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9 |
[명인명장] 내가 살아온 세상
관리자(2011-09-07 10:55:27)
잘 미치면 박사가 되는거고 설 미치면 미친놈 되는거지
사기장 이은규 명인
충남 공주 출생
1970년 인간문화재 해강선생 문하 사사
1976년 청파 이은구 선생 문하 사사
1983년 주일대사관 청원 이용자 선생과 합작전
1986년 유천도요 설립
1988년~1994년 관광민예품 경진대회 입상 다수
1993년 전북기능경진대회 금상(도자기부문)
1993년 전국기능경진대회 장려상(도자기 부문)
1995년 전국공예대전입선 2점
1994년 일본 가고시마현 교류전
2004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제 제 29호(청자제작) 지정
2008년 (사)한국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도자분야) 공로상 수상
곡기라도 때우려고 도자기를 배웠지
도자기를 처음 배운 것은 70년도에 해강(해강 유근형, 무형문화재 3호)선생님께 배웠지. 20대 안 됐을 때야. 한17~8세. 중학교 나와서 돈이 없으니까 고등학교 안 들어가고 한 1~2년 돌아다니다가. 그때 당시는 대농이고 소농이고 어디 가서 취직해서 곡기 때우기가 굉장히 힘든 시절이야. 그때 도자기는 배우면 특수한 직종이니까 이천 가서 해강요에서 한 5년 하다가, 작고하신 광주요 조소수 선생, 거기서 한 5년 있었지. 지금은 다 돌아가셨어. 형님(청파 이은구, 분청사기 장인)께서는 먼저 도자기 일을 하고 계셨지. 그게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어.그 때 한 100여명이 다 해강선생님 밑에서 일했지. 70년대 초반에는 일종의 기업이었어. 그때는 도자기라면 일본사람들이 아주 미치고 좋아해서. 좀 사업 같은 느낌이었지.그런데 선배들이 기능을 절대 안 가르쳐줘. 후배가 밑에서배우면 자기들이 밀려나니까. 그러니까 다 어깨너머로 보고 터득하는 거지. 우리가 쉽게 얘기할 때 기능이란 게 그렇잖아요. 그 업종을 한다고 해서 다 하는 게 아니고 파트가 한 8~9개가 있어요. 쉽게 말해서 장작 패는 사람은 계속 장작만 패니까, 도자기 공장 다닌다고 해서 이런 도자기를 만들진 못해요. 그런 식이지.해강선생님 문하에서는 조각을 먼저 했지. 문양을 파고집어넣는 거. 조각이란 게 음각·양각이 있고 상감이 있는데 음각·양각은 중국에서 받아왔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뭘 받아오면 또 새롭게 만들잖아요. 파고 나서 집어넣는 게상감이에요.그 조각하고, 모양 만든 성형을 했지. 그리고 일과 끝나고 물레도 해보고. 광주 조소수 씨 밑에서는 군대 갔다 와서 물레를 배웠지. 물레도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터득해야 돼.
옛날 청자는 하나도 같은 색이 없어
80년도 들어서면서부터 고려청자 재현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지. 그 때 당시도 비슷하게는 만들었지만 재현을 하지는 못했으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건 아니었어요.도자기 배우면서 옛날 그릇들을 많이 봤어요. 그때는 그냥막연했지. 한 10년쯤 했을 때라 배움이 짧으니까.이걸 잠깐 보면, 이게 옛날 청자거든요. 보면서 얘기를해줄게요. 이렇게 놓고 보면 하나도 같은 색이 없어요. 수백 가지가 되도 다 틀려요. 이게 다 이 근방에서 내가 수집해서 연구하는 것들인데. 하나도 같은 색이 없어요. 이게왜 그러냐면 자연유약으로 하면 온도변화가 5도에서 10도만 돼도 색이 달라져요. 같은 그릇도 안쪽 바깥쪽 색이 달라요. 이건 광물성 유약으로 나온 건데 색이 다르잖아. 자연유약을 쓰면 이렇게 표면 안쪽으로 자잘한 금이 생기는데 이걸 크랙, 빙열이라고 해요. 이렇게 돼야 하는데 시중에는 다 같은 색이야. 이렇게 색이 변화무쌍하고 재료비도많이 들어가니까 화공약품 유약을 쓰는 거지. 이게 사람들을 속이는 거지.내가 왜 부안으로 왔냐면, 문헌을 봐야 되는데 고려 때 역사를 봐야 해요. 고려 때는 무인들이 정권을 잡았잖아. 그 시대엔 왕권이 쇠락해서 유력자들이 힘이 더 강했지. 그 사람들이 자기들 원하는 청자들을 만들려고 부안도요지를 만든 거야. 강진 쪽은 왕이 관장하던 말 그대로 관요이고. 여기서 파편을 주우면 강진보다 월등하게 우수해요. 그래서 학자들이 생각하는 게 뭐냐면 여기는 왕권보다 더 쎈 사람들이관장했다는 거지. 청자 역사를 공부를 하다가 부안 쪽으로정착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지.원래 여기는 내가 지은 게 아니라 운영을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한 2년 하다가 계속 못하고 팔았어. 나는 원래 고창에 먼저 내려왔다가, 여기로 온 거지. 그게 82년도쯤이니까지금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야. 원래 들어오는 입구부터 산이었고. 아스팔트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이었지.처음에는 동네사람들이 반신반의했어. 내가 30대였으니까, 젊은 사람이 와서 과연 살까 하더니 한 3년 지나니까 인정을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생활은 어려웠지. 동네에서 쌀도갖다 주고 했었어요. 부안 오기 전에 결혼을 하고 내려왔죠. 애들도 있었고. 가족들은 내가가자는데 반대하거나하진 않았어요. 원래 미친 사람이니까. 원래 공부도 그렇지만 잘 미치면박사가 되는 거고.설 미치면 미친놈이 되는 거지.
