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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 |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고창 3
관리자(2011-10-10 14:13:15)
여기, 옛 명창들의 고된 수련의 열기가 있다 이영일 고창 판소리박물관 학예사 동리정사(桐里精舍)1)라 불리는 중요민속자료 제39호 고창 신재효 고택은 옛 동리고택의 사랑채로서, 정면으로 초가 6칸과 부속시설만 남아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당대에는 문하에 많은 광대들과 소리 배우러 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초가 6칸의 단촐한 가옥으로 고즈넉하게 방문객을 맞고 있다.현재 남아 있는 사랑채는 옛 동리정사의 부분일 뿐이다. 신재효 선생이 남긴 노래와 자료, 전해 오는 일화 및 증언에 의하면 동리 정사는 상당한 규모의 가옥과 부속건물과 시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전체 부지만 4,000여 평에 이르며 중앙의 석가산(石假山)과 연못을 중심으로 안채, 연당(蓮堂)[또는 정자(亭子)], 현재 남아있는 사랑채, 행랑채, 장례당(葬禮堂) 등이 있었고 일가친척이나 기생·광대, 수습생들에게 처소를 마련해 주니, 대략50여 가구가 한 울타리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한다.실재 옛 동리정사의 모습은 크게 두 공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안채를중심으로 한 생활중심의 공간이며, 석가산·연당·사랑채·행랑채 등 신재효 선생에 의하여 문화화된 공간이다. 이 두 공간은 일정정도 구분이 되면서도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풍류/유풍이 흐르는 생활-문화공간이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정황은 잘 알려진 미금당 정현석의「증동리신군서」(贈桐里申君序)에 잘 묘사되고 있다. 하루는 광대 이경태가 나에게 말하기를 고창의 신재효라는 처사는 재산이 넉넉함에도 검박하여 시골 사람처럼 소박한데 일찍이 광대들을 불러 모아 문자를 가르쳐 그 음과 뜻을 바로 잡아주고 비속함이 심한 것을 고쳐주고 그것을 익히게 하였다. 이에 인근에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 문앞을 가득채우니, 그들 모두를 재워주고 먹여주었다. 그리하여 항상 집안에 광대들의 음악이 넘쳐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기이하게 여겼으나 나는 이를 듣고 감탄하여 이야말로 뜻이 있는 선비라 말했다 미금당 정현석이 신재효에게 보낸 편지(판소리박물관소장자료) / 정현석, 「敎坊歌謠」. 이 글은 권위 있는 지도자 신재효의 지도와 배려 아래, 많은 광대들이 모여들고, 수습광대들이 대문 앞을 채우고, 이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며배움의 장을 여니, 항상 광대들이 판소리를 수련하며, 그 노래 소리가넘쳐흐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옛 동리정사가 판소리라는‘공연의 전 과정’을 자족적으로 충족시키는 공간이었음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앞의 인용된 글에서 “항상 집안에 광대들의 음악이 넘쳐”났다는 표현을 볼 때,동리 정사의 곳곳이 판소리 트레이닝의 장소였음을 말해 준다. 동리 정사가 산 속, 절 등자연 속에 들어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삼라만상이 소리를 통해 합일 되고 본질을 드러내는 득음의 경지에 이르는‘독공’의 독특한 훈련 공간을 제공해 준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판소리 수련의 훌륭한 장소였음은 확실하다. 소리 공부하는 창자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고 마음 놓고 소리를 공부할 수 있는 일정한 장소를 제공하고 여기에 더하여당시 신재효 문하에 있었던 김세종·이날치와 같은 훌륭한 소리선생과 동리 신재효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판소리 수련의 참으로 좋은 조건임에는 틀림이 없다.둘째, 서구적인 개념의 워크샵은 아닐지언정 동리 정사는 판소리적인 워크샵의 적절한장소였을 것이며, 이러한 점은 신재효 스스로가‘4대 법례’를 통해서 워크샵의 화두를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사랑채는 판소리 공연 뿐 아니라“광대들을 불러모아 문자를 가르쳐 그 음과 뜻을 바로 잡아 주고 비속함이 심한 것을 고쳐 주고 그것을익히게”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이다. 이러한 워크샵의 형태는 신재효와 광대들과 수습창자들이 집산하는 과정에서 계기적으로 발생하는 느슨한 형태였을 것이다.