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 |
[서평] 「역사에 사랑을 묻다」- 서지영 지음
관리자(2011-10-10 14:21:21)
‘사랑’, 그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
이수라 전주대학교 객원교수
‘사랑’은, 문학은 물론이고 인간의 내면을 들추어내는모든 장르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주제이다. 그렇게 많은 작품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추구해 왔고, 지금도열심히구하고있지만,‘ 사랑이란무엇인가?’라는질문에대한 답변은, 아마도 답변자만큼이나 그 수가 많을 것이다. ‘사랑’이 단순히 개인의 내밀한 욕망이나 감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결합하기도하고 때로는 물질적 욕망이나 조건과 관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역사에 사랑을 묻다』(이숲, 2011)는‘한국의 역사에서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겪어 온 사랑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끊임없이 텍스트가 놓여 있던 당대의 문화적·제도적·사상적 측면을 모두 고려하면서 텍스트에서 그려내는 사랑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이 책은 일본을 통해 서구의 새로운 문물이 밀려들어 오던 1900년대를 기점으로하여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900년대는 곧‘전근대유교의 전통 속에서 오랜 기간 통용되었던 중매혼’이‘자유연애결혼으로 바뀐 지점’이기 때문이다. 조선 땅에서근대의 시작은 모든 면에서 전환기를 이끌었다. 근대의시작은 사랑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관점은 물론이고 사랑의 양태까지 바꾸어 놓은 매우 본질적인 사건이었다.이 책의 1부에서는 동양적 사랑의 모본(母本)인『시경(詩經)』에서 출발하여『금오신화』『, 구운몽』『, 운영전』, 『오유란전』,『 옥루몽』,『 방한림전』등의 소설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다. 또한, 시집, 비문 등의 여러 문장과 풍속화,의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고 있다. 저자는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였던 유교적인 이념과 사랑(혹은 열정, 혹은 에로스)가 맺는 관계를문화사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저자는 또한‘여성’연구자의 시선으로 텍스트의 표면에 드러나는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본다.그 결과 저자는 조선 시대의 작품들을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해낸다. 첫째, 조선 전·중기의 소설에서 사랑은‘육체적 열정을 주도하고 사랑의 물질성, 배타적, 주관성, 현세의 덧없음이 뒤얽혀 있는 인간의 사랑이 가지는보편 속성들’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둘째, 조선 후기의양반 혹은 중인 남성과 기녀의 사랑은 결국‘당시 풍류 문화를 형성하던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꽃핀 역사적 사랑의 한 형식’이다.다시 말해서, 사랑은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문화적 관계망 속에서 그 의미가 형성되고 그 양태가 정해지는 사회사적 측면의 결정체인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음험한 욕망이 결합하는 사회적 계약이라고 바라보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떠올려 볼 때, 저자의 이러한 해석은 씁쓸하지만 매우 타당한 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2부에서는 근대의 바람을 타고 조선 땅에 상륙했던 엘렌 케이, 구라야가와 하쿠손, 콜론타이 등의 연애, 결혼,사랑에 관한 담론이 어떻게 조선 사회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식민지 조선의여성 지식들과 남성 지식인들의 담론을 살펴보고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에게도 익히 잘 알려진 김명순, 나혜석, 김원주등의 1세대 여성 지식인들과, 이광수, 염상섭, 나도향 등의남성 지식인들의 다양한 텍스트가 분석되었다.식민지 조선에서 연애 담론은 남성 지식인들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었다. 이는 물론 식민지 조선에서 비롯한 현상은아니었다. 하지만 식민지의 담론들은 인쇄 매체를 통해 전조선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에 그것이 미친 영향은 전근대 사회의 것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식민지 조선을 처음으로 강타한 것은‘연애’의 등장이었다. 남녀 간의 사랑이‘부모가 주도하는 중매’의 틀 안에서이루어졌던 전근대 사회와는 다르게 이제‘결혼’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연애와 순결한 사랑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개인적인 영역이 되었다.‘연애’의 등장으로 전근대 시기에는‘혼인제도로부터 주변화되거나 침묵되었던 사적(私的) 열정의 한 형식’일 뿐이었던 사랑의 감정이 비로소 공적 영역으로 떠오르게 된다.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순결하고 신성한 연애’는 신성한 국가와 신성한 가족을 구성하는 순결하고 신성한 기반이어야했기 때문이다.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면서 가족은 민족의미래를 위한 재생산의 장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이모든 담론은 남성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여성들은결국 다시 연애의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 결과‘여학생들의 동성애’는‘친밀성에 기초한 근대적 연애’의 한 양식이되었고, ‘근대적 연애’는 동상이몽을 꾸는 남성과 여성이 부딪치는‘젠더의 격전지’가 되었으며, ‘정사’는 근대 초기에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 속으로 편입되지 못했던‘좌절된 연애가 선택한 한 가지 방식’이 되었다.이 책을 읽고 새삼스레 깨닫게 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믿고 있던‘사랑’이라는 감정이, 알고 보면 당대 사회의 구조나 이념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근대인들을 술렁이게 만들었던 자유연애라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감정이자 사건도, 기실‘가장(家長)이 자식들의 결혼에 절대적 권한을 발휘했던 전근대 가부장제의 부정’을 의미했으며, 이것은‘20세기 초 동아시아의 근대화 물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요소이기도 했다.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전근대와 근대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저자의 탐구 노력일 것이다.저자의 시선을 따라 이 책을 가로질러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단순한 구도가 추출된다. 그것은 바로‘남성/명문재상의딸 - 기생 - 신여성·여학생·여성 지식인 - 몰락한 기생 -카페 여급’이라는 이분법적 대립항이다.이는 전근대는 물론이고 근대의 거의 모든 텍스트가‘남성지식인’의 생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역사와 장르를가로지르면서 끊임없이 여성을‘사랑’의‘대상’으로 삼아 왔다. 따라서 그 대상이 명문재상가의 딸이었든, 기생이었든,신여성이었든, 카페 여급이었든 간에 그들은 늘 남성적 욕망을 충족해 주는 존재이거나 그 욕망을 거스르는 존재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또 하나, 저자의 놀라운 점은 남성 지식인들이 만들어 낸이야기 속에서, 일렁이는 여성 인물들의 강렬한 욕망을 읽어냈다는 것이다. 저자는‘여성’연구자의 시선을 견지한 덕분에 그동안의 연구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점들을 읽어낸다. 예컨대,『 방한림전(方翰林傳)』과같은작품을여성영웅소설에국한해 평가하거나 당대의 평가대로 여성의 동성애를 그린‘기이하고 괴이한 이야기’로 치부하지 않고, ‘이성애 혼인을거부하는 여성들의 전복적인 시선’을 담고 있는 이야기로 읽어 내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작업이다.책을 다 읽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랑’과‘열정’과‘욕망’과‘욕정’은 과연 어떻게 나뉠 수 있는 것인가.또, 나누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나누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만일, 근원적인 사랑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차치하고,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감정이나 관계는 사실상 사회문화적인 맥락 안에서 규정된 어떤 것이다. 사랑도 역시 문화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조금은 씁쓸해지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사랑의 보다 본질적인측면을 드러내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