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 |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김제 2
관리자(2011-11-04 16:21:22)
꼿꼿한 선비들의 기개가 글씨와 그림에 담겼더라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
김제 동쪽에는 노령산맥 끝자락인 모악산을 중심으로 구성산, 상두산 등 높은 산지가 있으며, 그 밖에 황산과 진봉산을 제외하고는 김제 전체가 50미터 미만의 야트막한 언덕과 강으로 되어있다. 모악산의 옛 지명은 노란 사금이 많이 생산되어 금산으로 불러졌으며, 바로 서쪽으로 금구, 김제로 불러져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김제는 고대부터 벽골제와 능제가 만들어져 일찍 벼농사가 시작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이 인심 좋고 물산이 풍부한 김제에서 근무하기를 원하였다. 김제는 만경강과 동진강을 끼고 광활한 평야가 만들어져 많은 부자가 생겼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예술이 크게 발달하였다.김제는 농사와 관련된 무형유산이 산재되어 있는데 그 중 김제의 우도농악은 감칠맛 있기로 유명하며 장구나 농기구를 만드는명인들도 있다. 또 해마다 풍년을 기약하는 입석마을 줄다리기와 벽골제에서 펼쳐지는 쌍용놀이 그리고 지평선축제는 모두 김제의 독특한 지리적 환경에서 발생한 것이다.
호남서단의 거목 송재 송일중
김제의 예술 중 서화는 조선중기부터 크게 명성을 떨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송재 송일중이다. 송일중은 김제 흥사동 두러기 마을 출신으로 인근 마을 대학자인 백석 유즙(사계 김장생 문인)에게 수학하였는데, 유즙은제자 송일중을 데리고 김제 흥복사에서 조속을 만났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후 송일중은 금석학이며 시서화 삼절인 창강 조속으로부터 해박한 지식과 금석자료인『금석청완』을 학습하였을 것이다.창강 조속(1595-1668)은 임피현령과 김제군수를 지내면서 전북의 많은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전북 서화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있다. 오세창이 지은『근역서화징』을 보면 인품 깨끗하기가 흰 옷과 같고 곧기는 활시위와 같다고 하면서 또 시서화에능한 왕유와 조맹부에 비교하였다. 창강은 지방 수령으로 있으면서 학문과 서화에정진하여 청백리로 통하였고 이러한 인연으로 현재 김제 백석서원에 유즙과 같이모셔져 있으며 김제 월촌에 이계맹신도비가 전한다.창강의 영향으로 송일중(1632-1717)은 경서와 제자백가를 학습하고 서체 중 오체를 모두 섭렵하여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다. 매천 황현은 호남의 국필을 논하면서송일중을 조선중기 호남의 서맥을 형성하는데 중심인물로 거론하고 있다. 매천시의일부를 옮겨 본다.“송재 송일중과 후에 창암 이삼만, 벽하 조주승이 끼어 정족을 이루며. 천년 조선의 서단을 논정하니, 우리 호남의 서단은 적막하지 않네”라고 힘주어 말하였다.송재는 관직이 사옹원봉사를 하여 이 지역에서는 송봉사로 많이 불러지고 있으며, 그의 웅건한 필의의 작품은 김제 흥복사 관음전편액, 전주의 삼산신도비, 여수흥국사 대웅전편액 등에서 감상할 수 있다.송일중의 글씨는 초서·예서·대자에 뛰어나 숙종과 청나라 강희제의 찬탄을 받았고, 그의 글씨는 목판본(蓬山九老會序)으로 판각되어 널리 서예교재로 사용되었다. 이후 전라도에서 서예교본 목판본은 전주 이삼만(1770-1847)으로 이어져 화동서법을 탄생하고, 익산 호산 서홍순(1804-1876)으로 이어져『호산심획』을 간행하였다.
