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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9 |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 되돌아보는 부산국제영화제 2
관리자(2011-09-07 11:17:04)
영화제의 성장, 그리고 작별 임안자 영화평론가 한편, 제1회 영화제가 열림과 함께 부산영화제 조직위원회는“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공로가 큰 해외 영화관계자들에게 특별히 공로패(Korean Cinema Award)를 수여하기로 결정”하고 수장자의 명단을 발표했다. 수상자 일곱 명 가운데는 내 이름도 들어있었는데 수상식은 네 차례로 나눠져수영만의 요트경지장 무대에서 치러졌다. 9월 17일 저녁 7시30분에 시작된 수상식에는 뉴욕현대미술관 영화담당자 로렌스 카디쉬와 상트르 퐁피두 영화부의 고문 장-루 파섹 그리고내가 참석했다. 파섹은 1993년 파리에서 역사상 가장 큰 한국영화 회고전을 열어 성공시킨 프랑스 영화계의 거물로, 그는귀의 만성 질환으로 비행기 여행을 할 수가 없어 조수 실비 프라 여사가 대신 공로상(부산 지역의 서예가가 쓴 감사장과 동양화가의 그림이 들어있는 한지의 부채)을 받았다. 그리고 홍경인과 방은진 배우들의 사회로 진행된 수상식에서 나는 김동호 위원장님이 건네주는 공로상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수상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과거 외국 기자들로부터 한국에도영화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한국에는 뛰어난 영화인이 많으며 이번 부산영화제야말로그것을 입증해주는 자리다”라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가훌쩍거리느라 말을 잇지 못하자 청중은 힘찬 박수로 응답하면서 용기를 북돋아주는데 나는 지금도 그때의 감격과 자랑스러움을 잊지 못한다. 수상식이 끝난 뒤에 해운대의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친지들을 만나 한참 신나게떠들고 있는데 자봉 하나가 나더러 밖에서 누가 찾는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복도로 나가자 허술한 옷의 바짝 마른 60대의 자그만 남자가 나를 보자 다짜고짜로“당신 상 받는 거봤다. 외국에서 사는 모양인데 공로상까지 받았으니 이제부터 신상옥 감독처럼 북한을 위해서 일을 하라”며 큰 소리로떠들었다. 처음에는 북한의 공작원을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왜소해 보여 술꾼인가, 하고 연회장으로 발을 돌리려는데 그가 바짝 따라붙었다. 다행히 그 순간 파티장으로들어오던 이장호 감독님이 나를 도와줘 그날 저녁은 무사히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오전에 파라다이스의 호텔로비에서 임권택, 박광수 감독님들과 커피를 마시다가 층층대 밑에 서있는 그를 봤다. 다급해진 나는 두 감독님에게 지난밤의 사건을 말하면서 떨었다. 임 감독님은“아주 고약하게 생겼다”라며 나를 바짝 옆에 앉혔다. 그리고 박 감독님은“그냥 두면 위험 하겠다”라면서 영화제에 부탁하여 보디가드를 부탁했다. 조금 후 몸집이 큰 남학생이 내 보디가드(?)로와서 내가 부산역에서 서울 공항으로 떠날 때가지 나를 지켜줬다. 그럼에도 그 남자는 페막식 파티에 나타나 나를 몰래뒤에서 사진 찍다가 학생에게 들켜 결국 쫓김을 당했다. 그는 도대체 누구였으며 뭣 때문에 내 뒤를 밟았을까? 혹시 정신병자는 아니었는지?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어디서 나타날까봐 겁이 먼저 난다. 부산영화제에서 내가 했던 일들 부산영화제가 나에게 맡긴 역할은‘훼스티발 또는 프로그램 애드바이저’였다. 1회 때는 같은 직명을 가진 사람이 나말고도 네 사람이 더 있었는데 영국 출신의 아시아영화 평론 토니 레인즈, 홍콩영화제 아시아 담당프로그래머 웡 아이린, 미국에서 활동하던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임현옥, 과거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던 폴 리였다. 그러다 3회에 가서는 레인즈와 내가 훼스티발 애드바이저로남았던 반면에 임현옥과 폴리는 훼스티벌 컨설턴트가 됐다.그 차이점이라는게 나에게 아리송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4회를 맞으면서 앞의 셋은 영화제서 나가고 레인즈와 나만 남게 됐는데, 내 역할은 시간이 지나면서 프로그램 쪽으로 무게를 더 두게 됐다.유럽에 삶터를 둔 나로서는 아시아영화에 가까워지기가어려웠던지라 주로 비아시아 지역의 영화에 중점을 둔‘월드시네마’부분의 영화를 도와주는 편이었다. 내가 추천한 영화는 일 년에 평균 4-5편 정도였으며 대부분 전양준 프로그래머가 맡고 있는‘월드 시네마’부분을 통해 시사되었다.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페사로영화제의 한국영화 회고전 때 현지에 왔던 세 영화평론가들 중의 하나로 그 때 그를 알게 됐고 1993년 스위스 프리부룩 영화제서 다시 만났다. 