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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 |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 되돌아보는 로테르담 영화제
관리자(2011-10-10 14:16:39)
독립영화의 메카, 한국영화를 주목하다 로테르담영화제에 대해선 일반적으로 평이 좋은 편이어서 오래 전부터 관심이 많았지만 갈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1997년에 부산영화제를 통해 드디어 길이 트였다. 1997년 정초 어느 날, 전양준 프로그래머로부터 뜻밖에“김동호 집행위원장님이 로테르담영화제에 심사위원장으로 초대돼 가시는데 같이 가서 보조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던 것이다.그가 말하는 보조자의 역할이 뭔지 좀 아리송했지만 모처럼의기회인데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그냥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1월 29일 아침 일찍이 여행길에 올랐다. 바젤에서 비행기로 암스텔담의 쉬폴 공항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로테르담까지는 기차 여행을 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로테르담 역에내린 나는 택시를 타고 눈비에 젖어 우중충해 보이는 시내를지나 호텔에 닿았다. 영화제를 치르려면 날씨도 아주 중요한데 유럽에서 한 해 중 가장 처음으로 열리는 로테르담영화제는 한겨울이라서 몹시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다행히 호텔이영화제서 멀지 않는 곳에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됐다.1997년 제26회를 맞은 로테르담영화제(1월 29~2월 9일)의 개막식은 새로 지어진 파테 복합상영관의 대상영장에서 오후 8시에 열렸다. 나는 호텔에서 만난 김동호 위원장님과 함께 영화제서 보낸 차를 타고 개막식장으로 갔다. 개막식의 식순은 검소한 네덜란드 국민성에 어울리게 간소하게 치러졌다.그럼에도 실내는 2700명의 관객이 모여 충분히 축제 분위기를 띄웠다. 영화제의 역사를 보면“1회 때는 겨우 일곱 명이영화를 보러 왔었다. 그러나 2회부터 관객 수가 꾸준히 늘어나 1996년에는 8만 명이 들었고, 상영 영화마다 표가 완전히 매진되는 바람에 1997년에는 영화제 규모를 30% 새로더 늘였다”고 설명되어 있었는데, 개막식 무대는 지난 26년간의 발전을 한 눈에 볼 수 있게끔 정말 무엇 하나 걸리는 것없이 매끄럽고 빈틈없이 진행됐다.개막식 영화는 당시 화제작으로 떠오르던 <바스키아>였다. 뉴욕 부르클린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시적이고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그래피티”의 천재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의 짧고 변화무상했던 삶을 그린 영화다. 역시 부르클린 출신으로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 운동의 이름난 예술가이며 영화감독인 줄리안 쉬나벨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명작이다. 그런데 개막식 영화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파테 상영장의 깨끗한 대형화면과 잡음 없는 완벽한 음향장치였다. 사실 국제영화제로서는 당연한데도 1회 부산영화제 때 겪었던 일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비교가 됐고 부럽기까지 했다. 부산영화제의 공식 상영장으로 지정된 남포동의 한 두 영화관 안에서는 쥐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녔는가 하면 실내가 너무 시끄러워서 신경이 곤두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만도 한국의 영화관 대부분은그렇게 허술하고 시끄러웠다. 물론 이 글은 15년 전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니까 대자본과 첨단 기술로 다듬어진 오늘의영화관 현실과 맞지 않지만 그래도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덧붙인 것이다.말이 옆으로 흘렀는데, 로테르담영화제는 처음 20여 년동안 비경쟁 제도를 지켜오다가 1995년 경쟁제로 바꿨다.1997년의 행사는 일 년 전에 집행위원장으로 선택된 영국출신 사이몬 필드가 맡아 진행했다. 그는 과거 런던의 현대예술원(ICA)에서 7년간 영화책임자로 있으면서 아시아 영화를많이 소개했으며 1994년에 처음으로 한국영화 회고전을 열었다. 1996년 부산영화제가 필드 집행위원장에게“한국영화공로상”을 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며, 필드 집행위원장은 공로상에 대한 답례로 김동호 집행위원장을 로테르담영화제의 심사위원장으로 초대하고 그와 함께 한국영화11편이 영화제 동안 여러 부문에 걸쳐 시사됐다. 로테르담영화제에 한국영화가 공식 초청된 건 그게 처음이었다.