉴욕에서 주로 했답니다. 남부는 딱 한차례 여행을 다녀 온 것이 전부였지요. 하지만 포스터가 활동하던 시기가 남북전쟁 직전이어서 흑인들의 삶에 대한 연민도 깊었고 또 잠깐이었지만 남부 여행 도중 흑인 노예들의 삶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아 흑인음악의 선율을 사용하고 또 가사에서 흑인 사투리를 쓰기도 하면서 그들의 숙명적인 삶과 애환, 인간미 등을 표현하는 작품들을 생생하게 써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포스터가 활동하던 시기 미국에서는 백인가수가 흑인분장을 하고 흑인 역할을 하는 일종의 뮤지컬인 민스트럴이라는 쇼가 대유행이었는데 포스터는 민스트럴을 위한 작곡을 많이 했습니다(그 스스로 최고의 민스트럴 작곡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적도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생생한 흑인의 삶을 표현하는 노래를 많이 쓸 수밖에 없었지요(그래도 워낙 뛰어난 곡이 많아서 폄하할 수는 없지요). 포스터의 작품들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뛰어난 서정성과 친근함으로 고향에 대한 향수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회고 등의 감정이 물씬 드러나는 노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포스터의 말년은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늙은 흑인 노예의 삶과 같았습니다(가수나 작곡가의 삶은 자신의 노래 따라 간다지요). 그는 방랑을 거듭하던 중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다 38세에 뉴욕의 허름한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다 알코올중독, 영양실조 등으로 홀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남긴 것이라고는 녹슨 1페니 동전 3개, 임시증권 35센트, 그리고 연필로‘친한 벗과 상냥한 마음씨의 사람들’이라고 휘갈겨 쓴 종이쪽지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오늘날 가장 미국적인 노래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 개척시대와 흑인 노예시대, 미국인들의 삶과 애환을 맑고 순수한 시로 담고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서정성과 따스한 감성으로 담아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 그의 노래는 알지 못할 노스탤지어가 있어서 나이 든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답니다.그의 노래를 부르다 보면 지나온 시절이 그리워지고 또 따뜻한 사람이 그리워져 지나 온 것에 대한 소중함이 떠오르기때문일 겁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미국에서는 전쟁에서 희생된 병사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는 행사나 늙은 병사들을 위한 재향군인회의 날 행사에서는 포스터의 여러 노래들이 기념행사에 꼭 사용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