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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 |
꿈꾸는 노년 - 최일남의「힘」
관리자(2011-11-04 16:33:44)
스스로를 괴롭히는 노년의 자충수 장미영 전주대학교 교수 노쇠의 미학 늙음이란 무엇인가. 소설가 최일남은 직설적인 어조로‘완연한 노색’,‘ 진기 빠진 살’,‘ 탄력 잃은 종아리’,‘ 두 다리의 무력감’,‘ 물렁한허벅살’,‘ 눈가의잔주름’,‘ 여러겹으로접힌이맛살’등을 들며‘골고루 구나’싶게‘총체적으로 폭 삭은 신체’를들이민다.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꾸밈없이 노년의 단상을 기술한 최일남의 단편소설「힘」은 노인의 시각에서 남성 노인의 삶과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최일남이 담아낸 노년의 이야기들은, ‘노인들이 몰려 온다’고 표현할 정도로 급격하게 고령화 사회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에 무척 유의미한 작품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박완서가 주로 여성 노인의 삶을 그렸다면 최일남은 남성 노인 위주로 소설을 쓴다. 최일남 소설에 비추어진 노년이란 일관되게 남성 노인들의 시각에서 바라 본 노년에 대한 애증이다. 소설집『아주 느린 시간』속에 들어 있는 8편의‘노년 연작’중 하나인「힘」또한 다른 7편의 단편과 마찬가지로 잘 우려낸 사골국물처럼 담담하면서도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녹아있는 진한 맛이 일품이다.작가의 진솔한 문체는 남성 노인의 노쇠를 여성 노인과 다르게 남성의 상징인 성기와 연관 짓는다. 남성 노인이 스스로 노인임을 절감하는 때는 힘 빠진 성기를 발견했을 때라는 것이다. 김 선생은 늦은 아침 샤워기에서 쏘아대는 물줄기를 뒤집어쓰다말고 배꼽 아래 돌기를 쳐다본다. 돌기라기보다는 혹에 가깝다. 혹이라기보다는 찔끔찔끔 물을 게워내는 재개발 직전 아파트의 수도꼭지 같다. 겨우 오줌이나 받아내는 소도구로 머리를 숙인 것이 쿨렁쿨렁한 배 밑에서 제법 수줍은 척한다.(77쪽) ‘쿨렁쿨렁한 배 밑에서 제법 수줍은 척 머리를 숙인 ’노인의성기라는 표현은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Memory)’이라는 그림 속의 늘어진 시계를 떠올리게 한다. ‘머리 숙인 성기’는 녹아내릴 듯 축 늘어진 흐늘거리는 시계처럼 삶의 목표를 잃고 공허 속에 놓인 남성 노인들의 힘 빠진 일상을상징하는 듯하다. 이처럼 말랑말랑하게 부드러운 서정이 흐르는문체는 노인의 속내를 정면에서 들추는 난처함과 노쇠를 거부하는 듯한 신세타령조의 서운함을 절묘하게 잔잔한 해학으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노인을 통해 한 시대를 그려내는 최일남의 소설들은 노쇠해가는 인물들에게서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부담 없이곱씹을 수 있게 한다. 노년의 감수성 단편「힘」은 독보적일 정도로 노익장을 자랑하던 73세의‘이 소장’이라는 노인이 젊은이들과 함께 턱걸이 시합을 하다 거품을 물고 혼절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 와중에그가 그토록 건강을 챙기고 근육질 몸매 가꾸기에 공을 들이면서 강골을 과시했던 저간의 사정이 밝혀지게 된다. ‘이 소장’이 그토록 바치고 자랑하던 힘의 발원지는, 오래 전에 헤어져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아내 때문이었고, 십여 년 전에 당한 교통사고로 하체 기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 소장’은 그동안 내내 육신의 단련을 통해 정신적·신체적 상실을 상쇄하고자 노쇠에 대항하여 치열한 결투를 벌였던 것이다. 도무지 쇠잔할 줄 모르는 이 소장의 찰진 건강이 어떤 때는 버겁다. 민 감사도 하루는 이 소장에게 물었다.힘은 요긴하게 쓰자고 있는 것인데 그토록 정성들여 모은힘을 어디에 다 소화하오.그 역시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디다 쓰자고만 힘을 기르나. 그 자체로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남자의 힘은 필시 한 곳으로 쌓이게 마련인데 아주머님이병환 중이시라니 그것도 안 되겠고…….민 감사가 이 소장의 대답을 한옆으로 젖히고 거듭 음흉하게 엉뚱한 곳을 대자 이 소장의 안색이 잠시 일그러졌다.……그저 생각하는 것이라곤 맨날…….한참 만에 입을 달싹이다 말았다. 점잖치 못하다고 타박한폭이었으나 그보다먼저 표정이 굳어졌다.