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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 |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고창 4
관리자(2011-10-10 14:13:34)
전통의 뿌리 있어야 현대화도 가능하다 황재근 기자 본디 농악은 특별한 음악이 아니었다. 일하며, 땀 흘리며, 또 마을 공동체의 행사 때에 흥을 돋우며 함께 즐기던 가락이었다. 특별한 기록도, 전승도 필요 없이, 마을의 어른에게서 젊은이에게로 자연스럽게 이어주던 전통이었다. 그러나근대를 거쳐 현대로 넘어오는 동안 전통적 마을공동체는급속히 해체됐다. 마을공동체가 없는 농악은 말라가는 웅덩이 속 물고기와 같았다. 다행히 시기를맞춰 전승과 기록이 이어진 지역도 있지만 태반은 전통적 마을공동체와 운명을 같이 하고 말았다.고창농악의 전승도 마찬가지다. 300여년을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실전될 위기를 겪었지만 우연과 인연의 힘으로오늘날까지 이어 내려왔다. 이명훈 고창농악보존회장은 그 경험을 통해“결국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고창 농악이 전통이 잘 보전된 형태로 남아있을 수 있는것은 한 사람에게 의지해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각 분야에 능한 여러어르신들에게 직접 전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쇠·북·징·장구 가락만이 아니라,춤, 잡색, 재담 같은 부분도 옛 형태를 고스란히 이어받을 수있었습니다.”대개 한 지역농악에 한 사람만이 지정받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세 사람이나 된다는 것이 이 회장의 말을 뒷받침한다. 구한말부터 1960년대까지 쇠와 장구, 소고에서 각각명인의 반열에 올라섰던 박성근, 김만식, 이모질를 계승하는故황규언, 정기환, 정창환 선생이 상쇠와 설장고, 고깔소고춤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단체지정을 받은 고창농악까지 모두 네 분야의 무형문화재를 보유했던 셈이다.한 사람의 기능보유자가 모든 분야를 기억해서 전수했던타 지역 농악과 다른 점이다. 이러한 다방면의 명인들을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고창문화원장이었던이기화 선생의 노력이 있었다. 1985년 고창지역의 농악을복원하고자 각 읍면에서‘풍물 치던 사람들’을 모아 농악단을 구성한 것이다. 실내 체육관에서 치러진 당시 오디션에는50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 중 심사를 통해 23명을 뽑아 고창농악단을 만들었고 이후 40여명까지 그 숫자가 불어났다. 고창 각지에서‘한 가락’씩 하는 풍물꾼들을 모아 합숙을 해가며 호흡을 맞췄고 1989년부터는 각종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98년 고창농악이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후 고창농악단은 고창농악보존회로 이어지게 된다.이기화 선생은 고창농악을‘간이 제일 잘 맞는 농악’이라고 표현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은 고창농악을 수식하는 말이 된 이 표현은 호남우도농악중, 웃녘으로 갈수록(이리지방)은 빠르고 아랫녘(목포지방)으로 갈수록 느려지는데 그 중간 지역인 영광,무장(고창), 장성의 농악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 전라도 말로‘간이 잘 맞는다’는 뜻이다. 기록과 보존으로 전통을 지키다 1991년 20대 초반의 나이로 고향에 들어와 고창농악을 전수받은 이명훈 회장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고창농악의 역사와 기능을기록하고 보전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삼았다. 1998년부터 그를 중심으로한 젊은 보존회원들은 낮에는 전수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각지의마을을 찾아다니며 어르신들의 기억을 기록하는데 열중했다. 마을마다 각기 다른 가락들을일일이 채보하고, 당산에서 치는 굿은 당산에서,샘에서 치는 굿은 샘에서 직접 재현도 해냈다.“그때는 정말 미쳐서 했어요. 밤에 어르신들 찾아가면 처음에는‘뭐덜라고 그런 걸 물어봐’하시다가 얘기를 풀기 시작하시면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시려고 말씀들도 참 잘해주셨어요. 그걸 다 녹음해서 들어가면 밤새 또 녹취를 풀고. 어르신들 말씀이라 잘 안 들리거나 빠진 게 있으면 다시 가서조사해 오고. 정말 힘들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때 정말 행복했던 것 같아요”이명훈 회장의 회상이다.그렇게 땀 흘린 결실은 10년이 지나 3권의 책으로 발간됐다. 고창농악 100년의 역사와 연행의 내용을 담은「고창농악」과 마을마다 서로 다른 가락들을 일일이 채보하고 구술로기록한「고창의 마을굿」, 그리고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기록을 담은「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다.처음 고창농악단을 구성했던 상쇠 황규언 선생을 비롯해보존회 원로회원 3분의 2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생각할때, 이 작업이 조금만 늦었어도 실전될 자료가 적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처음에 어르신들 찾아다니면서 구술을 받을 때는 굿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그 부분밖에는 생각이 없었어요. 나중에이런 분야를 연구하시는 선생님께“어르신들 살아오신 생활상과 생애를 조사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서야 아차 싶었어요. 저는 지금도 황규언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기록을제대로 못 남긴 게 너무 아쉬워요. 