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 |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순창 3
관리자(2011-12-01 16:34:48)
오백년 전 유학의 산실, 다시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황재근 기자
순창에는 기개 있는 선비들의 사연이 얽혀있는 장소가 여럿 있다.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가 벼슬을 마다하고 터 잡은 귀래정이 있고, 억울하게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위해 세 고을의 수령이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상소를 올릴 것을 맹세했다는 삼인대가 있다. 그리고 기호학파에 큰 영향을 미쳤고 호남유림의 뿌리가 되는 하서 김인후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친 훈몽재가 있다. 꼿꼿하고 당당하며, 영달보다는 자연을 벗하는, 풍류를 아는 선비들의 전통은 순창의 자랑이다.
권력에 굴하지 않은 선비들의 절개
귀래정(歸來亭) 신말주는 단종 2년에 벼슬길에 올라 대사간까지 이르렀으나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 버리고 부인 설씨의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따 지은 귀래정은 지금도 그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당대의 문필가인 서거정이 지은 <귀래정기> 와 강희맹의 시문이 보존돼있다. 형인 신숙주가 세조 치하에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으니 원하기만 한다면 그 영화를 함께 맛볼 수 있었겠지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내세우며 끝까지 중앙 정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순창에 살면서 명문가로 대접을 받았다. 특히 그의 11대손인 여암 신경준은 영조 때의 실학자로 지도 제작과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신경준이 지은 <운해훈민정음(韻解訓民正音)>은 훈민정음 창제 이래 가장 깊이 있는 문자학, 성운학적 연구로 꼽힌다. 강천산 계곡에 위치한 삼인대(三印臺) 역시 조선 유림의 결기를 보여주는 장소다. 중종반정 성공 이후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 등 공신들은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신씨를 폐위하고 새로운 왕비 장경왕후를 들였다. 10년 후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 세 고을수령은 비밀리에 강천산 계곡에 모여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키기 위해 상소를 쓰기로 결의한다. 이때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를 나눴다하여 후대에 삼인대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단경왕후는 영조 때 복위됐고, 이와 함께 세 명의 의로운 맹세를 기념하기 위해 순창의 선비들이 비각을 세웠다.
호남 유학 제일의 산실, 훈몽재
하서 김인후 선생이 은거했던 훈몽재는 순창이 호남유림의 중심이었음을 상징하는 장소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22살에는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9살 위인 퇴계 이황과 함께 도학에 대해 토론했다. 31살에 과거에 급제했고 이후 세자(훗날 인종)를 가르치게 됐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빠져 관직에서 물러났다. 처음에는 선생의 고향인 장성으로 귀향했으나 순창 백방산 밑에 훈몽재를 설립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했다. 당시 훈몽재는 목조건물 한 채의 작은 규모였다고. 가르칠 훈(訓), 어릴(어리석을 )몽(?)이란 이름 그대로 어린아이들부터 그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선비들까지 모여 학문을 닦는 공간이었다. 선생 스스로도 호남일대의 소쇄원, 면앙정, 식영정, 환벽당 등을 찾아다니며 당대의 석학·문사들과 교류를 나눴고, 문장에도 능해 많은 논설과 함께 1천500여 수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당대에는 영남의 퇴계, 호남의 하서라 불릴 정도로 성리학의 대가로 꼽혔으며, 후대에도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개산조로 인정받았다. 특히 정조는 선생을 일컬어“도학과 절의 문장 어느 하나라도 갖추지 않음이 없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정조 20년에는 호남 유림 중에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어 동국 18현으로 추존됐다. 특히 선생이 호남의 유림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당대 호남의 명유(名儒) 고봉 기대승과 일재 이항 등이 선생과 교류하며 학문을 닦았고 사미인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은 어린시절부터 훈몽재에서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훈몽재 안에는 정철이 하서 선생과 대학을 논했다는 대학암이 있고, 인근마을에는 정철의 공부를 위해 사두었던 논이라는 정철배미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런 명성 때문에 훈몽재는 호남 유학의 제일 산실로 불렸다.
건물만으로는 맥을 이을 수 없다
훈몽재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불타버린 건물을, 지난 2009년 순창군이 복원하면서 부터다. 올해부터는 고당(古堂) 김충호 선생이 산장(山長)을 맡아 강학을 하고 있다. 주로 방학 때 대학의 학부생들이 단체로 찾고 있다. 하지만 아직 옛 명성을 되찾기에는 갈 길이 멀다. 방학 때를 제외하고는 활용도가 낮을뿐 아니라, 한꺼번에 많은 학생이 찾았을 경우에는 산장 혼자서 감당하기 버겁기도 하다.김충호 산장은“지역의 향교 등 오래된 교육기관들을 관광지가 아니라 실제 교육을 하는 장소로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며“훈몽재가 호남뿐 아니라 전국에 널리 알려져 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든 언제나 머물다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먼저 순창 관내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단기간의 전통예절교육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김충호 산장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지역의 학자들과 함께 하서 선생을 비롯해 기고봉, 이일재, 전간재 등 호남 유학자들의 문집을 강독하는 모임도 구상하고 있다”며“기왕에 좋은 장소가 마련됐으니 잘 활용해 다시 호남유림의 중심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비들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다시 훈몽재에서 흘러나오도록 하려면, 인력과 운영방안에 대한 고민이 함께 진행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