유약 만들고, 흙 찾아다니고, 가마 연구하고
내려와서는 일단 도자기 만드는 기술은 아니까, 자연유약을 연구했어. 이천서 했을 때는 인공유약을 썼으니까, 자연유약을 만들어야 재현을 하잖아. 구전을 통해서 잿물유약도있고 산화철 갈아서 집어넣는 방법도 있다고 듣기는 했지.그걸 여기서 하나씩 만들어서 구워 본거야.흙도 연구했지. 도자기 만드는 흙을 태토라고 하는데, 그흙이 있어야 작품을 만들거든. 처음에 와서는 찾질 못해서애를 많이 먹었어요. 먼저 절개지를 찾아야해. 도로 공사같은 거 하는데 가서 절개지를 보면 층이 있어요. 그걸 보다보면 하얀 흙이 나오는 데가 있어요. 그걸 찾으러 다녔지. 이파리가 떨어지는 가을에서 겨울까지는 흙 찾아서 돌아다녔어.가마도 새로 만들었지. 이천에서는 조선시대 쓰던 개량가마를 썼고, 여기 있는 건 고려 때 가마거든. 가마의 원리라는것은 거의 비슷하니까. 그런데 고려 때는 기술이 부족하니까가마가 흙 속에 반 정도 묻혀있었어. 불을 때면 1천2백도~1천3백도 올라가는데, 처음에는 괜찮지만 열 번, 스무번 때면가마가 이렇게 늘었다 줄었다 하니까 어그러진다고. 그러면또 옆에다 짓고 옆에다 짓고 하는 거지.저 밖에 가마를 보면, 다른 가마는 항아리처럼 입구가 좁고 뒤쪽은 둥글게 올라왔는데 그건 조선시대 때 개량가마고, 이건 고려시대 가마를 재현한 거야. 일직선을 쭉 뻗어있지. 내가 지금까지 가마들을 쭉 보면서 연구해서 복원한 거니 이게 꼭 고려시대 가마라고 할 수는 없겠지. 가마터 발굴을 하면 바닥만있으니까. 아무래도 조선시대 가마가 더 안전하지지만 나는 재현을 해보려고 고려시대 가마를 만든 거고.이걸 맨 밑에서 10시간을 때서 예열을 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3시간, 2시간, 1시간 위로 가면서 때는 거지. 최종적으로 1천3백20~40도 이 정도까지 온도가 올라가는 거야. 장작을 땔 때, 우리가 900도까지 올린다고 하면 장작을 한 300kg 정도 때면 돼. 그런데 1천1백도부터 1천300도까지는 한 10톤 정도가 필요해. 고온으로 갈수록 장작이 바로바로 타니까. 저온에서는 조금만 넣어도 금방 올라가는데 고온에서는 10도 올리는데 훨씬 더 많은 장작이 필요한 거지.자기를 가마에 넣을 때도 온도가 다르니까 색도 다르고 하지. 아래쪽에는 손이좀 덜 가는 거 위쪽에는 더 공력을 들인 걸 넣는 거지. 앞에는 실패할 확률이 좀 더높이니까. 맨 밑에서는 참나무를 때고, 옆에 구멍으로는 소나무를 넣지. 한번 때면24시간도 더 때. 새벽 한 4시쯤 시작해서 그 이튿날 10시쯤까지 하니까.