(96쪽) ‘찰진 건강’을 자랑하는 노익장에 대한 노인들의 반응과 감수성은 젊은이들의 그것과는 완연하게 다르다. 젊은이들에게‘남자의 힘’은 이미 삶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만, 노인에게는 까닭 모를 부담이 덩달아 생겨나는 당황스런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노년의 감수성일 것이다. 자충수와 싸우기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말처럼 우리의 일상, 특히 노인의 일상이란‘시간 죽이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노인들은 시간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데, 노인들의 일상처럼‘아주 느리게흘러가는 시간’은 권태를 낳는다.소설 속 노인들처럼 사람들은 보통 남들이 살아가는 방식에따라 살아가고 그럼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젊은이들에게는‘시간 죽이기’가 자신의 삶을 나쁜 상태로 전락시키는 위험한 태도겠지만, 노인들에게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존재가능성’을기획하고 그것에 따라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소설「힘」을 통해, 노인들에게 있어 실존이란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노인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는‘세상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역설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김 선생은 이 소장의 턱걸이 상한선을 잘 모른다. 출중하다는 소문이야 실컷 들었으나 신경 쓰지 않고 확인한 적이 없어좀 전의 청년을 웃돌지 미치지 못할지 가늠이 안 선다. 동요하는 기색 없이 굳게 입을 다물고 벌써 이십 회를 가볍게 넘긴 걸로 미루어 안심해도 되지 싶다. 아니야. 믿을 수 없는 게노인의 기력인걸. 저러다 기진하면 어쩌나……초조해진다.…(중략)… 한 점 차이로 청년을 눌렀으니 됐다고 아우성이다. 노오랗게 변한 이 소장의 낯빛이 안쓰러워 미리 만세를부르듯 두 팔을 번쩍 들기도 한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말라는중지 신호이자 안도의 집단적 표현이다. …(중략)… 하지만 영광은 찰나였다. 그의 승리는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 소장이가까스로 턱을 철봉에 괴었는가 하자 이내 스르르 미끄러져모래 바닥에 덜퍽 널브러졌기 때문이다.(97~98쪽) 작가는 이 대목을 통해, 노인에게 있어 본래적 삶은 다른 보통 노인처럼 사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작중에서유별나게 노익장을 과시했던‘이 소장’은,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충수를 둔 것이다. 자충수란 바둑에서 자충이 되는 수를말한다.‘ 자충’은자기가놓은바둑돌로자기의수를줄이는일을 가리킨다. 그래서‘자충수’란 스스로 행한 행동이 결국에가서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노인이 젊은이와 다른 점은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점이 노인과 젊은이가 갈리는 지점이다.젊은 작가가 그려내기에는 어려운 이야기들을 최일남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쉽게 풀어냈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나이든 사람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일흔 넘은 작가가 일흔 넘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흔이 넘도록 써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우리 사회의 큰 자산이 된다. 물론 독자에게도 큰 축복이다.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나이든 사람들을 이해하는 감수성의 폭을넓히는 한편 미리 자신의 늙음을 성찰하고 아름다운 노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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