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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 |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 되돌아보는 클레르몽페랑 국제 단편 영화제
관리자(2011-12-01 16:40:41)
시민들의 관심이 일군 국제단편영화제의 중심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Festival International du Court Metrage a Clermont-Ferrand)는 세계 단편영화의 중심이다. 그러나 나는 1999년에서야, 그것도 프랑스의 젊은 친구 질 코파의 도움으로 그 곳에 갈 수 있었다. 코파는 1995년 몬테카티니 단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함께 일하면서 알게 된 단편영화 전문가로 칸영화제 단편영화선정위원이었다. 그는 유럽 각 지역의 단편영화제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풍부한 경험의 소유자이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를 준 것은 클레르몽페랑 영화제였다. 내가 클레르몽페랑 영화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단편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라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곧 가겠다”던 그 때의 계획은 4년이 지나서야 실현됐다. 그 사이에 나는 씨네21의 해외특별기고가로 여러 국제영화제에 대한 글을 쓰고 부산영화제와 관련된 이런저런 일을 맡았던 데다 내 개인 프로젝트‘한국영화 유럽 회고전’들이 서로 엉클어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1999년 초에 틈이 나서 코파에게 연락을 했다. 코파는 내 전화를 받자“곧 간다더니 이제냐?”고 빈정거리면서도 친절히 클레르몽페랑 영화제의 프레스센터에 연락하여 초청장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클레르몽페랑은 프랑스의 화산지대인 중부지방에 자리한 인구 14만의 조그만 도시로 주로 식품과 자동차 바퀴 등을 생산하는 산업지역이다. 도시는 그리 아름답지 않았으나 11-12세기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노트르담(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속함)과 13세기의 고딕 풍의 클레르몽페랑 노트르담 성당들이 아름답다. 그리고 문화면에서는 프랑스에 널리 알려진 200여 개의 춤과 음악 단체가 이곳을 본거지로 널리 활동하고 있으나 뭐니 뭐니 해도 클레르몽페랑을 세계적인 명소로 만든 건 이곳의 국제단편영화제다. 1999년에 21회를 맞는 클레르몽페랑의 국제단편화제는 코파로부터 들었던 대로 진짜‘꼭 가봐야 할 곳’이었다. 이 영화제를 두고 유럽 평론가들은‘세계 최고의 단편영화제 또는 단편영화의 칸’으로 치켜세웠는데 그런 평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영화제 프로그램의 수준은 높았고 범위도 다양했다. 무엇보다 상영장마다 넘치는 관객들,특히 60~80세의 노인층 관객들이 유명세에 상관없이 단편영화를 보겠다고 영화관 앞에 피곤함도 잊은 채 줄지어 서있는 모습은 어느 영화제서도 볼수 없는 인상 깊은 장면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영화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얼마나 높은가는 영화제의 마지막 날에 발표된 영화제 측의 결산보고에서도 잘 나타나 보였다. 1999년에 기록된 관객 수는 12만2천 명이었다. 그 가운데 유료관객이 75%를 차지했으며 관객의 1년 증가율은 12%였다. 클레르몽페랑 영화제의 협조자로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던 코파는 내가 영화제의 운영비에 대해 묻자“관객의 입장료에서 얻는 수입으로 경비의 절반을 충당하는 영화제는 세계에서 클레몽페랑 영화제 하나뿐이다. 그에다 지역정부의 영화정책은 프랑스 전국에서 본보기가 될 정도로 적극적이다. 하지만 성공의 비결은 영화제에 대한 평균수준을 넘는 시민의 지속적인 관심이다”라면서 일반시민의 참여와 연대의식을 높이 평가했다.유럽의 숱한 소규모 영화제들이 그렇듯이 클레르몽페랑 단편영화제 역시 영화에 미친(?) 젊은이들의 간단없는 노력을 밑받침으로 태어났다. 이는 1979년 이 도시의 시립대학교에 다니는 몇몇 학생들이 시네 클럽을 만든 뒤에 단편영화주간을 열면서 시작됐다. 이들의 정신적 지도자는 1982년에 서거한 프랑스의 유명한 희극영화의 대가 자크 타티 감독이었다. 1979년에서 1981년까지 대학의 씨네 클럽에서 주최하던 영화주간은지속적으로 높아지는 단편영화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에 발맞추어 1981년에 새로 만든 조직체를 바탕으로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직체의 핵심인물인 조지 불롱과 앙투안 로페즈, 조르즈고닝, 자크 커틸은 클레르몽페랑 영화제의 공동집행위원이 되어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조직체의 이름을‘재주껏 도망쳐라 단편영화’로 불렀는데 물론 장뤽 고다르의 1979년 작품‘재주껏 도망쳐라’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다만 고다르 영화의 원제목은‘재주껏 도망쳐라 (삶)’(Sauve qui peut(la vie) 이었지만 조직원들은 삶을 빼고 그 자리에 프린트 한 조각을 들고 내달리는 광대의 그림과 그 밑에‘단편영화’를 써 붙임으로 고다르 영화 제목과 차별성을 두었다.나는 영화제의 성공의 배경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앙토안 로페즈 공동위원장과 대담시간을 가졌다. 그의 대답의 일부를 옮기자면“대학의 씨네 클럽은 경비부족으로 처음에는 국내의 단편영화 10편만 가지고 행사를 치렀다. 그러나 학생들의 반응이 기대이상으로 좋아 2회 때에는 100편으로 숫자를 늘렸다.