청자는 보는 게 아니라 쓰는 거야
재현에 제일 어려웠던 건, 다 어려웠지. 흙도 그렇고. 지금도 흙을 완전히 못 찾았어요. 지금은 C급, B급은 만드는데 최고 양질의 흙을 아직 못 찾았어. 지각변동을 했으니까 어디 들어갔는지 모르지. 천년이 흘렀으니까. 내가 추구하는 색을 낼 흙은 아직찾지 못 한 거지.아까도 말했지만 옛날 청자는 하나도 똑같이 생긴 게 없어. 내가 만든 것 갖고 어거지로야 비슷하지 않느냐 그런 정도지. 완전히 똑같다는 거는 될 수가 없지.비슷한 것들은 많이 만들었지. 그때가 한 97년, 98년 그때쯤부터 옛 청자랑 비슷한 그릇들을 만들었어. 거기까지 한 15년 정도 걸린 거지. 내 생각에 지금 한 95%쯤 되지 않을까.아직 내가 볼 때는 부족한 게 좀 있지. 기능이라는 게 죽 하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터득이 되는 거야. 언제까지 될 것이다 예측은 못하지.내가 생각하는 더 높은 단계라고 하면, 아주 미묘한 거라말로는 잘 얘기를 못하겠는데. 송나라 때 기록에 보면 인간이 만든 열 가지 보물 중에 고려청자가 들어간다고. 이걸가까이 들여다보면 상감문양이 도드라져 보여요. 만져보면튀어 나온 게 아닌데, 볼 때는 그래. 그래서 이걸 중국 사람들이 학이 튀어나와서 날아갈 것 같다고 표현했어요. 그 정도 가야하는데 아직 그 정도는 못 갔지. 제일 근사치까지갔다고는 하는데 아직 완전히 미치지는 못하지.청자표면을 확대경을 한번 대고 봐봐. 작은 물방울 같은 게 있지. 여기에 음식이나 물이 들어가면 반응을 해서 맛이 좋아지는 거야. 이렇게 손으로 만지면서 쭉 내려 보면 옛날청자는 살짝 손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있다고. 화공약품 그릇은 그냥 쑥 내려가고. 오돌토돌한 게 아주 미묘하게 있어서쉽게 안 내려가는 거지.옛날 그릇에 물을 담거나 술을 담거나 하면 맛이 좋아져요. 화공약품으로 하면 맛이 떨어져. 옛날 그릇이 유기농이다 하면 화공약품 그릇은 농약 친 농산물이지. 원래는 이 그릇들이 보는 게 아니라 다 쓰는 거예요. 근방에 술 마니아가있는데 삼시세끼 술만 먹는 사람이야. 그런데 그 양반이 내그릇에 담아먹으면 맛이 확실히 다르다는 거야.
하나 만들려면 6개월…순전히 끈기지
그릇은 원래 여러 사람이 만드는 건데 여기 와서는 나 혼자 다했지. 이천에서 도자기 만드는 법은 배워갖고 왔고. 가마랑은 다 여기서 연구를 한 거지. 여기는 사람이 없으니까.도와서 하질 못하지. 도자기 만드는 과정은 어느 부분이든다 힘들어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상감청자를 만들려고 하면 형태만 만드는데 한 달 정도 걸려요. 전 과정을 다 거치면 6개월 정도 걸려요. 상감을 집어넣으면 4번 집어넣거든요. 한 번에 다 못하니까 마르면 또 넣고, 또 흑상감 넣고, 백상감 넣고. 그 과정이 순전히 끈기죠.한 작품만 전념한다 해도 한 달은 걸려요. 그래서 청자가 돈이 안 돼.청자는 옛날부터 귀했어요. 청자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다들 권력이 많거나, 돈이 많거나. 옛날에는 쌀이 천석이었는데, 엄청난 가격이지. 지금 전부 전해지는 청자는 무덤에서부장품으로 나오거나 바다 속에서 나온 거야. 전래품이 없어요.그리고 나중에 나온 게 백자지. 백자는 청자에 비해서 한열 배정도 제작기간이 짧아요. 백자도 초기에는 음·양각이나 상감을 했었는데, 나중에는 그림으로 넘어갔지. 또 백자는 청자보다 더 고온에서 굽지. 그러니까 경도가 높고 생산을 더 많이 할 수 있어. 백자는 장석 성분이 많고 청자는 사토, 모래 성분이 많아. 만드는 흙 자체가 달라요. 흙으로 치면 백자 흙이 더 고급이에요. 백자 흙 속에는 광물성이 없어야 돼. 그래야 색이 하얗게 나오니까. 광물 성분이 있으면 얼룩이 생겨. 청자는 광물성이 포함돼있어야 해요. 0.5~07%정도의 산화철 성분이 있어야 이런 색이 나오는 거지.