셋째, 동리 정사는 사랑채와 연당(석가산)을 중심으로 판소리의 훌륭한 공연의 장소였다. 전통적으로 사랑채나 누각이 판소리 공연의 대표적인 장소였으므로 신재효가 손수광대들의 소리를 감상하는 공간이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또한“광대들을 불러 모아 문자를 가르쳐 그 음과 뜻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한 시연(리허설)이 일어난곳이다.특히 연당 옆의 상당한 규모의 석가산의 존재는 그 문화적 의미와 여파가 매우 크다고본다. 석가산은 토속 신앙, 풍류도적인 인생·자연관의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삼산오악과 명산대천을 섬기는 제의와 연행 모두를 관통하는 신성성을 지닌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석가산과 같은 산대를 설치하고서야 신성의 공간이 열리고 땅이 정화되어 악귀를 쫓고 비로소 다양한 놀이를 놀았던 것이 우리 제의와 연행의 전통이다. 판소리 공연이 일어났던 연당에서 석가산을 옆에 두고 판소리 공연을 하는 모습은 한국 광대들의 공연문화의 맥을 잇는 상징적인 장면으로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광대의 최고의 가창형식이었던 판소리 집성자이고, 창단을 이끌었던 지도자이자 이론가였던 동리신재효의 정사에 자리 잡은 석가산은 생활공간이자 문화공간인 동리 정사의 정체성과 동리 신재효에 대한 보다 깊은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넷째, 시연과 공연 후에 이어지는 냉각과 여파의 과정은 동리정사와 같이 비교적 규모가 작고 전문적인 예능 공간에서일상적인 것이었다. 앞에서 자료 분석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연당은 기생·광대 등 예능인들의 여러 가지 예능이 시연되고 즐기는 와중에 공개적으로 평가되고, 그리고 지도 받는장소였다. 마치 예능인들이 자신의 창악 지도자 앞에서 자신의 기량을 테스트 받는 것처럼, 기생·광대들이 신재효 선생앞에서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고 유의미한 피드백을 얻어 갔다.생활-문화형 공간에서 그 주기가 비교적 짧게 반복되는‘공연의 전 과정’은 예술적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전문성을지향할 뿐만 아니라 수준의 향상을 통해 문화예술을 향유를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앞 인용문에서 정현석의“뜻이 있는 선비”라는 평가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예술 지원 및 활동을 통해 스스로 삶의 경지를 높이고,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신재효는시·서·화에 나름대로 문화적 활동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풍류도적인 인생·자연관을 상징하는 석가산을 옆에 두고판소리라는 고도의 공연예술을 통해서 풍류의 경지2)를 추구했다.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성음이 합일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는 판소리를 통해서 최고의 수준으로 얻을 수 있는 경지이다.3)신재효가 지방의 이임(吏任)의 진입에 성공하고 경제적 부를 축적함으로서 나름대로 현실논리에도 성공하고, 자족적문화공간을 통해 문화예술적으로도 크게 성숙한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그의‘큰 그릇됨’을 증명하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니다. 자신의 경제적 수익을 상당부분 떼어 문화예술분야에 투입하여 문화예술을 향유한다는 것은 각박한 현실에서 많은 현대인들에게도 힘들 일이다. 동리 신재효는 퍼포먼스에 동참하면서 삶을 즐기며 자족할 줄 아는 삶을 현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 같다.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무형문화재의 범위에 넣을수 있는 것이 동리정사와 같은 문화재이다. 여기에는 거듭반복되는 어떤 관습적이고 창조적인 특유의 행위가 있었다.이와 같은 행위가 일어난 장소는 방문자에 의해서 거듭 반복환기 되도록 재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유형 문화재를 그대로복원해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국의 세익스피어로 비유되는 동리 신재효의 정사가 세계인들에 의해서 영국의 작가보다 더욱 자주 찾아지는장소로 재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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