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 |
신귀백 영화엿보기 - 내 글에서 배운다
관리자(2011-10-10 14:16:18)
내 글에서 배운다
-자선(自選)영화평-
폭폭한 시간들(2000년 7월 - 2011년 10월)
영화에 꽃길을 놓아주던 복된 시간들이었다. 초기에는 걸작 영화보다는 시의성 있는 영화들이 다루어졌다. 하지만 내게로 오는 영화들에 대해서 썼지, 억지로 권해서 쓴 글은 없다. 물론 저널이 추구하는 지점으로 출발했지만 문예지에 버금가는 평이 되도록 나름 외연을 넓혔다. 사실 시의성 속 메시지 전달이라는 욕심에 밑천이 달린 적이 많았으니 어찌 자유로웠겠는가? 억압의 시간들이었다. 영화 한 편을 보고 컨셉을 잡은 후에 생각을 가다듬는 데는 보통 며칠의 시간이 걸린다.‘혼잣말’하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라캉을 비롯한 서양 학자들의 이론보다는 내가 공부하고 경험하고 고민한 것들이 이륙의 연료가 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영화평이라기보다는 가시 달린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이 많았다. 아카데믹과 저널리즘의 줄타기 속 독자의 감정이입을 끌어내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항상 원고가 늦었다. 기자의 독촉 전화를 모른체하며‘마지막 글’을 쓰는‘지금’의 심정 역시 폭폭하긴 마찬가지다.
첫 글
읽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영화감독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듯 평론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 기본적으로 감상한 영화를 스토리텔링하기, 눈에 보이지 않는 골격 드러내기, 이들의 유기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규칙을 깨뜨리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새롭고 자신만의질감과 테크닉을 가지는 글말이다. 첫 글은 홍상수의 <오 수정!>이었다. 홍상수의 전작 영화에 겁을 먹고 사소한 디바이스마저도 긴장 속에서 의미로 해석하며(특히 고장 난 자동문 장면 같은) 감독의 숨겨진 코드를 찾으려다가, 오히려 관객이 들킨것은 자신의 기억 속에 숨겨져 있던 연애의 통속성이다. 개인적으로 같은 공간의 기억도 제각각 이라는 점에서, 나와같이 스푼이나 포크를 떨어뜨렸던 여인은 과연 어떤 것들을 기억할까? 어디에서? 정말로 궁금하다. 홍상수는 반복과 변주를 통해 입담을 과시하는 거장이 되었지만 그 때의 이은주는 이제 가고 없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나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나이의 신인 이은주는 상큼했다. 대사보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진심을 표현하는 배우가이은주였는데. 우윳빛 피부, 반듯한 이마, 목선을 드러내면더 예쁜, 손 하나를 올리면 바스트샷이 고요한 떨림을 자아내는 이은주! 그대는 어디 있는가?
연애의 약발
<행복 2007>에 이어 <호우시절 2009>을 보면서 허진호 연애의 약발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팔월의 크리스마스 1998>에서 햇볕 드는 마루에서 한석규가 아빠에게 비디오 조작하는 법을 가르쳐 주던 장면,초원 사진관 유리창에 돌을 던지던 심은하를 잊을 수 없다.<봄날은 간다 2001>를 보고 나와서는 차 안에서 오래 전 애인에게 노래를 불러주었고 그것을 글로 썼다. 사련의 불안감을 잡기 위해 흔들리던 카메라를 사용하던 <외출 2005>에는 아래와 같이 썼고 인터넷을 통해 제법 퍼져나갔었다.<외출>을 본 후, 누군가의 귀밑머리를 붙들던 순간이 기억난다면 당신이라는 나무는 사월에 내린 눈을 경험한 사람이다. 꽃눈을 덮는 폭설이라 해도 다시 지나간 계절을 부르진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먼 길을 돌아온 사람인 것. 그 눈맞은 가지마다 피어날 이파리와 꽃들을 사랑이라 이름 짓든아니면 말 못할 그 무엇이든, 잊을 수 없는 화인(火印)을 갖고 사는 사람일 터.<시>와 <무쉐뜨>영화를 압도하는 글을 목표로 삼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미지로 승부하는 것을 문자로 하는 게임이니 쉽게 이길 수없다. 작품이건 작가건 일단 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먼저한다. 그가 어떤 거장이든.브레히트 시에서 소녀의 익사 원인이 드러나지 않는 데 반해 프랑스의 영화감독 브레송이 만든 <무쉐뜨 1967>에서는소녀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우리가 짐작할수 있는 어린 소녀에게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은 후,나막신 신은 길갓집 소녀는 언덕에서 몸을 굴려 스스로 물에몸을 던진다. 첨버덩 하는 물소리에 몸을 맡긴 <무쉐뜨>의마지막 사운드는 남한 감독이 만든 영화 <시>에서 오프닝의여울물 소리로 이어진다. 한국의 어느 중소도시를 흐르는 강물에 머리를 처박은 시체로 교복 입은 어린 소녀가 둥둥 떠있는 것. 이창동의 <시>는 무쉐뜨의 죽음 그 다음 이야기인것이다.다른 사람이 못 본 부분을 찾아 동의를 구하는 일은 나름재미있었다. 심미안과 풍부한 해석을 두고 멋진 문장 사이의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나만이 잘 할 수 있는 지점이 무엇일까 했을 때, ‘시’가 찾아왔다. 문학과 영화를 한 자리에 놓고시를 읽듯 영화를 읽는 틈새를 찾아내었다. 이러한 필터링의특허등록은 하지 않았지만 후학들이 따라오리라 믿는다. 백석을 불러왔고 진은영을 찾았지만, 마루야마 겐지의『소설가의 각오』만 못한 영화평들이 많았다.
