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 |
[문화시평] <김화숙&현대무용단 사포‘우리는 사랑했을까’>
관리자(2011-12-01 16:36:54)
<김화숙&현대무용단 사포‘우리는 사랑했을까’>(11월 26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사랑의 부활을 꿈꾸는 반어법(反語法)의 장엄한 레퀴엠
이상일 성균관대 명예교수/무용평론가
김화숙과 현대무용단 사포의 무용공연을 좋아하는 시각에서 이 무용단의 최근 작품 경향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이번 26회 정기공연 <우리는 사랑했을까>의 주제 내용도 그렇고 안무 방식도 서너 개의 줄기들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우리는 사랑했을까>라는 주제는 말할 것도 없이‘사랑’이 중심 테마이다. 이 사랑이라는 주제 내용이 로미오나 줄리엣의 사랑, 혹은 젊은 베르테르처럼 열정적이다 못해 편집증적인 절망으로 흐르는 보편적 예술작품의 속성으로 볼 때 사포의 이번공연 작품이나 지난 번 작품 <지나가리라>, <눈물어릴 나의 사랑> 등등에서 보여 주듯 그 주제는 그냥 추억이나 회상에 잠겨 감상에 젖는 미숙한 단계가 아니다. 사랑도 사포무용단의 역사와 연륜만큼 성숙해지고 성찰(省察)적이라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할 것 같다. 사랑의 인식만큼 사포현대무용단의 예술적, 사회적 의식이 감정적이고 표피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삶의 깊이를 새기게끔 생각의 폭이 넓어져‘성찰적’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했을까>는 단정짓지 않는다. 사랑만은 확실한 개인적 실질적 체험인데 이렇듯 반어법(反語法)으로 묻는 것은 사랑했음을 강조하는 어법이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랑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장엄한 사랑의 장송곡, 어쩌면 떠나간 사랑에 대한 레퀴엠으로 우리 곁에 없는 그들의 기념탑을 세우기 위하여‘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현대무용이라는 형식으로’몸부림친다.
이 공연은 추억의 사랑, 회한으로 남는 사랑으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그러니까 버려두었던, 잊어버리고 있던 사랑을 찾아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으려는 사랑의 재생과 부활을 꿈꾼다. 그러므로 반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했을까.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사랑을 잊고 떠나간 사랑의 그 사람을 잊어버리고 그 잃어 버렸음을 가슴 아파하고 그 상실의 커다란 허무를 울면서 그냥 기억하고, 추억하고 회한하는 것만으로 끝낸 것 아닌가. 사랑의 재생과 부활은 떠난 자, 우리 곁에 없는 그들을 우리곁으로 다시 불러 오고 찾아오는 굿·제의와 같다. 그렇게 떠났던 죽은 그들이 돌아온다. 창백한 영혼과 정신의 세계에서 피가흐르는 따뜻한 정의(情誼)의 현실로 불러들이려는 이 장엄한 레퀴엠은 그냥 잊고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강렬한 초혼(招魂)의 현대굿이다. 따라서 안무방식도 몇 개의 줄기와 가닥을 묶어서 하나로 엮는다. 이미지 1.‘ 바람의소리’는 박진경 안무, 이미지2.‘ 그는 어둠속으로 걸어갔다’는 강정현 안무, 이미지 4.‘ 말하기 시작했다’는 김자영 안무로 가다듬어지고 세 사람의 안무 이미지들의 연결고리라든지 이음새, 강조의 포인트와 시작과 끝마무리의 프롤로그, 에필로그 그리고 이미지3‘ 하얀 달’등은 예술감독 김화숙의 책임이다. 그래서 사포현대무용단의 무용적 기량과 표현적 기교, 그리고 안무형식은 젊은 김화숙을 많이 닮았고 그것이 바로 사포의 역사이며 연륜이라 할 수 있다. 서울, 중앙을 벗어나 호남지역, 익산을 중심으로 한 광주, 전남·북 지역의 현대무용을 책임지는 한국의 피나 바우쉬, 독일, 아니 세계의 현대무용 성지가 되어가는 독일의 작은 도시 부퍼탈의 이름처럼 호남, 아니, 한국의 익산에 터를 잡은 김화숙과 현대무용단 사포여, 영원하라!
프롤로그에서는 서로 다른 사랑의 군상(群像)이 세 안무자로 체화(體化)되어 묵화(墨畵)로 피어나듯 서로를 밟고 전면으로 나오는데 아득한 기억이 되어버린 꽃잎처럼 낙엽처럼 그렇게 바람에 실려 가듯 한 영상의 사랑도 있었지... 그런가 하면 절망적인,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검은 흑의(黑衣)를 걸친 사랑이 저만치 어둠속으로 걸어가기도 했다. 사랑하던 상대의 죽음이 나를 절망시킬 뿐만 아니라 나를 절망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런 사랑도 있었다.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애달픈 사랑은 또 어떤가... 그런 사랑의 여러 유형들이 무용예술을 통해 그 아픔을, 고통을, 기억과 추억을, 그리고 회한(悔恨)을 춤의 시로, 그림으로, 움직임의 형상으로 표현한다. 그 사랑은 관능이기도 했고 지배와 반항의 역작용(力作用)이기도, 혹은 운명적인 이별과 사별(死別)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모습들은 여러 가지와 줄기의 커다란 집합체인 밑뿌리를 짐작케 하듯, 바다로 흘러든 강줄기들처럼 마침내 인간 삶의 커다란 합창으로 울려퍼진다. 에필로그는 그렇게 아홉 명의 하얀 순결의 옷을 걸친 사랑의 전형(典型)들이 눈물을 감추며 전진 후진을 거듭하며 무대의 전면으로 나와 대미를 장식한다 그러고 보면 사랑의 순결은 하얗고 절망적인 죽음은 검은 흑의(黑衣)이며 사랑의 열정은 빨간 색이다. 그러나 이 <우리는 사랑했을까>에서는 빨간 옷을 걸친 행운의 여인은 김자영, 그런데 죽음 같은 절망을 앓는 역할은 강정현 만이 아니라 놀랍게도 박진경도 있다. 낙엽을날리고 감정적인 기포(氣泡)를 끓어오르게 하고 강물 같은, 구름 같은 영상처리로‘감정의 벽’다운 무대장치를 설정한 미술감독 표종현의 문으로 상정된 붉은 천위에서 시선을끌었던 조다수지와 최은봉, 그리고 놀라운 에너지로 군무진을 이끄는 송현주 등 전체적으로 사포현대무용단 앙상블은 차분하고 성숙하게 맡은 소임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 성숙 속에서 오는 활기찬 에너지는 연륜을 넘어서는 차원의 것이어서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통한 느림의 미학을 추구했던 예술 감독 김화숙의 의도는 뜻하지 않게 26회에 걸친 정기공연의 실적과 실력과 강력한 에너지와 스피드 앞에 복병을 만난 셈이 되었지만 그만한 사포단원들의 잠재능력이면 한국의 피나 바우쉬를 꿈꾸는 김화숙 교수에게 익산은 축복의 땅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