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9 |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임실 3
관리자(2011-09-07 10:54:34)
지역문화 다시보기 - 임실 3
푸진 굿, 푸진 삶을 만들어온 이사람들
양진성 임실팡봉농악보존회 상쇠, 보존회장
필봉굿의 역사는 필봉마을의 역사와 함께 시작 됐다. 필봉굿은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에 약 400여년 전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의 역사와 함께 현재까지 마을의구성원들과 함께한 삶이라 할 수 있다. 70~80년대, 그리고 필봉농악의 가장 험난했던 90년대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켜냈던 그 힘으로 지금의 든든한 필봉굿판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마을 굿은 필봉마을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든 살아 존재했던 소리였다. 현재까지 그 소리를 보존하고 전승할 수 있는 필봉굿의 밑바탕은, 필봉마을 사람들의 갈등해소와 마을의 협력 그리고 화합을 도모했던 이들 삶의 중심에 굿이 있었기 때문이었다.필봉풍물굿이 지향하고 추구하는‘푸진굿 푸진삶’, 판을통해 얽히고 맺힌 것을 풀어주는 대동의 한마음이 바로 필봉풍물굿 그 자체다.
하나의 밀알이 무수한 열매를 맺다
오늘날의 필봉굿이 있기까지 故양순용 상쇠가 일궈온 필봉풍물굿의 전승과정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는 1941년 임실군 필봉리에서 태어났고, 13세 되던 해부터 박학삼 상쇠 밑에서 끝쇠를 치기 시작하여 14세에 필봉농악의 상쇠를 맡았다. 당시 그의 나이가 매우 어렸기때문에 사람들은 그를‘애기상쇠’라 했다고 한다.1970년대 초 시군 농악경연대회가 활성화되고, 이 대회참가를 위해서 각 시군 농악패들이 전에 없이 활발하게 조직되었다. 1960년대에 소강기에 접어들었던 필봉농악도대회굿을 통해서 다시 재정비를 이루고, 이전보다 더 조직적인 굿패를 형성하게 된다. 양순용 상쇠는 당시 30대 중반의 나이로 4H 클럽 모임을 마을농악단을 결성하는 계기로 활용하였으며, 직접 농악강습을 실시하여 기존 마을농악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실력 향상을 도모한 것은 물론,후학 양성에 힘쓴 결과 향후 필봉농악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인적 자원 양성에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현재의 필봉 농악 주요 전승자들이 이 시기 그에게서 농악을배웠다. 이렇게 해서 순수하게 필봉마을 사람들로 이루어진 60여 명 정도의 필봉마을 풍물굿패가 구성되었으며,이후부터 이들이 주축이 되어 임실군 대표로 각종 농악 경연대회에 참가하거나 굿판에 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거둔 성과 중의 하나가 1974년도에 전라북도에서 주최한‘제1회전북 농악 경연대회’에서의 수상이다. 이후 양순용을 상쇠로 한 필봉농악은 1977년 6월 제3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차하’를, 그 다음 해인 1978년 제4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장원’을 수상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이런 화려한 수상 경력이 쌓이고 다양한 공연활동을 통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되자 서울대, 홍익대, 한양대 등 대학생들이 동아리나 학과 모임별로 필봉농악 전수를 받기 위해 찾아오면서 80년대부터 본격적인 필봉 농악 전수활동이 시작되었다.하지만 남원에서의 전수교육은 매우 불편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대학생전수교육은 관할 군, 경의 감시 하에서 각종 사전보고와 통제 시스템에 의해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이 정점에 이르렀던 1987년을 전후로 해서 이러한 통제는 더욱 심화되었는데, 동·하계 방학 동안에 이뤄지는 전수교육 현장에는늘 담당경찰이 상주하다시피 하였고, 전수교육을 신청한 학생들은 그들의 자세한신상명세를 기록하여 경찰서에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관할 군, 경이 수시로 전수교육생들이 머무는 숙소를 방문하여 불온한 세미나가 이뤄지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심지어는 당시 발간이 금지된 책들을 압수하고, 이를 빌미로 전수교육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대학생을 위주로 한 전수교육 이외에도 양순용 상쇠는 남원시 필봉농악동호회, 여성 풍물패 등 사회인 굿패를 지도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남원에서의 전수교육은 현재 필봉농악의 전승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95년 그가 타계하기 전까지 가르친 필봉농악 전수교육생은 약 4만 명에이른다.1995년 양순용 상쇠의 타계로 인해 필봉농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농악은 절대적 지도력을 가진 상쇠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 상쇠의 부재는 공연 정보의 유실과 같은 것으로 농악단에게는 심각한 타격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1995년 무렵의 필봉농악은 이전의 전승 체제와는 다른 전승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전의 필봉농악은 농업이라는 생업을 따로 둔 마을공동체의 굿패로‘농구’라는 예비상쇠를 통해 전승단절을 예비해 왔다. 그러나 양순용 상쇠 때에는 생업인 농사와 비슷한 비중으로 많은 공연활동이 이루어지면서 공연정보가 공유되었으며, 전수교육이라는 전승 체제를 체계화함으로써 전문 능력을 갖춘 필봉농악 전승자들을 준비시켰다. 다시 말해 상쇠라는인물이 사라지더라도 약간의 혼란은 있겠지만 공연 정보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일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환경이 조성돼 있었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필봉굿
필봉농악이 필봉마을에서 지속적으로 연행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양순용 상쇠는 1987년 2월, 1980년이후 7년 만에‘제2회 호남 좌도 임실 필봉농악 발표회’를 개최, 이듬해 4월‘제3회 호남 좌도 임실 필봉농악 발표회’를 필봉마을에서 갖게 된다.이후 1997년에는 남원시 주생면에 있던 필봉풍물굿 전수교육관을 정리, 임실 필봉농악 전수관으로 이전·통합한다. 지난 2000년에는 새로운‘필봉농악 전수관’이 완공되었다. 새로운 전수관 준공으로 필봉농악의 전수교육은 더욱 활성화 되어 초·중·고·대학의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시기에 맞춰 한시적으로 진행되던 전수교육은 상시적인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었다.오늘날에는 해마다‘호남 좌도 임실 필봉농악 보존회’에서는 전수관을 중심으로 해서 연 3,000명의 전수 교육생들을 배출해 내고 있으며, 전주·군산·광주·대전·서울·부산에 각각‘필봉농악 보존회’지부를 두고 있다. 또연 2만여명이 초·중·고 학생들이 전통문화 체험을 위해필봉 전통문화 체험학교를 방문하고 있다. 또 전문적인 국악인력들로 구성된 필봉예술단을 통해 퓨전 국악 등 다양한 컨텐츠를 만들어 공연하고 있다.필봉농악의 힘은 농촌공동체 문화가 무너지던 일제시기부터, 정부 당국의 까다로운 감시를 속에서도 대학생, 지식인,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전수 교육에 매진해 온 70~90년대, 그리고 도약의 시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필봉농악을 지키고 전해고자 했던 그리고 배우고 이어가고자했던 사람들, 바로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