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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 |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순창 2
관리자(2011-12-01 16:34:29)
소리를 품어 명창을 키웠다 최동현 군산대학교 교수 동편제와 서편제, 순창에서 싹트다 판소리가 언제 누구에 의해 불리기 시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문헌에 등장하는 기록으로 보면 1754년(영조 19년)에 판소리는 남도 지역에서 거의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판소리가 널리 퍼져 일반 서민들뿐만 아니라 양반 사대부들도판소리를 감상하는 일이 일상화되고, 궁중에까지 침투하게 되어 명실 공히 민족예술로 성장한 시기는 19세기이다.19세기에 판소리에는 서편제 판소리라고 하는 새로운 분파가 형성되어, 크게 동편제 판소리와 서편제 판소리가 대립하면서 발전을하게 되는데, 이 시기 박유전과 김세종은 순창 출신으로서 각각 서편제와 동편제 판소리를 시작하여 판소리사의 새 장을 열었다.박유전에 의해 시작된 서편제 판소리는 광주·나주·보성·화순·담양 등지에 전승되었다. 순창은 전형적인 동편제 판소리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박유전이 만들었다는 새로운 양식의 서편제 판소리가 뿌리를 내릴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순창에는 동편제 판소리의 비조로 알려진 송흥록의 소리를 계승한 사람이 없다.송흥록과는 다른 동편제 판소리를 한 사람이 바로 김세종이다. 김세종은 신재효가 활동할 때 신재효의 사랑에서 소리를 가르친 사람이다.이처럼 순창은 서편제 판소리의 시조인 박유전이 탄생하고 소리를 익힌 곳이며, 송흥록과는 또 다른 동편제 판소리의 시조인 김세종이 낳고, 소리를 익히고, 살았던 고장이다. 순창이 비록 동편제 판소리의 전승지로 알려져 있고, 후에 실제로 서편제 소리꾼은 한 사람도 배출되지 않은 고장이라고는 하지만, 서편제 소리 또한 이곳출신 박유전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은 순창이 판소리사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 판소리의 고장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순창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양대 유파인 동편제, 서편제 판소리가 모두 태어난 유서 깊은 고장이다. 박유전과 김세종 판소리의 전승 박유전은<춘향가> 중‘이별가’, <적벽가>,‘ 새타령’을잘불렀으며, 대원군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각한 뒤에는 그곳에 있을 수가 없어 나주부근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어째서 그가 고향인 순창으로 오지 않고 나주로 갔는지는알 수 없다. 박유전은 그곳에서 정재근을 만났는데, 정재근은 가산을 정리한 다음 박유전을 모시고 보성으로 이사를 하여, 정재근은 회천면에, 박유전은 보성읍 강산리에 자리를 잡고 살다가 죽었다.박유전의 대표적인 제자는 이날치, 정창업, 정재근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창업은 박전의 소리와는 다른 계통의 명창이라고도 하므로, 박유전의 소리는 이날치와 정재근을 통해서 전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날치의 소리는 김채만과 박동실을 거쳐서 김소희, 한애순, 한승호, 장월중선, 김동준 등에게 이어졌다.정재근이 이어받은 박유전의 소리는 정응민에게 전해졌고, 이 소리는 다시 정권진,성창순, 성우향, 조상현 등이 이어받았다. 이들이 부르는 소리는 <춘향가>, <심청가>,<수궁가>, <적벽가>인데, 이 중에서 <춘향가>는 박유전의 소리가 아니라, 김세종의소리이다. 정응민은 김세종의 <춘향가>를 김찬업을 통해 이어받았다고 한다. 기이하게도 순창에서 출발한 박유전과 김세종의 소리가 정응민에 와서 합쳐지게 된 것이다.박유전의 소리는 서편제 소리이고, 김세종의 소리는 동편제 소리이다. 동편제 소리와서편제 소리의 융합으로 정응민의 소리는 독특한 소리가 되었다. 그래서 이 소리를 따로‘보성소리’라고 부른다. 결국 정응민에게 와서 이룩된 보성소리는 사실은 박유전과김세종으로부터 출발한 소리가 창조적으로 결합한‘순창소리’인 셈이다. 보성소리는현대에 와서 가장 인기 있는 소리가 되어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다.순창에서 출발된 소리가 순창을 떠나 전라남도에서 지금 가장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김세종의 소리는 장재백, 성민주, 허금파, 이동백, 김찬업, 이선유에게 이어졌다. 이중에서 장재백은 남원에서 호적과 무덤이 발견되었으나, 그 선대가 모두 순창에 묘소가 있는 순창 사람인 것을 보면, 순창 출신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장재백은 미남자로소문난 명창이었다. 장재백은 김세종의 소리를 가장 잘 이어받은 명창이다. 장재백의 소리는 전승이 끊어졌으나, 창본으로 <춘향가>가 남아 있어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고있다. 20세기 이후의 순창 출신 소리꾼 박유전과 김세종, 장재백 이후에 순창 출신 소리꾼으로 이름난 사람은 장판개, 장영찬, 성운선, 박복남이다. 일제 강점기 최고의 여창이었던 이화중선은 한 때 적성에서 살면서 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장판개(1885-1937)의 호는 학순(鶴舜)이며, 곡성군 옥과면 출생이다. 장판개는 후에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 225번지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장판개는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는데, 이를 알아본 장판개의 부친이 송만갑에게 소리를 배우게 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거문고와 피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장판개는 또 송만갑의 수종고수를 오래 하였으므로, 명고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장판개는 <적벽가>를 잘하였다고 하며, 그의 더늠은‘제비노정기’이다. ‘제비노정기’는 <흥보가> 중에서 제비가 흥보에게 줄 박씨를 물고 강남에서부터 날아오는 과정을 노래한 것인데, 바다로 오는 것이 아니고, 육로를 따라 중국을 북상한 뒤에 압록강을 건너 남원 운봉까지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노정기는 김창환이 만든 것과 장판개가 만든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요사이 소리꾼들은 흥보제비 노정기는 김창환이 만든 것으로 부르는 반면에, 장판개가 만든 노정기는 놀부제비 노정기로 부른다. 