그런 한편 영화제 기간에 로테르담의 항만시설을 방문하던 부산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인 문정수 부산시장이 영화제에들려 한국의 영화인들과 만났다. 그리고 마침 로테르담을배경으로 촬영 중이던 성룡(재키 찬) 배우가 한국영화의 파티장에 제작자와 함께 나타나 한국영화인들과 한국말로 인사를 나누며 아기자기한 시간을 가졌다. 보통 스타를 부르지않는 로테르담영화제에 국제적 인기배우 성룡이 참가했던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로테르담영화제는 과거 오랫동안 후원을 해오던 홍콩의 골든하베스 영화사에 대한 감사의표시로 1997년에 특별 회고전을 마련하여 18편의 홍콩영화를 사사하고 특별전에 맞춰 배우 성룡을 부른 것이다. 독립영화의 메카 로테르담국제영화제는 네덜란드의 서남부에 자리한 로테르담은 21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바쁜 무역항이었다. 2004년 중국의 상해가그 자리를 차지하면서는 한 발 물러났지만 유럽대륙에서는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가장 큰 항구도시로 알려져 있다.한때 고풍스러웠던 도시의 중심지는 그러나 1940년에 히틀러 군대의 폭격으로 전부 파괴 되어 중세기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60년대 이후에 들어선 현대식 건물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러다 90년대에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건축가들의 대작들이 많이 들어서면서 새롭게 건축예술의도시로 떠올랐다.한편 네덜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이 도시는 외국인이 가장많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약 60만명 정도의 거주민 가운데 46%가 이민가족과 연결돼 있다.도시의 곳곳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다문화적인 분위기는 그런 다민족의 공존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듯 하며 그래서인지팝과 힙합 그리고 실험음악 등 다양한 新문화의 음악이 꽃을피워왔고, 그 밖에도 해마다 영화, 재즈, 시, 춤 등 국제 차원의 축제가 잇따라 열리고 있어 로테르담은 네덜란드의 문화의 수도로 불릴 만큼 문화행사가 끊이질 않는 곳이다.이곳에 영화제가 생긴 것은 이는 1972년이며 휘베르트 발즈(1937-1988)가 개시했다. 발즈는 지난 세기 60년대에 영화의 도시 위트레흐트(Utrecht)에 정착해 있는 카메라 스튜디오에서 홀랜드 필름(Holland Film, 네덜란드 영화진흥처)을 위해 일을 하면서 그곳에서 상영되는 영화에 대한 전문인들의 강의와 토론 또는 특별 이벤트를 조직하여 국내 최초의영화 토론장을 마련함으로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네덜란드뿐 아니라 해외의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던터라 1966년에 카메라 스튜디오의 설립기념의 특별행사로‘시네마니훼스티에(Cinemanifestie)’를 꾀하여 국내에서볼 수 없는 해외의 명작 21편을 초청했으며, 그의 희귀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감독들이 전국에서 위트레흐트로 모여들었을 정도로 발즈의 프로젝트는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972년에 그는 로테르담예술재단(Art FoundationRotterdam)으로부터“시 축제에 맞먹는 새로운 영화예술제를 만들어달라”는 위탁을 받고는‘국제 영화제’를 만들었다.1회 때의‘국제 영화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로테르담국제영화제로 이름이 바뀌었고 발즈는 1988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집행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영화제의 기반을 닦았다.로테르담영화제의 특징은 설립 때부터 오로지 저예산의독립영화 발굴과 증진에 힘을 쏟았던 점인데, 그 때문에 미국의 독립영화를 지원하는 선댄스 영화제와 자주 비교되곤했다. 하지만 1978년에 설립된 선댄스 영화제가 90년대를맞으면서“할리우드 제작자들에게 잠식되어 애초의 목적에서 멀어져 간다”는 여론의 비평을 받았던 데 비해 로테르담영화제는 독립영화의 메카로 커나갔다.이 영화제의 또 하나 특징은 시네마트와 휘베르트발즈 후원기금으로 불리는두 개의 후원제도이다. 시네마트는 경제적으로 약한나라의 독립영화에 도움을주기 위해 198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저예산의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어려운 제작비조달을 뒤에서 밀어주는사전제작지원제도이며 후원의 대상은 작은 규모나 중간 규모의 제작품이다.흔히 공동제작 마켓(Coproduction Market)으로 불리는 시네마트는오늘날 많은 국제영화제들이 주도하는 여러 후원제도 가운데 맨 먼저 도입됐으며 해마다 선정된 감독과 제작자들을 영화제 동안에 초청하여 그들의 프로제트를 공동제작자나 후원 단체들 또는 배급사나 텔레비전 등과 연결시켜준다. 