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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 |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고창 5
관리자(2011-10-10 14:13:49)
그 이름만으로도 자랑스러운, 그러나 또한 버거운 노용무 시인, 전북대 강사 바람이 분다. 전주에서 서해안 방면으로 분다. 바람이 가르쳐주는 대로 따라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어느덧 정읍을지나 고창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도로교통 표지판에 서정주라는 친숙한 이름이 보인다. 서정주라는 표지판을 따라 달리니 한적한 시골 마을에 높다란 콘크리트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미당문학관이다. 선운초등학교 분교 건물을 개조해 만든 미당문학관은 구식 분교 건물 사이 현대식 콘크리트 첨탑건물이 솟아 있는 구조이다. 정문을 지나 우측에서 좌측으로시선을 옮겨 본다. 마치 시간 여행으로 빨려드는 듯하다.서정주는 고창출신이다. 그는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한 후,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중앙불교전문학교를 거쳐 등단작「벽」(동아일보, 1936)으로 시작활동을 시작한 이래 한국현대시문학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시인이다. 서정주는 김달진, 김동리, 함형수 등과 함께 시동인지「시인부락」을 창간하며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보여주며, 해방 후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결성, 동아일보 사회부장, 문화부장,문교부 예술국장 등을 역임하며 1949년 <한국문인협회>의창립을 주도한다. 이후 조선대, 서라벌예대, 동국대 교수를역임하면서 각종 협회의 장과 문학상을 수여받기도 한다.주요 작품집은 첫 시집인「화사집」(1941)과「귀촉도」(1948),「 서정주 시선」(1956),「 신라초」(1961),「 질마재신화」(1975), 「떠돌이의 시」(1976) 등이 있다. 저서로는「한국의현대시」,「 시문학원론」,「 세계민화집」,「 흑산호」,「 국화 옆에서」,「 미당서정주시전집」등이있다. 그의시세계는일반적으로 언어미학의 완성을 통해 생의 본질적 문제들을 탐구함으로써 존재의 영원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으로 정리할수 있다. 서정주는 전통적인 서정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기저로 하여 토착적인 언어의 세련미를 통해 시 형태의 균형과질서를 추구했다는 시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미당의 삶과 시사적 행적이 문학관 곳곳에 잘 정리되어 있다. 나에게 있어 미당은 어떤 존재일까. 그는 과연 나의 삶에 어떤영향을 미쳤을까 등등의 생각이 꼬리를 문다.미당 서정주. 그 이름만으로 버겁다. 그는 필자가 국문학을 전공하고 세부전공으로 현대시를 공부하는 내내 하나의거대한 산맥으로 다가왔던 시인이었다. 문학 소년 시절, 그의 시를 줄줄 외우며 원고지에 써 내려 갔던 미당을 향한 짝사랑은 그대로 문학에 대한 열정 그 자체였다. 군 제대 후 우연히 보았던 서정주의 친일작품은 청천벽력이었고 우상파괴혹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다.그 당시 필자를 분노케 한 것은 서정주도 그의 친일작품도권력과의 유착관계도 아니었다. 그것은 시인의 부끄러운 행적을 알려주지 않았던 나의 선생님들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아름다움과 순수의 서정에 매몰되었던 나를 직시하게 했던괴로움이었다. 그때 문학 소년적 감수성을 혐오하게 되면서가방엔 언제나 실천문학사에서 간행한 친일문학작품선집을가지고 다녀야 했다. 이후로 한참을 그러했다.그 당시의 생각은 진정 서정주라는 시인과 그의 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의 모든 것을 껴안아야 한다는 것 이었다.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생각은 결론을 짓지 못하고 자꾸 자꾸 유보되고 유예된다. 필자는 서정주뿐만이 아닌 한국근현대문학사에서 친일이란 담론이 지닌 위상을 알게 되면서 섣불리 말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글을 쓸 때는 다른 시인이나 시를 분석할 때보다 더욱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콘크리트 첨탑 건물을 오른다. 한 층 한 층 오를 때마다 미당의 삶과 문학을 향한 열정이 계단을 따라 소용돌이친다.계단을 따라 휘감아 친 세계의 명산과 그의 삶에 놓였던 일상의 오브제들이 연민을 자아낸다. 한 순간 한 장면들이 모두 미당의 삶을 토해 낸다. 그러한 풍경 속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은 마지막 층의 전망대에 섰을 때였다. 그곳엔 바다도질마재 신화도 미당 생가도 있었다. 그리고 그를 생각하기위해 이곳을 찾은 나도 있었다. 