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1.9 |
[서평] 「동시 삼베 치마」- 권정생 지음
관리자(2011-09-07 11:21:11)
환생해서 연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김종필 동화작가 나는 권정생 선생님을 떠 올릴 때면 주옥같은 그의 작품들보다 그의 유언장이 먼저 떠오른다.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최완택 목사(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중략)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마땅할 것이다. (중략)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 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 주기 바란다.유언장 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 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 둘수도 있다.그가 떠난 지 어느 덧 4년이 흘렀다. 세상에는 아직도얼간이 폭군 지도자들로 넘쳐나는 걸 보니 그가 환생해서연애하는 모습은 도무지 볼 수 없을 것 같다.대신 손수 써서 만든 한권 밖에 없던『동시 삼베치마』가 47년 만에 수 만권의 아바타 활자 책으로 우리 곁에왔다. 연애 초보처럼 벌벌 떨며(?) 책장을 넘겼다. 순식간에 다 읽었다. 다음 날 또 한 번 순식간에 다 읽었다. 셋째날, 느낌이 꽂히는 책장 스무 쪽을 접었다. 넷째 날, 접힌책장을 찾아 밑줄 치며 글을 쓴다.스물일곱 살에 수제 책으로 묶었으니 동시를 쓴 시기는그 보다 훨씬 이전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 쓴 동시(강냉이)를 포함하여 열다섯 살 전후를 추억한다는 발문으로보아 10년 이상에 걸쳐 쓴 시들인 셈이다. 그 후 동시보다는 동화 창작에 매달렸고, 동화를 통하여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비록 출생신고는 늦었으나 권정생 문학은 동시가 동화보다 언니인 셈이다. 먼저 태어난 동시의 정체성이 동화에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억쇠풀 속에//사알짝//숨어 피었다//패랭이꽃은//시집안 간//누나 같다 (패랭이꽃 전문)어른이 되어서는 많은 돈을 쌓아놓고도 스스로 낮게 살아서 남들에게 회초리가 되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한없이 불우했다. 식민 시대를 살았고, 6.25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겪었다. 불우한 시대를 살면서 넘을 수 없는 가난으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았고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은 더없이 컸다. 이런 경험들이‘몽실언니’와‘점득이네’를낳았고‘한티재 하늘’을 낳았다.억쇠풀 속(열악한 환경)에서도 사알짝 숨어 핀(수줍은 소녀의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 패랭이 꽃(시집 안 간 누나). 이 시는‘꼬부랑길’,‘ 꽃가마’,‘ 쑥나물’,‘ 피고물떡’,‘ 누나사는동네’등을 통하여 누나가 시집가는 풍경과 누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누나를 데리고 간 남자에 대한 소년의 원망으로 이어진다. 이런 시들을 읽다보면 두메산골에서 어찌할 방법이 없어 첩첩산중을 향해‘누나’하고 소리치는 소년의 젖은 목소리가 들린다.뭉텅뭉텅 구름/산 너머로 매끄러져 간다//막 쫓겨 가는가봐/우리도 피난 갈 때/저랬잖니?//구름아, 구름아/얼른얼른/달아나그라.(구름 전문)권정생의 글은 언제나 따뜻하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공유하고, 감천부활(感天復活)의 의지를 느끼게 해준다. 그의 대표 동화‘강아지 똥’도 그러하지만 동시에서도 비슷한 사상을 담고 있다.옥수수네 엄마는/좋은 엄마지/뙤약볕이 따가워/꽁꽁 싸업고/칭얼칭얼 한종일/자장 불러요//옥수수네 엄마는/가난한 엄마/소낙비가 뿌려도/우산이 없어/치마폭만 가리고/걱정하셔요. (옥수수 전문)가난한 시골 아낙네의 모습이 떠오르는 시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해 주고, 가진 것 다 주고 싶어도 어찌할 수 없는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큰따옴표를 과감하게 사용하였고, 어떤 일이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일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기록한 것처럼 느껴지는시, 옛이야기를 쓴‘동화시’도 눈에 띄었다. 사투리를 어찌나빈번하게 사용했는지 한 번 읽고는 그 뜻을 모르는 경우도많았다. 그러나 사투리야말로 문학의 보고가 아닌가. 모르면다시 읽는 것이 좋은 독자의 의무요 즐거움이다. 입말체가가져다주는 생생함을 소위‘표준어’가 절대 대신할 수는 없다.『 동시삼베치마』는오늘날동시보다도더다양한형식을사용하고 있다.고향 집/우리 집/초가삼간 집//돌탱자나무가/담 넘겨다보고 있는 집/꿀밤나무 뒷산이/버티고 지켜 주는 집//얘기 잘하는/종구 할아버지네랑/나란히 동무한 집//비가 오면 비를맞고 섰고/눈이 오면 눈을 맞고 섰고/그래도 우리 집은 까딱 않고 살았다//난 우리 집을/고향 집을 닮았다(고향 집 전문)정지용의‘향수’를 부르는 듯 착각에 빠졌다. 권정생이 평생 꿈꾸었던 집이 바로 이런 집이 아니었을까. 별 볼 일 없는집이지만 오래된 풍경과 함께 하고 착한 이웃이랑 정을 나누며 사는 집. 가족 간에 작은 갈등들(비, 눈) 쯤이야 당연시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 시의 제목을‘자화상’으로 붙여도 어색할 것 같지 않다. 그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의 고향집 옆에 조그만 집을 하나 짓고 싶다. 호박 넝쿨 올라간 돌담 너머로 부침개가 오가는 집을 말이다.『동시 삼베치마』에서 권정생은 장르를 넘나들며 어린 시절부터 죽는 순간까지 한 가지 정체성을 지켰다는 사실을 다시확인해 주었다.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요.제 예금통장은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북쪽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정호경 신부에게 마지막 보낸 편지 중에서)모든 세상 어린이의 착한 어른 권정생 선생님. 환생해서 벌벌 떨지 않고 처음으로 연애도 해보고, 어줍지 않게 폼만 잡는 나 같은 놈도 혼내줘야 하는데. 폭군 지도자뿐만 아니라아이들 밥그릇을 뺏겠다는 얼간이도 설쳐대고 있으니 걱정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