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 |
보는 영화, 읽는 영화 -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안경
관리자(2011-11-04 16:34:37)
‘느린 삶’에 젖어들기
한은경 전북대학교 강사
인터넷과 휴대폰, TV가 없는 세상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식사하는 시간까지도‘빨리빨리’를외치는 우리에게 이 문명의 이기들 없이 살아간다는 일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늘 가장 빠른 속도까지 갖춰야 우리는 안심하고 만족할 수 있다. 아무 것도 하지않고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그 여유로움을 속도가 주는 쾌감과 기꺼이 맞바꾸며 우리는 스스로를 속도전에 내맡기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통하여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환기시켜 온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2007년 작 <안경>에서 인간 본연의 행복이라는 문제를우리 삶의 속도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오기가미 나오코 표영화들이 늘 그렇듯이, 소박하고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미장센의 연출과 결코 수다스럽지 않은 스토리로 말이다. 코바야시 사토미, 모타이 마사코 등 그녀 영화의 단골 배우들의 맛깔 나는 연기 또한 빼놓을 수없는 매력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어느 작은 섬으로 여행을 온 타에코는‘하마다’라는 소박한 펜션에 묵게 되는데, 그녀가 하마다의 유일한 투숙객이다. 주인장인 유지와 코지라고 불리는 개, 그리고 해마다 봄이면 달랑 핸드백 하나 들고 와서 팥빙수를 만드는 사쿠라라는 나이가 지긋한 여성, 그리고 하루나라는 젊은 선생님이 하마다에 거주하거나 혹은 그 주변을 맴도는 인물들이다. 타에코에게 그들의 삶은 낯설기만 하다. 게다가그녀를 불편하게까지 한다. 이른 아침 타에코의 방에 들어와그녀의 잠을 깨우는 사쿠라. 아침마다 바닷가에서‘메르시’라는 체조를 함께 하고 식사도 함께 할 것을 권하는 유지. 이런 것들이 여행객 타에코에게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일상은 그저 체조 후에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팥빙수를 먹고, 바다를 바라보고, 만돌린을 연주하고, 장기를 두는 것이다.
결국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관광할 곳을 묻는 타에코에게하루나는“젖어들기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이곳에 왔느냐”고 묻는다. 타에코는‘젖어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그저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이 필요했을 뿐”이라 답한다. 결국 다음 날 타에코는 하마다를 떠나다른 숙소로 옮기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뛰쳐나온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길 한 가운데에서 헤매는 타에코앞에 나타난 것은 너무도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쿠라이다. 타에코는 현재 그녀에게는 짐일 뿐인자신의 여행 가방을 길에 버리고 사쿠라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하마다로 돌아온다. 이제 타에코는 하마다의 생활에‘젖어들기’시작한다. 그녀는 메르시 체조를 하고, 식사를 그들과 함께 즐기고, 먹지 않았던 사쿠라의 빙수를 먹는가 하면,빙수를 만들기 위해 팥을 졸이는 방법을 사쿠라에게 배우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밀란 쿤데라의 소설『느림』의 한 구절이떠올랐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는가?”라면서 작가는 속도전에 매몰되어 버린 현대인의 삶을 탄식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게으름뱅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과학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쿤데라도,오기가미 나오코도 물질문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원시적인 삶으로 돌아가자거나 속도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게으름뱅이가 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행복이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은 서두름에서 오지 않는다.결과를 염두에 둔 삶은 감미로움을 상실하게 되니까.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에서도 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그야말로‘젖어들기’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사쿠라가 빙수를 만들기 위해 팥을 삶는 장면이다. 그녀에게 팥을 졸이는 일은 의식과도 같은 행위이다. 사쿠라는 타에코에게“(팥을 삶는) 비법은 서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서두르지만 않으면 조만간 틀림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정성을 다하고 느긋하게 기다려 팥을 삶아낸다. 이렇게 삶은 팥으로 만든 빙수를사쿠라는 얼음 장사에게는 얼음을, 어린아이에게는 아이가손수 만든 종이 인형을, 하루나와 유지에게는 만돌린 연주를 빙수 값으로 대신 받는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는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다만 우연히 함께 하게된 지금, 여기에서 함께 고요한 한가로움에 젖어드는 데에서행복을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바다가 보이는 모래사장의 벤치에 앉아 함께 맥주를 마시고, 빙수를 먹는 장면들은관객들까지도 이 고요한 한가로움에 젖어들게 하는 미장센의 백미이다. 나에게 영화는 간단하게 세 범주, 즉 나를 웃게만드는 영화, 가슴에 머무는 영화, 마음의 저 아래 쪽에 묵직하게 자리하는 영화로 분류된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내 가슴 속에 자리한다. 느린 삶이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해준다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면서.... 영화의마지막 부분에서 타에코는 그녀의 안경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불어오는 바람과 섬의 풍광에 젖어들 뿐이다. 삶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의 안경이 그녀에게 생겼으니 예전의‘제 눈에만 맞았던 안경’은 이제 필요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