전북 서단의 구심을 세운 석정 이정직
이후 김제에서 전북서예의 걸출한 인물이 탄생하니 바로 석정 이정직(1841-1911)이다. 석정은 안정봉 선생 밑에서 여러 학문을 두루 익혔고, 이후 장성하여 중국 시문학에 대한 고증과 평론, 중국 성리학에 대한 냉철한 논평, 그리고 서양철학의 칸트와 베이컨에 대한 연구를 하여『연석산방미정고』에 나타냈다. 석정은 시문학, 어문학, 경학, 영상학, 술학, 예학, 산학에 모두 뛰어났으나, 실제로 역점을 두었던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제 생활을 어떻게 윤택하게 하는가가 중요했으며,마당 한가운데 바위에는 하늘의 별자리를 기록하고 우물과 농기구를 손수 제작하여실생활에 편리함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석정의 학문과 서예술은 전북 서단을 형성하는 구심체가 되었는데 아마도 이러한 배경이 된 원인은 석정이 중국에 갔을 때 많은 진적과 이론서를 가지고 와서 제자들을 학습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왜나면 석정의 제자들은 대부분 석정이 교재로 가지고 온 동기창의 친필과 안진경의 진탁 등을 가지고 학습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동기창의 친필로는 중량통의<낙지론>이 대표적이며 안진경의 <마고선단기>도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석정은 붓글씨 쓰는 기법이 남달라 기필과 운필의흐름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느 한 획도소홀함이 없이 구도자의 자세를 잃지 않고 있음을 볼수 있다. 글씨는 오체를 섭렵하고 사군자와 화조도,산수화 등을 모두 잘했으며, 특히 괴석도는 일품이여서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전한다. 제자로 이름을날린 서예가는 벽하 조주승, 유재 송기면, 학상 정우성, 소강 송헌호, 이당 조병현, 석전 이연호, 이운 나갑순, 오당 강동희, 설송 최규상, 유하 유영완, 학헌조승헌, 정로식, 정한조, 곽탁 등이 있다.
강암과 벽천, 김제 서화의 현대적 승화
김제의 서예가들은 조선말과 일제시대 전주로 나아가 생활터전을 잡고 살면서 예향전주를 만드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전주지역에서 명성을 드높인 인물은 석정 이정직을 비롯하여 조수승과 그의 아들 조기석, 그리고 유재 송기면과 아들 송성용, 설송 최규상과 유하 유영완이 크게 활동하였다. 일제시대와 광복이후에 암울했던 내재적 욕구를분출하여 예술적으로 승화한 인물로는 크게 서예에 강암 송성용, 그림에는 벽천 나상목을 들 수 있다.강암 송성용(1914-1999)은 유재 송기면의 아들로 태어나유교적 전통 속에서 학문을 터득하고, 특히 40대 초반에 중국 법첩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창암과 추사 그리고 오세창과김돈희 등 이름을 날리는 서예가들의 필법을 얻었다. 그 때한국 서단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소전 소재형, 검여 유희강, 동정 박세림, 일중 김충현 등과도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의 좋은 필법을 받아들어 현대적 감각으로 새로운 작품을 시도하였다.강암은 시서화 삼절로 이름을 날려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으며, 특히 문인화의 근본인 선비정신을 담아 붓 끝에 표현한 강암의 특유한 묵죽은 일품이 아닐 수 없다. 또 금석과많은 편액이 전국적으로 널려 있어 후학들에게 지침서가 되고 있으며, 전주 한옥마을에는 그의 작품과 선인들의 작품을감상할 수 있는 강암서예관이 있다. 작품으로는 김제 금산사보제루와 운림산방, 다산초당의 일지암 편액들이 전국에 전하고 있다.벽천 나상목(1924-1999)은 나주 나씨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가풍을 잇고자 벽골제의 벽자와 할아버지 호인 월천의천자를 따서 벽천이라 하였다. 그는 어려서 일본의 미술잡지를 읽기 시작했고, 그림 그리는 도구와 작품감상을 통하여작가의 품을 키웠나갔다. 19살에는 숙부의 소개로 진봉섭을만나 청전 이상범과 이당 김은호로부터 작품에 대한 호평을받았고, 한국전쟁 시에는 전주로 피난 온 묵로 이용우를 만나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전문 수업을 받았다.벽천은 묵로의 다양한 그림을 모사하면서 여러 차례 개인전과 국전에 출품하여 추천작가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이리 원광대 미술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적인회화정신과 향토적인 기법을 가르쳤다. 벽천은 우리나라 미술사의 큰 나무로 실경산수화를 유행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그의 예술정신을 한곳에 모아 벽천미술관을 만들어 벽골제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