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 |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고창 2
관리자(2011-10-10 14:12:57)
풍요로운 땅 위에 새겨진 아픈 상흔
이병열 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
고창은 복분자, 풍천장어, 수박, 땅콩, 무우, 배추, 고추, 소금, 보리 등 여타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다양한 농수산물이 넘치는 풍요로운 땅이다. 고창의 문화와 자연은 어떤가? 고창고인돌, 판소리는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고, 오벵이골과 곰소만 습지도 그 생태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람사르보호습지로 지정되었다. 전북 서남부 오지인 고창이 어느 날갑자기 삶에 지치고 고단한 현대인들의 각광 받는 땅이 되었을까? 고창 땅을 밟은사람들은 고창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운 자연경관, 그리고 주변 어느곳에서나 볼 수있는 세계최고의 유·무형 문화유산을 보면서 감탄해 마지않는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선사시대 고창인들이 축조한 수천기의 고인돌과 다른 많은 유적을 우리 고창에 준 선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절대권력 하의 고창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고창의 풍요로움은 늘 고단한 삶을 안긴 짐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고창의 문화와저항정신은 풍요로운 고창의 자연이 준 선물이자, 그 선물에 대한 책임이자 처절한대가였는지도 모르겠다.
선사문화의 중심
고창군은 서쪽으로 서해안을, 북쪽으로는 곰소만을 사이에 두고 부안군과 접하고 있다. 고창군의 가장 긴 강인 주진천이외에도 많은 소하천들이 발달하였고, 이러한 하천들을 따라 고창은 일찍부터 다양한 선사문화의 꽃을 필울 수 있었다. 그 선사문화의 꽃은 당연히 세계 최고의 밀집도를 보이는 고인돌이지만, 이 고인돌문화에 앞서 꽃을 피운 것이 바로 증산의 중기 구석기문화이다. 증산의 중기 구석기문화유적은 고창의 주진천 상류인 고수천 부근에서 발견되었는데,이는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BC 5만 년 전으로 알려졌다. 하긴 고창 고인돌문화가 어느 날 갑자기 꽃을 피웠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고창 고인돌의 숫자와 지역적 분포로 볼때, 청동기시대의 고창의 인구부양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이상으로 타 지역보다 월등히 컸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고창이 이른 시기에 선사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원인은먹고살기에 좋은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었기에 가능했다. 고창은 많은 하천의 발달로 내륙 곳곳에 넓은 충적지를 발달시켰다. 고대의 고창사람들은 넓은 충적지와 비산비야가 많은이 땅을 개간하여 농경문화를 발달시킬 수 있었고, 바다에는풍부한 어족자원이 많아 어느 지역보다도 경제적으로 윤택하였다. 특히 고창소금은 577년(백제 위덕왕 24)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전쟁과 수탈의 지배계층을 피해이곳 고창에서 도적질을 하고 있는 피지배계층들에게 소금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어 전국 최고(最高)의 천일염생산지로만들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고창의 경제적 풍요로움에 바탕을 둔 문화의 발달은 일찍부터 정치집단이 출현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역사기록상 고창 땅에 처음 등장하는 나라가 마한의 54개국 중 하나인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이나 아마 그 이전부터 수많은 정치집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많은 정치집단들이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을뿐일 것이다. 한반도에서 청동기 문화가 막 시작되는 B.C.2000년경 고창은 이미 수많은 청동기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삼국시대 고창은 백제의 모량부리현(牟良夫里縣)·송미지현(松彌知縣)·상로현(上老縣)·상칠현(上漆縣) 등의 네 개의현이 있었다. 고창 운곡리에서는 도질토기도요지가 나타났는데, 이는 한반도 최초의 백제계 도요지라고 알려져 있다.그리고 현재까지 고창의 백제계 산성만도 8개나 알려져 있다. 이처럼 선사문화시대부터 백제시대까지 다양하고 우수한 문화가 고창 땅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풍요로운자연환경으로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의향 고창의 명성