그러다가 1995년 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의 인디 다큐멘터리 팀이 텔레비전에 방영할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전양준 프로그래머가나를 코디네이터로 추천하는 바람에 그와의 접촉이 다시 이뤄졌다. 결국‘월드 시네마’부문을 통해서 나는 그와 같이일 년에 서너 국제영화제를 방문하고 그 밖에 영화선정이나유럽 영화계와의 연결 문제로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으나 영화의 취향에 한해서는 사실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았던게 사실이다. ‘월드 시네마’를 떠나서 내가 맡은 또 다른 일은‘뉴 커런트’부문의 심사위원의 관리였다. 부산영화제가 시작할 때만도 부산영화제 내에 국제심사위원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1회 때부터 심사위원 건은 전적으로 내가 맡았다. 알다시피 부산영화제는 비경쟁영화제임을 선포했으나 동양지역의 젊은 실력자를 돕기 위해 1회부터 뉴 커런트 부분의 우수작에‘최우수 아시아 신인작가상’을 주며 국제심사위원 5명이 수상작을 결정한다.심사위원들과 일하면서 속상할 때도 적지 않았으나 가슴을 훈훈하게 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오래남는 건 1999년 뉴 커런트 부문의 심사위원으로 초대됐던배용균 감독을 다시 만난 일이다. 배 감독은 나를 한국영화계로 끌어들인 은인으로, 그의 첫 작품 <달마가 동쪽으로 간까닭은?>이 1989년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초청됐을 때 그를인터뷰하고 통역을 맡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한국영화와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로카르노 이후 소식이 완전히끊겼다가 부산영화제서 다시 만나서 마냥 기뻤다. 십년이면산천도 변한다고 했는데, 옛날의 엄숙했던 그의 표정은 많이풀려져 있었고 전에 비해 그와 말하기가 훨씬 쉬웠다.내가“감독님 많이 세속적이 되셨네요”, 라고 반농담으로말을 하자 그는“허어”웃었는데 그 나이의 남자들에게 흔하지 않는 순수하고 진지한 웃음이었다. 영화제 동안 하루는 심사위원들이 부산 근처의 범어사를 방문하는 날이었다.심사위원 일행이 범어사에도착하자 안내를 맡은 스님 한 분이 배 감독님을 알아보고는 무척 반가워하는표정을 지으며“불교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아시는 감독님이 오셨으니 외국출신심사위원들에게 석가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면 고맙겠다”라고 부탁을 하자 배용균 감독은“나는 영화감독으로 <달마가...>를 만들었을 뿐불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라면서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결국 내가 통역을 맡았지만 부산에서 만난 뒤로 배 감독을다시 만나지 못했다.나는 부산영화제에서 열렸던 해외귀빈을 위한 기자회견가운데 두 번 회견의 조정자(Moderator)가 된 적이 있었다.첫 번은 1998년 프랑스의 명배우 이사벨 위페르와 신인 나타샤 레니에를 위한 기자회견이었는데, 그 자리에는 프랑스대사 장-폴 레오와 프랑스 영화 대표기관인 유니프랑스 필름 인터내셔날 회장 다니엘 토스캉 뒤 풀랑티에도 참석하여자못 엄숙한 분위기를 띄웠다. 평소 위페르의 연기를 무척좋아하던 터라 나에게는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피부색에 잘 어울리는 살구색의 얇은 웃옷을 입은 위페르는“나는스타보다는 배우로 불리기를 바란다”는 말로 먼저 자기소개를 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들어갔다. 여인의 대답은 짧고 명철했다. 그러나 이 유명한 배우 앞에 기자들은 수줍어서 그런지 아니면 스타 앞에서 주눅이 들었는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어 따분했다. 그러다 한 남성기자가 일어서서 위페르를향해 하는 말이“나는 당신이 연기한 영화를 본 적이 없는데신은 왜 그렇게 유명한가?”라고 물었다. 그의 너무도 엉뚱한 질문에 당황한 건 위페르가 아니고 유니프랑스의 대표자였다. 나는 위기를 넘기기 위해 기자에게 위페르의 연기경력에 대해선 영화제 프레스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줬다. 그러자 그는 나를 향해“당신은 뭘 하는 사람인데 내일에 이러쿵저러쿵 상관을 하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옆에 있던 기자 하나가 그를 끌고 밖으로 나갔고 실내는 다시 조용해졌지만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기자회견을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한 기자의 무지함과 거친 행동으로 이사벨위페르와의 귀중한 기자회견이 그렇게 싱겁게 끝나 씁쓸했다.다음은 1999년에 부산영화제를 뜻밖에 방문한 아르헨티나의 거장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기자회견이었다. 