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 |
내 인생의 멘토 - 스승 하혜석
관리자(2011-10-10 14:17:20)
“춤은 기교가 아니라 감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강명선 현대무용가
나의 춤 입문은 참 많은 사연을 안고 시작되었다. 내 젊은 날 희망은 하늘을 높이 치솟아오를 것 같았지만 세상의 현실은 너무도 암담했고 마치 작은 새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 같은 슬픔의 모습들이 많은 것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한 스승을 만났고 그분은 생명의 열쇠를 지닌 것처럼 내 인생을 지금까지 펼쳐올 수 있도록 깊은 정신세계를 만들어주신 분이다. 그분의 단아함은 가시처럼 항상곤두서있었던 나를 조용히 감싸안아주었다. 스승님은 나 자신도 모르게 그분을 따르게 하는 조용한 카리스마를 지닌 참아름답고도 고귀한 분이셨다. 까맣고 긴 생머리, 아담한 체구에 언제나 검정색 롱코트를 즐겨 입었고 작업을 할 때는볼펜 하나로 머리를 여민 모습. 단 한 번도 큰소리를 내지 않고 항상“좋아! 잘할 수 있어. 그래 그거야! 자~다시 한 번해볼까?”라고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곤 하셨다. 유난히개성과 고집이 강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은 내면의 우울함과 쓸쓸함 때문에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강해서 그분외에 다른 사람들은 고집 세던 나의 모습을 변화시켜주지 못했었다. 그분이 내 가슴에 먹물처럼 서서히 스며들었던 건그분의 다정한 말씀 속에서 가슴으로 안아 줄 수 있는 힘이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분은 내 인생의 빛이 되었고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지금의 교육 현장과는 다르게 무섭게 소리 지르고 감정적인 체벌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교육법과는정반대였던 선생님의 지도법은 내 가슴을 움직였다.강제가 아닌 본인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게 하는 선생님의지도법과 현대무용을 할 때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좋은 결과만큼이나 안무과정의 중요성을 작업과정을 통해직접 가르쳐주신 분이다. 안무를 하는 과정 속에 즉흥적으로움직이면서 동작을 이끌어내는 선생님의 모습은 바다 위를잔잔하고 아름답게 날고 있으면서도 때론 바다 깊숙이 솟구쳐 오르는 소용돌이처럼 강렬한 내재적 힘을 연상케 했다.그때 그분이 창작했던 모든 작품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선정되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지도자가 되어있는 나 역시 선생님이 소 가르쳐주셨던 춤의 정신을 이어받은 작품들을 창작하고있고 감사하게도 몇 몇 작품은 우리나라를 대표로 하는 좋은작품으로 인정받은 시절도 있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매우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분의 모습에 닮아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하면서 행복해한다는 사실이다. 말하는 모습, 지도법, 안무가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지혜로운 방법 등등. 언제나 감사할 뿐이다. 그분으로 인해 무용인생에서 최고의 행복도 느껴보았고 춤에 있어서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깨닫게 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더불어 항상그리운 느낌으로 살고 있다.어쩌면 요즘 무용계에서 파생되고 있는 문제점들, 예를 들어 춤의 정신을 무시한 채 알맹이가 없거나 혹은 너무 가볍거나 기능적인 면만 교육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무용교육자 안무가로 20년을 활동해오면서무용계 현실을 꼼꼼하게 체크하면서 뿌리가 있는 춤의 정신을 외치고 있지만 쉽지 않은 현실이다. 누군가의 손길을 타고 성장해온 무용인들이 많기에, 춤의 정신은 무용을 입문하는 순간부터 지도자로 인해 이미 스펀지처럼 본인도 모르게흡수가 되면서 본인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걸 알기에 그분이더욱 그립고 고마운 것이다. 예술가는 획일화된 미의 법칙이나‘눈의 판단’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마음의 판단’에 따른다. 즉 예술가는 미리 존재하는 기존의 법칙을 지키는 것이아니라 자기 스스로 법칙을 부여한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보편적인 미의 법칙이 아니라‘마음과 영혼의 눈의 판단’을 느끼게 해준 것이다. 내면의 세계가 너무 강했던 나만의 자유로움만큼이나 엉뚱하고 풍부한 상상력을 다양한 도전과 실험을 즐길 수 있는 창의적인 안무가로 성장시켜주는 동기를 넘치게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분의 예술세계는 무엇보다 따뜻한 인간미와 감성적인 코드, 그리고 아날로그적인 감각이다.나의 스승은 훌륭한 예술가이면서 한편으로는 도인(道人)같으신 분이었다. 그분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바람과도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아름다움 속에서 슬픔이 느껴지고 단조로운 듯 보이면서도변화무쌍하고, 온화하고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흐름속에 청초한 혼이 담겨있는 듯 세월이 가진 여러 가지 색의조화를 느끼게 하는 깊이가 내재되어 있다. 그분의 춤사위는격식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엄격한 절제 속에서도 파격적으로 빗나감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움과 넉넉한 아름다움이느껴진다. 너그러우면서도 넘치지 않고 긴장감을 잃지 않고있다. 그분의 작품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적인 느낌,온화함이 함께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분의 작품이 특별하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은 화려한 테크닉으로 우리의 시각을 현혹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내재된깊이는 바다를 연상케 한다.그분은 오래된 것들을 좋아했다. 세월의 시간과 공간이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들을 좋아했던 것이다. 사람의 손때가묻어있는, 사람의 온기가 스며들어 있는 것들이다. 그분의작품에서 느껴지는 기품과 그윽함은 바로 깊은 사색으로부터연유된 것이고 이것은 여러 번의 인생의 행로를 통해 획득된결과물일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춤사위는 사색과 흔적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정신이내재되어있었다. 왜냐하면 가벼운 기교보다는 감동을 표현하려는 그분의 의도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내재된 정신성이 강하고 특별했기 때문이다. 춤을 추는공간은 실제로 무엇인가를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채워진 것들을 다시 파괴하고 다시 지우고 비워 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구상 속에서 욕심을 버리고 비우는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안무가에게 특별한 철학과 내재된깊이가 있지 않으면 너무나 어려운 작업임을 알기 때문이다.가슴 속에 헛된 욕심이 가득하면 비울 수가 없어서 결국에는터져버리고 마는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도 나는 그분이 주신 창작의 뿌리의 근간을 지켜가면서 열악해져만 가고 있는 창작조건과 방향성을 잃어가고있는 지금의 무용계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 끊임없이 외쳐가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