고창 농악에 대해서 그분만큼 잘 아시는 분도 없고 생전에 많은 말씀을 해주셨는데,그 부분을 제대로 남기지 못했어요.”이렇게 기록한 고창 농악의 자료들은 다시 마을굿을 재현하는데 활용됐다. 보존회의 조사과정에서 마을굿에 대해 기억을 전해준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자 마을마다 각기 다른마을굿들의 특성이 사라졌고, 보존회가 기록을 바탕으로 읍면농악대에 마을굿을 전수한 것이다.이런 전통의 보전이야 말로 고창농악이 가장 자랑스럽게생각하는 저력이다. 고창농악보존회 천옥희 기획실장은“뿌리가 단단하다”는 말로 고창농악의 특징을 표현한다.“시대가 변하면서 전통농악도 관객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들에서 치던 농악이 무대로 가고,인원도 줄어들고, 가락도 짧아졌어요. 그게 현대화라고 하는데, 저는 그 이전에 먼저 기초가 탄탄하고 뿌리가 단단해야한다고 생각해요.”천 실장은“현대화된 농악을 한다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가락을 치면 안 되다”고 덧붙였다.세계를 향한 도전고창농악은 오는 10월 중요한 도전을 앞두고 있다. 9월29일에서 10월 16일까지 열리는 제 14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2011’에 고창농악의 고깔소고춤이 초청을 받아참가하는 것이다. SIDance는 유네스코 무용협회 한국지부가 주관하는 권위있는 무용축제다. 올해 축제에서 전통무용분야에서 초청을 받은 것은 고깔소고춤 뿐이다. 천 실장은“전통무용 명인들이 주로 참가해온 SIDance에서 농악단체를 초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고 소개했다.고창농악으로서도 새로운 도전이다. 가락뿐 아니라 잡색과 무용 등 종합예술로서 균형을 잘 갖추고 있는 것이 고창농악의 특성이다. 이번 SIDance 참가는 무용분야에서 그 진가를 보여줄 기회다. 천 실장은“이번 기회를 통해 세계적으로 고창농악과 고깔소고춤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화려한 외양보다 탄탄한 기반을 추구해온 고창농악이 어떤 결실을 맺어낼 지, 그 미래가 더욱 기대된다. “굿의 신세계가 나를 붙잡았다” - 고창농악의 오늘을 만든 이명훈 보존회장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고창농악의 역사 속에 수많은 명인들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고창농악을 말하려면 이 사람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故황규언 선생을 이은 고창농악의 상쇠, 이명훈 고창농악보존회장이다.68년 고창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동아리를 통해 풍물을 처음 접했다. 임실, 이리, 밀양 등을다니며 굿을 익히다보니“고향에도 굿을 치는 분들이 있지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91년, 방학을 맞아 고향에내려온 그는 고창의 문화예술에 정통했던 이기화 당시 고창문화원장을 찾아가 물으니 황규언 선생을 소개해줬다.“장구를 메고 버스를 타고 가는데 그 때는 길이 안 좋아서 가도 가도 동네가 안보였어요. 그때는 고창농악이 전혀알려져 있지 않았던 때라 속으로는‘할아버지가 치면 얼마나 잘 치겠어’생각을 하면서 갔어요.”황규언 선생을 만나 갈고 닦은 솜씨를 보이자 선생은 이렇게 말했단다. “어, 그도 좀 하고만.”다음은 선생의 차례였다. “깜짝 놀랐어요. 들어보지도 못한 가락인데 어찌나잘 치시는지.”그 길로 1주일을 선생의 마을에 묵으며 장구를 배웠다.처음에는 방학기간 좀 배우다 다시 올라갈 생각이었다고.하지만 황규언 선생이 상쇠로 있는 고창농악단을 만나고마음을 바꿨다.“선생님도 잘 치셨지만 또 그렇게 잘 치는 분들이 40여분이 계신 거예요. 정말 굿의 신세계를 본거죠. 제가 여기남은 게 단순히 고향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고창농악이 예술적인 수준이 높았고, 선생님들이 뛰어났기 때문이에요.”그 후로 그의 운명은 고창농악과 뗄 수 없는 인연으로엮어졌다. 황규언 선생과 농악단을 따라다니며 연행을 익혔고, 전북대에 다시 입학해 한국음악을 전공했다. 1998년 고창농악보존회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2000년 고창농악전수관이 개관하자 초대 전수관장으로 취임했다.2001년 황규언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고창농악의 상쇠를맡았다. 2007년에는 4대 고창농악보존회장으로 취임했다. 20대 초반에 고창농악을 만나고 30대에 상쇠를 맡고40대에 보존회장이 됐다.지금은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보존회 상근 직원이 10명가량이다. 모두 10년에서 15년 이상 고창농악을 위해 함께땀 흘려왔다. 특히 고창농악의 역사와 인물을 담은 세권의책「( 고창농악」,「 고창의 마을굿」,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 을 발간하기 위해 10여년간 낮에는전수관 강사로, 밤에는 조사원으로 뛰었다. 방대한 양의기록이 책으로 엮어낸 소감은 어떨까.“내가 할 일은 다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도와주신 분들,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하고요.”故황규언 선생의 기록을 다 남기지 못한 게 후회된다지만, 올 12월 전수관에 들어설 황규언 선생의 공적비가 그 아쉬움을 조금은 달래줄듯하다.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한다. “일단은 굿을 더 잘 쳐야죠.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요.”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더 배우고, 더 잘치고 싶어 하는 그의 열망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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