이화중선은 순창 출신은 아니다. 이화중선(1898-1943)의 본명은 이봉학(李鳳鶴)이며, 경남 동래에서 태어나 다섯 살때 전남 벌교로 이사하였으며, 열세 살 때 어머니가 죽자 남원으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열다섯 살에 남원 수지면 홈실(현 내호곡) 박씨 문중으로 출가했으나, 협률사 공연을 보고 가출하여 소리꾼이 되었다. 이화중선은 남원과 순창군 적성에서 소리를 배웠다고 하는데, 조사 결과 적성면 임동에서 장득주라는 사람의 첩으로 호적에 올라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이화중선이 소리를 배웠다는 바로 순창의 무당이다. 장득주는 큰 무당이었다고 하므로 판소리 창자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화중선과 같은 대명창을 길러낸 것을 보면, 대단한 음악적 기량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화중선은 육자배기목을 가졌다고 하는데, 무당이었던 장득주로부터 소리를 배운 영향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화중선은 천성의 고운 목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일제 강점기 최고의 여창으로 군림하였다. 장영찬(1930-1981)은 장판개의 둘째 아들이며, 본명은‘도익’이다. 아버지 장판개가 여덟살 때 별세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소리를 배우지는 못하였다. 장영찬은 열세살 때 조상선에게 단가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박록주에게 <흥보가>, 임방울에게 <적벽가>와 <수궁가>, 김여란에게 <춘향가>, 정응민에게 <심청가>를 배웠다. 장영찬은 판소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아깝게도 당뇨병으로 일찍 숨지는 바람에 그 재능을 다 펴보지 못하였다. 순창은 판소리의 소비지가 아니기 때문에, 소리꾼이 모여드는 곳이 아니다. 전통시대에는 그래도 좀 나았지만, 도시화가 촉진되자 모든 문화 활동이 도시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판소리 또한 농촌을 떠나게 되었다. 자연히 지역적 특색이나 전통 또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기 때문에 일제 이후의 판소리 창자들은 지역적 전통과 무관하게 자신의 소리 세계를 개척했던 것이다. 장영찬은 그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성운선(1928-1997)의 본명은 점옥(点玉)이며, 순창군 복흥면 하리 출생이다. 열다섯에 정읍에서 이기권에게 <심청가>, <춘향가>를 배웠고, 스물한 살 때에는 장판개에게 3년간 <흥보가>를 배웠으며, 서른다섯 살 때에는 김연수에게 <수궁가>와 <춘향가>를 배웠다고 한다. 성운선은 장판개에게 배웠다는 <흥보가>로 1984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던 사람이다. 박복남은 1927년 4월 15일 전북 순창군 동계면 이동리에서, 부 박춘봉과 모 김막동 사이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춘봉은 동편제 판소리의 대가로서 무형문화재였던 명창 박봉술의 아버지 박만조의 동생이다. 박복남은 일곱 살되던 해에 순창군 적성면으로 이사를 했다.박복남이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열두 살 되던 해였다. 박복남이 명창으로 대성하기를 바라던 아버지가 당시 송정리 벽진에 살고 있던 소리꾼 박삼룡을 집으로 모셔다가 동편제 <수궁가>를 배우게 한 것이다. 열네 살 때는 담양 출신의 주광덕으로부터 <흥보가>와 <심청가>를 배웠다.박복남이 주광덕으로부터 배웠다는 <심청가>는 한애순이 부르고 있는 <박동실 바디 심청가>와 거의 같다. 열다섯 살때는 전라남도 장흥에서 이동백을 만나 소리를 배우기도 했는데, 그는 이 때 단가 <강산경가(江山景歌)>와 <인생수기(人生手記)> 두 개를 배웠다고 한다. 박복남은 1996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 판소리 명창 경연대회에서 판소리 명창부 대상에 오름으로써 대통령상을 받았다. 박복남은 1997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유성준 바디 <수궁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2002년 별세하였다. 박복남의 딸 박미선은 최난수의 제자로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아들 박종호는 판소리, 북, 사물놀이에 모두 재능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순창 출신 소리꾼들을 알아보았다. 순창은 판소리의 양대 유파인 동편제 소리와 서편제 소리가 발생한 유서깊은 고장이다. 19세기 말까지는 순창의 소리가 그런대로 전승이 되었지만, 20세기 이후에는 순창에서 발생한 소리들이 순창에서는 잘 전승되지 못했다. 그러나 순창에서 발생했던 소리가 현대에 와서 가장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보성소리로 남아 있다는 것은, 순창에서 발생한 판소리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현대에 들어 순창의 판소리는 쇠퇴하면서 장판개 외에는 별다른 명창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순창은 장영찬, 성운선, 박복남 등 간단없이 소리꾼들을 배출하면서, 판소리 양대 유파의 발생지로서의 옛 영광을 희미하게나마 이어왔다. 이제 다시 판소리를 부흥시켜 옛 영광을 되찾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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