솔라나스 감독과의 기자회견은 기자들과의대담보다는 대학교수의 강의에 가까웠다. 그는 백발의 노장감독 나이에도 조국 영화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특히1998년 아르헨티나를 강타한 달러 추락으로 최악의 위기에처한 영화계의 참상을 반시간 넘게 설명했다. 80년대 말경페르난도 솔라나스의 명작 <남쪽>을 본 뒤부터 한때 나는그의 작품에 심취됐었다. 특히 90년대 초에 그를 프리부룩영화제에서 직접 만나게 되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있었는데 부산영화제서 다시 만나고 그의 기자회견까지 도와줄 수 있어 감격스러웠다.제4회을 맞이하면서 영화제의 일간지 씨네21에서는 성공에서 성공으로 치닫는 부산영화제의 발전상에 대해 기사를 부탁하여 나는 이런 글을 썼다. “부산영화제가 시작한 뒤 순항하고 있다. 벌써 네 번째로 맞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축제다. 부산영화제는 걸음마를 배울 나이에 뛰기 시작한 아시아의 신동이다. 너무 신나게 달리는 데 스스로 놀랄 때도 있지만 아직까지 자신감에 구멍이 난 일은 없었다. 더욱이 올해는 가슴이 뿌듯하다. 드디어 개막식의 자리에 한국영화를 초대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제4회 부산영화제는 이창동의 창작 가마에서 막 구어 낸 <박하사탕>과 함께 차분하게 막을 올렸다. 한국영화가 어느 국제영화제의 개막식에 초대된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뜻에서 부산영화제의 선택은 한국영화계에 상당히 고무적이며 시기도 적절하다…(중략)알다시피 최근 한국영화의 국제적 위상은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해외의 크고 작은 영화제서 한국영화를 보는 건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한국영화를 초대하는 영화제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으며 최근에 들어 국제적으로 이름난 평론가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무게 있는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새로운 현상이다.” (영화제기간 <씨네21>의 데일리 9월 18일자 기사에서) 8년간의 부산영화제를 통해 내가 발견한 것은 한국 젊은관객의 영화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열정이었다. 이들은 한국영화든, 서구영화든, 심지어는 새로 발견한 아시아 영화든왕성한 입맛으로 골고루 찾아서 즐겼다. 유럽에서 수많은 영화제를 다녀봤지만 부산영화제서처럼 젊은 관객이 모여드는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부산 다음에 나온 다른 작은 영화제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나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온참가자들도 남포동을 메우는 젊은 관객을 보고 감탄하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남포동 극장에서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한국 영화제의 약점이다. 물론 영화의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영화문화의 부재를 메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지 않아 아쉬웠다. 그러나 90년대 영화의 거리를 채우는 젊은이들이 훗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는 노인들은 스스로 젊은이들과 섞여 영화를 즐길수 있는 정신적, 심적 여유가 생기겠지, 하고 스스로 위로를했다.글의 시작에서 말했듯이 나는 2003년에 부산영화제를 그만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영화제가커지고 안정될수록 내가 해야 할 일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던 점이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월드 시네마 부문의 영화선정이나 심사위원의 관리는 처음엔흥미로웠고 나름대로 보람도 느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원래 나는 작은 영화제를 좋아하는편이었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 숨겨져 있는 희귀한 영화를찾아다 한국 관객에게 보여주는 게 내 꿈이었다. 그래서 나는 8년간 정열을 쏟아 붓은 부산영화제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부산영화제의 중요성을 잘 알면서도 내 꿈에 충실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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