어릴 적 마름인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동네에 어린 미당이 뛰어 노니는 듯하다. 환영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내려가야겠다.옆 건물의 문을 연다. 그곳엔 미당의 대표작과 더불어 모퉁이에 친일작품들도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미당의 작품을 읽으니 다시금 마음이 복잡해진다. 미당의 대표작 중다음 시를 읽어보자.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덕거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에서 이 시를 읽으며 떠오르는“단군 이래 최고의 시인”혹은 “시인 마을의 족장”또는“언어의 연금술사”그리고“그가 만지면 모든 것이 시로 변하고 서정주는 시인을 넘어 역사였다”등등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미당에 대한 헌사들이다. 필자는 최근 학회지에 게재한 전북지역 시문학의 연구현황과과제를 점검하는 글에서 서정주를 다시금 맞이하게 되었다.서정주는 신석정과 더불어 전북 지역의 시문학 연구자들에게 꼭 한 번은 넘어야 할 한국현대시사의 산맥이자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 논문은 그러한 자부심의 원천을 지역문학적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는 자리였다. 앞서 주절주절늘어놓은 미당에 대한 헌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늘유쾌하지만은 않다.예를 들어, 미당문학관 건립 전후, 미당의 친일경력에 대한 문제제기나 친일작품에 대한 전시 문제 등을 제기한 주체는 전북 지역 연구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단체였다는 점. 신석정의 경우, 최근 제자와 후학들에 의해‘석정문학회’가 발족되어 문학관 설립 등 석정문학에 대한 선양 작업을 위해노력하고 있지만 그의 작품과 삶을 온전히 연관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점. 일반적으로 서정주의 경우,친일 시비와 권력과의 유착 관계 그리고 신석정의 경우,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기까지의 행적에 대해 고의적으로 누락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경향으로부터 지역 연구자들이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점은 우리 지역 연구자들이 놓여있는지역적 한계일 수 있다. 서정주와 신석정이라는 두 시인과의인간적 관계나 지역적 연고 혹은 사제 간의 문제 등이 일종의‘벽’으로 작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미당의 제자였던 고은은 자신의 선생인 미당론을 그의 사후에 썼다. 이때 동양의 고전이라 불리는 삼국지의 명장면이나타났다. 소위 죽은 공명이 산 사마달을 이긴“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고은은자신의 스승 살아 생전에 미당과 관련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하였고 미당 사후 약속했던 미당론을 창비에 게재했다. 고은의 미당 비판 이후, “선배 시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한‘어두운 욕구’에서 나온‘시적 아비의 살해’일 뿐”혹은“스승의 산소에 바치는 헌사가 칼을 꽂는 것인가”등 부정적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고은은 침묵했다. 정말로 죽은 미당이 산 고은을 이긴 현상이 벌어졌다. 벌써 십년이 넘은 일화이다. 그러나 이 역시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문제는‘벽’이다. 고은은 그‘벽’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벽’은 너무 견고했고 그토록 완고했다. 미당을 생각하는,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위해 숙고해야 했던 서정주를 떠올리는 어떤 사람도 그‘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벽’은 정치적 (무)의식이다.문학관을 나왔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 했던가. 바람은 흘러야 하고 불어야 한다. 흐르지 않거나 정지한 바람은이미 바람이 아니다. 팔할의 바람을 읽어낼 때 누군가는‘디오니소스’와‘시의 정부’를 읽고 또 누군가는‘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를 그려낼 것이다.이때 그‘벽’은 단절이 아닌 소통의‘창’이 되어야한다. 불지 않는 바람이 무더위를 예고한다면 흐르는 의식은 변화의 바람를 기대할 수 있다. 항상 그래왔듯, 미당을 향한 잠정적 결론이 바람에 나부끼고 또 다시 유예되며‘벽’앞에 걸려 있다.“그의 시는 아름답다 그러나 무책임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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