국지성 호우
영상으로 이야기를 타당성 있게 연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신 원숏이 어려운 것처럼 문어체가 구어체가 되도록 하는 일필휘지는 특히 어렵다. 하지만 몇 영화는 국지성 호우처럼 쉽게 나갔다.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Eros) 中왕가위 감독의 <그녀의 손길>과나루세 미키오의 <부운(浮雲)>이 그랬다. 글과 영화 사이에균형을 잡는 것을 무시하고 균형의 추를 내 마음에 맞추었다. 뻔뻔스럽게 그냥 그대로 옮긴다.나에겐 좋은 옷이 동기입니다. 그래서 고급 옷감의 재질을만지면 나는 당신의 몸을 생각합니다. 나, 당신의 원피스에어울릴 핸드백도 만들어 봅니다. 당신이 내가 만든 옷을 걸칠 때, 어떤 은유를 또 간절한 억양을 발견하리라 믿어 봅니다. 또 내가 만든 옷을 걸친 당신이 가질 평화와 따뜻함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렙니다. 그러나 인연의 실꾸리는 이렇게도모진가요?돌아와 나의 손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끝내 어긋난 당신과 나의 손길을 생각합니다. 내 손에 기술만 찾아왔지 내 가슴에는 현명도 용기도 끝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분별을 지향하는 당신의 손도 에로스를 탐하던 내 손도 어쩔 수 없습니다. 타오르지도 못하고 꺼지지도 않는 내 사랑 그리고 당신의 회한 깃든 거부의 손길 생각에, 나 눈물이 납니다. 어찌합니까.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가면 내겐 두고 간 옷 그리고당신의 손길만 남겠지요. 당신! 이제 난 누굴 위해 옷을 지어야 합니까?<부운>은 통속 드라마다. 멜로방식이란 것은 앞일에 대한뻔한 예상이 가능하지만 나루세 미키오의 이‘명품 멜로’는관객의 소망적 사고에 영합하지 않는다. 덤덤히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가듯, <부운>은 편하다. 그러나 동무의 사랑이야기를따라나서는박재삼의시처럼,‘ 산등성이이르러서는어느새 눈물이 나’기도 한다. 여성들이 지켜보는 <부운>과 남성이 바라보는 <부운>이 다를 것이다.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선수들, 선수를 꿈꾸는 사람은 따라가 볼만한 사랑이야기로 박재삼의 시와 같은‘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겠지만, 살면서 곁눈질 한 번 안 한 사람은 그저 통속으로 보일것이니 시간낭비하지 마시라.
즐거운 영화들
여자 셋이 빚는 소울 푸드 <카모메 식당> 또 사막의 <바그다드 카페>는 식당 문을 열고 싶은 영화였다. 우리 애들이어른이 되어도 카우보이 인형이 등장하는 <토이스토리> 시리즈는 고전으로 남으리라 예측해 본다. <다크 나이트>도마찬가지. <아이언 맨>, <섹스 앤 더 시티>,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영화도 재미있게 썼다. 그 중 브래드 피트의 <파이트클럽>은 주제의식도 괜찮고 스릴러물답게 후반부 반전은 머리를 망치로 친다. 닮고 싶었다.“헬스하는 놈들은 결국 켈빈 클라인의 노예들이다.”“예쁜척 하는 팬더 궁둥이에 총알을 박고 싶다. 프랑스 해변에 유조선을 침몰시키고 싶다”며 그가 뱉는 내래이션의 아포리즘은 우리 사회의 내면화된 규칙에 복종하지 못하는 자의 외로움을 깊이 있게 표현한다.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던 잭은 파이트 클럽의 맞고 때리는 과정에서 조금씩 자존을 회복한다. 헤밍웨이와 한 판 붙고 싶다는 잭은 쓸데없는 것들은 무시할 줄도 알게 된다.“싸운 뒤에는 모든 게 하찮게 느껴진다. 인간은 누구나 망가진다. 텔레비전을 못 본들 어떻고, 냉장고가 뜨뜻한들 어떠랴?”대책 없이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만국의 외로운 놈들아 단결하라는 감독의 메시지는, 음, 의미있는 낭만이다. 굴욕을 통과하면 더 성숙되었다고 믿는 우리들에게 한번 개겨 볼 것을 권하는 영화일 것이다.