인공유약이랑 자연유약 재료비가 100배차야
먹고 살기는 해야 하니까 팔 그릇들도 좀 만들었지만 형편이 좋지는 못했어요. 그만 두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 애들도크고 학비도 대야하고. 그래도 오기로 계속했지. 그러다 대회에서 수상을 하고 하니까 조금씩 알려지게 됐고. 90년대들어서는 애국가 할 때 도자기 만드는 사람 나오는데 그 사람이 나야. 나중에 90년대 후반에 박찬호로 바뀌었지.2004년 무형문화재 지정됐는데, 원래 97년도에 신청을해서 7년 걸렸어요. 전문위원이 없어서 서울서 내려와서 심사하느라. 명지대학교 교수님이 오셨는데 그러는 거야. 나같이 연구하는 사람 보질 못했대. 뭐 성과가 나면 매스컴으로발표도 하고 해야 하는데 연구만 하고 있다고. 청자의 전 제작과정을 인정받는 무형문화재는 나 혼자야.다른 곳에서도 청자를 재현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내가제일 근사치로 재현했다고 해서 무형문화재를 받았지. 청자만 만들어서는 생활이 안 되니까, 자꾸 손쉬운 쪽으로 가는거야. 인공유약으로 만드는 거랑, 자연유약으로 만드는 게재료비가 100배 차이가 나요. 유약 재료로 마른 느릅나무 잎이나, 갈잎을 1톤을 사면 150만원 200원되는데 그걸 태워서 정제를 하려고 하면 한 3백만원 들어가거든. 그런데 화공약품으로 하면 1만원~1만5천원 하니까 게임이 안 되는 거지.
기능은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어
제자들은 많이 가르치긴 했는데, 내가 활동을 많이 하고 해야 하는데 우리 지역이 그런 여건이 못 되니까. 급료라도주고 해야 하는데 내가 그런 여력이 못되는 거지.작년에는 3명 가르쳐서 2명이 도예기능사 자격증을 땄어.작년 1월 달인가 공주에서 도자기 과를 나왔다는 여자애 둘이, 나한테 배우고 싶다고 하더라고.도예기능사 자격증은 만들고 조작하는 기술이지 아직 세부적으로 들어간 건 아니야. 걔네들이 처음에 왔을 때 이런컵이나 만들 수 있냐 했더니 물레로 만들질 못하더라고. 쓰던 물레가 다르니까. 처음부터 다시 가르쳤지.유약 같은 건 못 가르쳤어. 그건 그것만 한 10년, 15년 해야 터득하지. 유약 만드는 과정은 워낙 복잡하니까. 예를 들면 우리가 보는 흙이 있단 말이야. 이게 햇볕을 받으면 흙속에 철 성분이 산화가 돼. 그런데 안쪽에는 산화가 안됐단 말이지. 이런 아주 미묘한 걸 터득을 해야 돼. 유약 만드는 물도 어떤 물을 쓰면 철 성분이 있고 색이 좀 달라져. 그런걸알아야 돼.부안에도 도예 하는 친구들이 들어왔어요. 원대 나온 친구들도 있고, 내가 17년 정도 가르쳐준 친구도 있고. 그 친구들은 현대자기를 해요. 그래서 한 2~3년 전부터 청자 하라고하긴 하는데. 청자가 원래 돈 되는 사업이 아니에요. 앞으로부안이 청자를 중심으로 한다고 하니까 그 친구들도 청자를하면 좋지.그런데 학술은 가르칠 수 있는데 기능은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못해. 자기가 해보고 모르는 걸 물어보면서 해야지,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이 없어요. 말로는 안 돼. 그러니시간이 오래 걸리지지금 생각 중이에요. 이제 전수관도 짓고 하니까.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저 놈이 나한테 배워가려고한다면 3년 정도는 가야 깊이 들어가지 그전에는 깊이 들어가질 못하거든. 그걸 견딜 수 있나 그걸 봐야지.
언젠가 때가되면 개인전 해보고 싶어
계획이라면…. 내가 이제 평생 동안 단체전은 많이 해봤는데 개인전을 한 번도 못해봤어. 왜냐면 청자는 기간이 만드는 길어가지고 혼자 전시할 만큼 모으는 것도 어려워. 그리고 아직 내가 뭔가 미숙하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남들은 젊은 친구들도 개인전 잘만 하던데. 생각해보면 그것도 용기지.‘ 이정도면보여줄만하다’할때해야하니까, 나는아직못했어요. 알면 알수록 세상이 겁이 나는 거야. 누구는 잘한다고 하기도 하지만, 또 누가‘저건 아니다’라고 할까봐 겁이나는 거야. 언젠가 만족할만한 때가 되면 개인전을 해보고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