여기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말하겠다.시네마트에 비해 5년 늦게 세워진 휘베르트 발즈 후원기금은 발즈 집행위원장이 오래 꿈꾸어왔던 구상이 1988년에실현된 기구이며 저개발 지역의 감독들에게 영화제작과 배급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후원제도다. 한마디로 시네마트가 사전제작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제작과 배급을 돕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발즈의 사망 이후 1990년 2대집행위원장인 된 마르코 뮐러(베니스영화제 현 집행위원장)의 시대가 열리면서 원래의 후원제도는“360도의 개혁”을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연간 50만 달러에 달하는후원기금은 아시아, 중동, 동유럽, 아프리카, 남미 지역의 감독에게 주워지며, 1988년부터 1997년까지 150개의 프로젝트가 훼베르트 발즈의 후원기금으로 만들어졌다(영화제의기록에서). 로테르담영화제의 한국영화들 1997년의 프로그램은 모두 110편의 장편과 70편의 단편이 네 개의 부문을 거쳐 7개의 영화관에서 선보였다. 그 중에는 제1회 부산영화제에서 시사회를 열었던 아시아 지역의영화들도 더러 있었고, 한국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축제>,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들어있었다. 그리고“화제의 감독”부문에 초청됐던 장선우 감독에게는1986년의 첫 작품 <서울 황제>에서 1996년의 <꽃잎>까지감독의 전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자리가 특별이 마련되어한국영화에 별로 익숙지 않던 현지의 매스컴으로부터“획기적인 자리였다”는 좋은 평가를 얻었다.로테르담영화제의 경쟁부문은 감독의 첫 번째와 두 번째작품을 뽑았다. 1997년의 경쟁영화는 12편이었으며, 그 가운데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홍상수 감독의 첫 작품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뽑혔다. 그리고 심사위원은 프랑스의 샹탈 아커만 감독, 튀니지아의 감독 무피다 틀라틀리,뉴욕 안솔로지 필름아카이브의 큐레이터이며 평론가인 파비아노 카노사(브라질 출신) 그리고 네덜란드의 여배우 아드리안느 슬루터 4명이었으며 심사위원장 자리는 앞에서 말했듯이 김동호 집행위원장이 맡았었다. 그리고 보조자로 내가 해야 할 일은 경쟁 영화 12편을 김 위원장님과 같이 보고, 매번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심사위원들의 모임에참가하여 김 위원장님을 통역하는 일이었다. 솔직히 심사위원이 아니면서 참석하기엔 좀 불편스러운 자리었으나 다행히 틀라틀리 감독과 카노사 큐레이터는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1997년의 수상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카자흐스탄 감독 아미르카라쿨로프의 <마지막 휴일>, 영국 감독 패트릭 켈러의 <로빈손 인 스페이스>의 세편이었다. 이곳의 수상 제도는 여느 영화제와 달리 한 작품에 대상을 주지 않고 최우수 영화 세 작품에 다같이‘호랑이상’(네덜란드방송국VPRO상)을 주고 상금 역시 감독 각자에게 똑같이 1만 달러씩 주어졌다. 홍 감독의 수상 작품은 아쉽게도 1996년 영화진흥공사가 뽑은 우수영화에서 탈락됐었지만 카노사 심사위원은“미켈안젤로 안토니오를 연상케한다”며 홍 감독의 스타일을 높이 평가했다. 홍상수 감독 이후 호랑이 상을 받은 감독은 서너 명 더 되는데 2011년은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가 대상을 받았다.이제 앞에서 말한 시네마트 쪽으로 말을 돌리자면, 1997년 시네마트가 받아들인 시나리오는 수백 개에 달했다. 그가운데서 42건이 선정됐고 한국에서는 최초로 이광모 감독(백두대간 대표)의 시나리오 <아름다운 시절>과 변영주 감독의 시나리오 <도쿄 엘레지>가 뽑혔다. 변영주 감독은 영화제 기간 시네마트가 준비한 만남의 장소‘협상 테이불’에서 24명의 제작자와 배급자를 만났고, 변영주 감독의 통역을 맡으면서 나도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네마트 책임자의 말에 따르면 협상 테이블을 통해 성공하는 프로젝트는 40%정도였다.한편 김동호 위원장은 로테르담영화제에 머무는 동안 시네마트의 사전제작지원 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는 그걸 부산영화제에 접목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즉 1998년 3회 때에태어난‘부산사전제작프로젝트(PPP)’는 김 위원장이 시네마트의 시스템을 한국에 적용시킨 결과물이며 이미 알려지다시피 이 제도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지역을 대표하는 국제적 후원기구로서 크게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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