그리고 1982년에 씨네 클럽의 단원들이 영화주간의 개막식 무대 위에서 역사적인 선언문을 읽게 되는데 그 내용은“단편영화를 외면하는 영화계의 태도는 영화매체의 혁신과 영화예술의 연구 가능성을 저버리는 것과 똑 같은 행동이다. 그런 풍토에서 영화의 장래는 있을 수 없고 영화는 만들어지지만 거기에 어떤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이었다. 선언문이 나오던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연간 100여 편의 단편이 만들어졌으나 이들을 보여줄 영화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호소문은 영화인들사이에 많은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그 결과 파리의 국립영화중앙처(CNC)와 지방정부 그리고 또 시에서 처음으로 지원을 하기 시작했고, 그 지원을 발판으로 국내뿐 아니라 외국 영화들이 영화주간에 소개됨으로 1982년에 국제영화제로 태어난 것이다. 선언문이 나온 20년 뒤, 어느덧 중년이 되어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로페즈의 진지한 대답을 들으면서 나는 클레르몽페랑의 성공이 어디서 오는지를 조금은 알것 같았다. 그리고 몇 달 뒤에나는 부천영화제로부터 초청을 받았고 그걸 계기로 부천영화제 집행위에 로페즈를 심사위원으로 추천했다. 그의 풍부한 경험과 열성이 초기를 맞는 부천영화제에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아서 한 것이다. 내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부천영화제서 나는 심사에 상관 없는 개막식의 무대장치를 돕느라 영화제의 기술팀에 끼어 바쁘게 일하는 로페즈를 만났던 것이다. 클레르몽페랑에서 만난 한국의 단편영화들 클레르몽페랑 영화제는 1982년 국내영화의 경쟁부문을 먼저 열은 다음 10년 뒤에 외국영화 경쟁이 포함되면서 국제영화제로 불리기 시작했다. 1999년에 선정된 외국영화는 363편이었고 그 가운데 45개국에서 출품된 75편이 경쟁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최진호 감독의 <동창회>와 임필성감독의 <소년기> 두 편이 경쟁에 들었었다. 그 밖에 김대현 감독의 <영영>과 윤종찬 감독의 <풍경>이 비경쟁 부문을 통해 상영됐다. 한국의 단편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시기는 1993년으로 그 해에 변혁, 이재용 감독의 공동작 <호모비디쿠스>가 경쟁부분에 뽑혀 기술혁신상과 청년상을 받아 첫길을 트는데 한몫 했다. 그러고 나서 곽경택 감독의 <영창 이야기>, 박기형 감독의 <과대망상>, 민규동 감독의 <허 스토리>가 그 뒤를 따랐고 1998년에 김진한 감독의 <햇빛 자르는 아이>가 다시 기술혁신상을 받아 비교적 짧은 기간에 언론으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유럽의 단편영화제 가운데 영화시장을 갖춘 곳은 클레르몽페랑 영화제뿐이다. 이 영화제가 세계적 규모로 급부상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단편영화 시장의 명성에 힘입었다. 1999년 14회를 맞는 단편영화의 영화시장은 영화제의 중간쯤에 닷새 동안 열렸고, 그 기간에 300편 영화가 거래됐으며 국내외의 25개 영화기관과 영화사들이 행사에 참가했었다. 한국에서는 배급사 미로비전(대표 채희승)이 처음으로 필름 마켓에 참여했으며, 그 해 미로비전이 견본시장을 통해 소개한 작품은 28편이었다. 그리고 스페인, 벨지움, 폴란드 등의 채널 풀러스와 위성방송(TPS Cinema), 독일의 제2방송과 아르테 (ZDF, Arte), 호주의 ABC, SBS 방송사, 미국의 PBS, 일본의 TV Man Union를 상대로 만남이 이뤄졌고 몇몇 작품은 10개의 국제영화제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1998년 설립된 미로비전은 한국영화 해외 마케팅과 배급을 다루는 한국 최초의 전문회사로서, 앞에서 언급한 <동창회>와 <소년기>는 미로비전을 통해 경쟁부문에 오르게 됐던 것이다.1999년 클레르몽페랑 영화제에 최진호와 임필성 감독이 초청됐는데 임 감독은 1998년 초봄에 서울에서 한번 만났었다. 그 무렵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의 초빙교수로 초청되어 봄 학기동안 영상연출과에서 유럽영화사에 대해 강의를 했다. 내가 강의를 맡게 된 데는 1993년 스위스 프리부룩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초청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박종원 감독(한국예술종합학교 현 총장)의 추천으로 이뤄졌다. 말이 좀 옆으로 흘렀는데, 아무튼 한예종에서 강의를 하던 어느 날 채희승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임필성 감독의 <소년기>가 끝나서 보여주고 싶은데 임 감독과 함께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채희승씨는 국제영화제에서 몇 번 만났던 친지 사이어서 그날 바로 내가 머물고 있던 한예종에 딸린 중화동의 아파트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셋은 <소년기>를 보고 난 다음 상당 시간 토론을 했다. 이들 둘은 <소년기>를 칸에 출품하고 싶은 듯했으나 나는 오히려 작은 영화제가 나을거라고 했다. 그시기에 한국의 영화계서는 영화작업이 끝나면 무조건 칸으로 가야 한다는 어떤 강박관념이 심했었는데, 그건 한마디로 각 영화제의 성격 파악이 부족한 데서 생기는 일종의 착시 현상이었다. 그리고 단편의 경우도 규칙상 상영시간은 30분을 넘지 말아야 함에도 한계를 넘는 영화들이 많았다. <소년기>도 그에 속했는데 나는 임 감독에게 짧게 재편집을 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10여 개월 뒤 이들을 클레르몽-페랑에서 다시 만났다. 거기서 임필성 감독의 새로 편집된 <소년기>을 경쟁영화 상영실에서 직접 보고 또 마켓에서 채희승 대표의 막 생겨난 미로비전 배급사를 방문하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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