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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9 |
내 인생의 멘토
관리자(2011-09-07 11:05:58)
내 인생의 멘토 - 스승 백대웅 교수 참 행복하다, 학문을 통해 얻은 人福 송영국 백제예술대학 교수 원고를 청탁받고 나에게 멘토(mentor)가 되어준 사람이 누구 일까! 잠시 사색에 잠겼다. 이 순간 내 삶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게 되었고, 지금 머리가 아닌 가슴에 각인되는사람은 누구일까! 고민에 잠긴다. 한편으로는 이런 원고를쓰게 된 것이 나의 지나온 시간 속에서 잊고 지내던 감사한분들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멘토라는 용어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옛날 트로이 전쟁 때‘이타카’국가의 왕인 오디세우스가 전쟁에 나가면서 자신의 어린 아들을 친구에게 맡겼다. 10년후에 오디세우스 왕이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다시 돌아왔을때 왕의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하였고, 그래서왕은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훌륭하게 교육시킨 친구에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역시 자네다워! 역시‘멘토(Mentor)다워!’라고 크게 칭찬해 주었다.”그 이후로 백성들 사이에서훌륭하게 제자를 교육시킨 사람을 가리켜‘멘토’라고 불렀다한다.그렇다면 내 삶의 멘토는 누구인가! 지나온 찰나를 생각하면, 약관의 시절은 학문적 멘토일 것이다. 순간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교수님이 생각나서 연락을 드렸지만, 영면하셨다는 비보가 함께 날아왔다.사제로서의 첫 만남은 대학원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나는군대에서 전역을 기다리는 젊은 장교였고, 대학원 시험을 치루기 위해서, 외출을 허가받고 2시간의 시험과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단정하게 양복을 입고 면접대기실 앞을지나가시는 백대웅 교수님은 군복을 입고 있는 나에게“자넨어디서 근무해”라고 물으셨다. 그게 교수님과의 첫 대면이었다. 당시 나는 당당하게 특전부대 작전장교라고 부동자세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그 시절 백대웅 교수님의 말씀은 군대 상관이 아랫사람에게 질문하는힘 있는 목소리였고, 순간 나도 모르게 부동자세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말았다.면접 순서가 돼서 면접장에 들어 선 순간 두 번째 만남이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백대웅 교수님의 질문은 우렁차셨고, 선법에 대한 질문을 한 것으로 생각난다. 벌써 20년 전의 모습들이다.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백대웅 교수님의 연세가 지금의 나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교수님은 당시 선법연구를 정리하고왕성한 연구 활동을 하실 때였고, 나는 선생님의 선법에 대한 논리가 궁금하였으며, 무엇이 기존의 논리와 다르기에 저렇게 열정적인가 생각하였다.우리의 만남은 약간 어색하게 시작하였고, 전역과 함께 대학원에서 첫 수업을 하면서 나의 지도교수가 되어주셨다. 첫학기부터 많은 과제와 채보 수업은 나를 진땀나게 하였고,항상 발표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간혹 혹독한 평가를 통해나를 채찍질 하시던 모습이 지금은 그립기만 하다.왜 백대웅 교수님이 나의 삶에서 마음으로 각인된 분으로생각되었을까! 이는 수업을 받으면서 항상 주변학문에 대해서 끝없이 강조하시고, 대학원 논문의 주제를 고민할 때 안확연구를 추천하면서, 한국음악학의 새로운 접근 방법과 방법론에 대해서 새로운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는 논리를 나에게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업은 힘들었고, 주변의학문을 탐구해야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고난의 시간들이었지만, 내가 새로운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원동력은 이 시간훈련되었던 것 같다.대학원 수업 중에 왜 안확을 연구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교수님은“새로운 시각으로 학문을 접근해야하고, 기존의연구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설명을 하신 적이 있다.”그당시에는 교수님의 담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약간의 학문적 충돌과 충격의 시간이었고, 정리할 수 있는 역량도 부족한 때였다.백대웅 교수님은 안확의 연구물 중 “음악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사용하는 악기의 종류는 인간 문화가 발달하므로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는 인용문을 참 좋아하셨고, “ 궁중음악은 왕의 단독으로 궁중 속에서 독주하는 것이요, 민간에서도 구경도 못하던 것이다. 지금에서는 궁중음악을 가지고 조선인 전체의 악이라고 말할수가 없다. 궁중음악은 일반민족의 정서생활에 대해서는 하등 가치가 없으며, 오인은 궁중악을 연구할 필요도 없고 또찬견할 거리도 못된다.”라는 구절에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이는 본인의 연구가 서양의 음계론과 민요를 중심으로전개되어 있었고, 이 부분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또 한 번은 노동은 교수님과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시면서 찾아왔다. 근대 한국음악학의 새로운 연구방법을 공부할 수 있도록 연결망을 형성하여 주신 것이다.두꺼운 검은색 뿔테 안경이 인상적이었던 노동은 교수님은 국악에 대한 새로운 시각, 접근방법으로 그 시절 혁신적인, 아니 혁명적인 수업을 들려주셨다. 항상 수많은 이야기상자를 가져오셨고, 시간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갔다.노동은 교수님을 통해 민족음악과 음악사회학에 대해서새로운 식견을 가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고, 지금 내가 한국음악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하게 된 자각의 시간이었다.이립(而立)이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인복이 찾아왔다. 10년 전 열정만 가지고 사회학을 시작하겠다는 나에게, 남춘호교수님과의 만남은 큰 행운이었다. 관중지천한 나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접하면서 대롱으로 보는 한국음악의 세상을벗어난 수 있었기 때문이다.혼돈의 긴 시간이 지나고 있다. 새롭게 시작한 음악사회학은 음악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지만, 학문적 분류는 사회학의한 속으로 사전적 규정이 되어 있다. 음악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음악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회적 현상으로 음악을 바라본다. 이 두 개의 시각의차이는 분명하다. 하지만, 분명 두 시각의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백대웅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학문을 접목하는 것과 노동은 교수님이 추구하시는 접근방법, 그리고 사회학을 접할 수 있게 해주신 남춘호 교수님의 식견을 멘토로 삼아 한국음악사회학을 만들어 보려는 몸부림이 나를 성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제는 불혹의 나이를 넘어 지천명으로 다가오는시간이 되었다.나는 지난 온 시간 속에 인복이 많아 좋은 선생님들과 함께 할 수 있었고, 지금도 새로운 멘토를 기다리면서 언제나멘티(mentee)가 되고 싶다.참 행복하다! 지금 흘러온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세상에서가장 크다는 인복을 학문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내 눈가에 미소를 만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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