전주를 부탁해
전주에는‘전주’라는 고정된 어떤 이미지가 있다. 전주가 좋아서 전주에서 찍은 영화라기보다는‘추억의 파노라마’라며 영화를‘팔려는’서울 감독들이 바라보는 지점 말이다. 그곳에 사시는 분들에게는 불편한 일이었겠지만, 노송동과 전주천에는 따뜻한 인간애를 표현하는 공간으로서의 전주영화들이 있다. <약속>의 전동성당 같은 클래식한 공간 혹은 아모레 태평양 초록색 가방을 들고 노송동 골목을 누비는 <사랑해 말순씨>가 그렇다. 어은골 쌍다리의 여름날, 솜털 같은갈대 모가지가 나오는 즈음 각패 가족들을 위해 둥근 보름달이 솟아오르는 <좋지 아니한家>의 전주천이 그런 공간이다.작고 따뜻한 영화들이 이곳에서 촬영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디지털로 일컬어지는 21세기를 전주에 산다는 것은 영광은 아니어도 괜찮은 일이지 싶다. 전주를 오롯이 담은 영화치고 거대한 플롯을 다룬 영화는 드물다. 거대자본으로 판이 벌려진 영화에서는 당연히 인간의 세밀한 감정들은생략되고 또 희생된다. 공간이 캐릭터를 만들어 간다는 말은곧 자연이 인심을 만든다는 말일 터. 과연 전주라는 공간은어떤 캐릭터에 적합할까? “천원만!”하시던‘휴전선’의 박봉우 선생 또‘금강선녀’노래를 전한 이광웅과 박배엽 시인은언젠가‘전주 영화’로 다루어져야 할 인물들 아니겠는가?내 글과 같은 나이를 가진 전주국제영화제는 연안의 낮은파도에 놀던 나를 원양의 깊은 심연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속적 의문을 던진<노벰버> 같은 작품이 좋은 작품이고 잉마르 베리히만의 <사라방드> 같은 영화가‘진짜’라는 데 양보 할 수 없다. 나라는 존재는 분명 전주영화제를 통해 발전했다. 영화가 재미와의미를 넘어 심연의 한 우주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이영호 선생과 임안자 선생께 꼭 술 한 잔 올리고 싶다.
쓰지 못한 글들
글을 쓰면서 선구안이 좋아졌다. 좋은 영화 아니면 안 본다는 믿음도 생겼다. 아니 영화의 단점보다는 좋은 점을 발견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할까? 동안 <토이스토리>의 어린이웬디와 다코다 패닝은 성인이 되었고 <화양연화>의 장만옥은 아름답게 늙어가는데 장국영은 목련이 지던 날 날아간 후에는 오지 않는다. 장진영과 이은주는 저기 어두운 하늘 별로 떠 있고. 내 삶의 결을 풍부하게 해 준 신세진 영화들이있는데, 쓰지 못한 글들이 있다. 항상 시험에 들게 하는 현대영화 최고봉 브레송의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가 오래도록남는데 초(草)만 잡아놓고 쓰지 못했다. <양들의 침묵>의 렉터 박사, 그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가시가 있는 둥근 테두리를 글로 쓰고 싶었는데 아직도 머릿속에만 맴돈다. 30년 전의 필름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안정된 의상이나 색채 그리고 장면의 공간분할 등 시적 리듬이 있는 호금전의〈용문객잔〉이 그렇고 <나라야마부시코> 역시 마찬가지다. 최명길이여관에 들어 욕실에서 샤워하는 것이 아니라 양말을 빨던<우묵배미의 사랑>은 다른 매체에라도 꼭 쓸 것이다.글로 생각을 표현하는 일은 복받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제작별을 고한다. 가시 달린 영화의 꽃길을 가는 동안 팬덤의즐거움도 있었다. 졸저『영화사용법』이 조금 팔렸고 강의도가끔 들어온다. 감사드린다. 원고가 늦어 기자들 많이 괴롭혔다.《문화저널》을 나간 기자들 모두 의미있는 동네서 한자리들 하고 있다. 건투를 빈다. 다른 글로 자주 찾을 것이다. 홈그라운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