왜 고창이 의향의 고장인가? 아마 그 시작은 백제의 멸망과 관련이 깊은 것 같다. 백제 의자왕 때 나당군의 공격으로백제 도성이 함락되자 복신은 왜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夫餘豊)을 왕으로 옹립하여 부안 주류성에서 항거하였다.아마 그때 인구가 많았던 고창사람들이 많이 참여했을 것이다. 왜구가 고려를 자주 침범하였을 때도, 몽골군들이 나주까지 왔을 때도 전라도 의병에 고창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고창이 이렇게 의를 숭상하는 이유는 살기가 좋아고려 때 열아홉 성씨가 고창을 사패지(賜牌地)로 얻었기 때문이다. 1799년에 제작된『호남절의록』에 의하면, 의병의 거두들은 영남이 많았으나 참여한 수는 전라도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창사람들의 수와 활약한 내용도 많다. 고창의 고려 망족들의 후예들은 조용히 집성촌을 이루면서 서로 경합하면서 선비의식과 충절의식을 길렀다. 이러한 선비들의 고답(高踏)한 품격이 고창의 유배문학을 발달시켰다.고창과 고수의 4km 구간의 길가에는 비석이 14개나 있고,고창에서 아산까지 6km 구간에는 17개의 비석이 있다. 지금이야 아무나 쉽게 비석을 세우지만 당시에는 비석을 함부로 세우지 못했다. 비석이 귀할 때 고창은 금석문화가 화려하게 발달했다. 고려 망족들이 뿌린 선비문화의 전통이 의향을 만든 것이다. 조선후기 5대 난에도 고창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창의부대에 가담하여공신록에 오른 무장김씨들은 17명이나 되었다. 또한 장성남문창의 주역인 호남사림은 총 68명인데 그 중 12명이 고창사람들이었다. 조선조 말 동학농민혁명의 무장기포는 혁명의시작이며 19세기 민중운동의 귀결로, 변혁지향세력이 기도한 중앙권력 타도와 정부 개혁을 위한 거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전봉준 등은 고창사람들이었다.1899년 기해년 흥덕 영학당사건은 제2의 동학농민혁명으로불리는데, 이 또한 고창 땅에서 고창사람들이 일으켰다.을사보호조약 후 독립투쟁에 송사 기후만이 나서는데, 의병에 고창사람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경술합방 이후 최익현(崔益鉉)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할 때도 그 주변에 고창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1919년 파리장서사건에는 조선의 유생137명 중 3명이 고창사람이었다. 3.1운동은 고창군의 세 현(고창현, 무장현, 흥덕현)에서 모두 일어났다. 6.10만세 사건때도 학생들은 서울만 참여했는데, 고창은 고창고보와 고창보통학교가 참가했다. 독립유공자도 고창이 질적으로 전라북도에서 가장 많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전북지역에서 고창이 60명이고, 임실이 65명인데, 임실은 한 마을에서 너무많이 나왔다. 이렇듯 고창은 백제부흥운동기부터 해방까지셀 수 없이 많은 의로운 사람들이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을바친 숭고한 땅이었다.
잊혀지지 않는 아픔! 한국전쟁
한국의 근대사는 일제강점기와 조국광복, 그리고 한국전쟁의 짧은 역사 속에서 숨 가쁜 격동기로 점철되어 있다. 일제강점기는 조국광복을 위해 좌익과 우익이 하나 되어 일제와싸움을 한 시기였다면, 광복 후부터 한국전쟁까지는 좌익과우익으로 분열되어 민족상쟁의 피를 흘린 시기였다. 이러한정치권의 좌우익 분열의 불똥은 힘없는 민중들에게 처절한피를 흘리게 한 시기였다. 고창의 좌익과 우익이 적대하며서로 죽고죽인 희생자는 1952년 공보처에는 2,393명,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1,880명으로 집계되었다. 전북도의회(1994년)가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사건을 조사하였더니 전북도내 11개 시군에서 희생된 4,420명의 명단 중 고창군이1,677명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피해는 고창지역에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이렇게고창에서 양민학살이 많았던 원인은 전라북도에서 군경에의한 수복이 가장 늦어지자 많은 좌익계 피난민들이 고창으로 몰려왔다. 고창군은 1950년 11월 19일이 되어서야 겨우고창읍을 중심으로 주변의 면소재지가 수복이 완료되었다.이 시기 고창군은‘낮에는 대한민국, 밤이면 인민공화국’이라고 빈정대던 곳이었다. 그때 당시는 대산, 공음, 상하, 해리,심원 등은 미수복지역으로 남아 있어 북한의 붉은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다. 미수복지의 수많은 양민들은 국군11사단이주도한 군경의 토끼몰이식 토벌작전과 공비토벌작전 등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학살되었다. 사건 발생 당시가 아무리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된 시기라 하더라도, 국군이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 무저항의 민간인을 집단살해 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야만적 행위로서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생명권을 침해하고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2008년, 진실화해위원회). 종전 60년이 되어가는 한국전쟁은 잊혀져가는역사가 되고 있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좌익과 우익을 떠나지역사 중심의 한국전쟁을 재정립해야한다. 점점 먼 나라의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전쟁의 비극은, 우리가 다시금뒤돌아보아야 할 민족사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