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9 |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임실 2
관리자(2011-09-07 10:54:16)
지역문화 다시보기 - 임실 2
충·효·열의 정사, 여전히 자긍심이더라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임실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필경 고추라 할 테고, 젊은이들은 치즈를 떠올릴 것이다. 혹 오수가 임실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오수 의견義犬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1999년부터 전라북도 각 시·군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특별전, <전북의 역사문물전>을 개최하고 있다. 필자가 처음‘임실’전을떠맡게 되었을 때, 참으로 막막하였다. 8년 전에 국립전주박물관에 근무할 때 치렀던‘군산’전을 맡았을 때와는 또 다른감정이었다. 임실이 고향이 아닌 필자 역시‘임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생각이 치즈, 고추, 의견 정도였기 때문이었다.그런데‘임실’전을 준비하고 전시는 물론 도록을 발간한 이시점에서 막‘임실’전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느꼈던 감정이기우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임실이야말로 전라북도의 다른 시군에 못지않은, 아니 더 많은 이야깃거리와 자랑거리가있는 곳이었다.
산과 물이 어우러진 명당 그리고 교통의 요충지, 임실
어느 나라든 어느 고장이든 자기 땅을 자랑삼지 않는 곳은 없을 것이다. 임실 사람들 역시 만찬가지였다. 윤태일은『운수지』의 서문에서 임실을 가리켜“방비는 굳건하고 물산은 풍부하니 참으로 살기 좋은 곳”이라 하였다. 마을을 포근히 에워싼 산과 거미줄처럼 흐르는 섬진강의 혜택을 받은임실은 그들 스스로 하늘이 내린 곳이라고 자랑하였다.임실의 동쪽 성수산에서 시작된 산줄기는 북으로 내달려백운산, 마이산 등으로 이어지고, 서남쪽으로 임실 땅을 지나면서 고달산, 두만산, 용요산, 백련산, 회문산 등 높고 낮은 산이 이어진다. 이러한 산과 산 사이에는 사람이 살 만한땅이 형성되었다.산과 땅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모이지는 않았을 것이다.바로 물이 있어야 하리라. 임실에는 진안과 장수 경계에 있는 팔공산 데미샘에서 시작한 섬진강이 여러 지류와 합쳐져흐른다. 섬진강은 진안고원을 지나 임실에서 오원강, 평당천, 오수천, 갈담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임실 땅을 굽이굽이 돌아 남으로 흘러간다.병풍처럼 둘러 있는 산, 산과 산 사이의 기름진 땅, 마을과 마을을 적시며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 이러한 모든 조건이 충족된 곳이 바로 임실이다.한편임실은교통의요충지였다.『 고려사』에따르면, 임실지역에는 오수역, 갈담역, 오원역 등 세 곳의 역이 있었다.임실지역에 유독 역이 많이 들어선 이유는 지도를 펴보면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바로 임실은 금강과 섬진강, 만경강과 동진강 수계를 연결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전주에서남원을 가기 위해 꼭 거쳐야하는 슬치는 만경강 수계와 섬진강 수계를 연결하는 고개인 것이다. 또 동진강과 섬진강을 연결해 주는 가는정이, 섬진강과 중류에서 금강 상류로나아갈 수 있는 고돔치와 개치, 남강 수계로 나갈 수 있는마치는 물론이고, 오수천을 통해서는 영산강까지도 나아갈수 있었다. 한마디로 임실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다른 곳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이렇듯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룬 교통의 요충지 임실에는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2만3천년 전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자취를 남겼다. 어느 때는 주목받기도 하였지만, 어느 때는 잘 드러나지않았다. 그러나 임실에 살았던 사람들은 묵묵히 자신들의역사를 만들었다.
의병이 무수히 일어난 고장, 임실
물산이 풍부하다는 점,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는 점은 어느누구든 꼭 차지해야 할 중요한 곳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나라밖으로부터 환난이 닥칠 때마다 임실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을까?일본이 명을 친다는 명분으로 일으킨 임진왜란 때, ‘호남이없다면, 국가도 없다.’라는 이순신의 말처럼 전라도는 왜적에게꼭 필요한 곳이었다. 전라도에 쳐들어온 왜군에 맞서 의병이 처음 전투를 치른 곳이 바로 운암이었다. 양대박이 이끄는 의병은첫 전투에서 당당히 승리를 일구었다. 이 전투에서 임실 출신박순달은 사재를 털어 의병의 군량을 책임졌다.임실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국가를 위해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1907년 을사의병의 바람이 시들해질 무렵이었다. 임실 성수 출신의 정재 이석용李은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였다. 이후 그는임실, 진안, 장수, 남원, 순창, 구례, 곡성, 거창 등지를 주무대로 의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 의병의 주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임실 사람들이었다. 이석용의 의병부대는 1908년 3월21일 성수면 운현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패하여 흩어졌으며, 1912년 일제에 붙잡힌 이석용은 결국 1914년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임실군 성수면에는 정재 선생을 비롯한「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참여하였던 의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소충사가있다.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1919년3.1운동의 민족대표인 박준승(1866~1927) 선생을 배출하기도하였다.임실군에서는 올해도 9월 29일부터 어김없이 소충사선문화제가 열린다. 소충사선문화제는 임실의 대표 축제인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소충제와 사선제가 합쳐져 붙은 이름이다. 다른 고장의 축제와 달리 임실의 축제에서는 소충사를 중심으로옛 사람들의 충, 효, 열의 정신을 기리는 점이 눈길을 끈다.임실 지역에서는 나라와 고장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린 학생부터 노인까지, 양반에서부터 천민까지, 남자건 여자건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끝까지 싸웠다. 그러한 바탕에는 옛 사람들의진충보국의 정신을 계승하려 했던 임실 사람들의 정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 증거가 지금도 가을이면 열리는 소충사선문화제아니겠는가?
국가가 하지 못한 칭찬, 마을 사람들이 하다.
임실의 어느 마을을 가던지 그 어귀에는 효자비, 열녀비가 있고, 정려각이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것만도 100여 기에 이른다. 미처 조사되지 않은 것까지 합한다면, 임실에는 헤아릴 수없을 정도로 많은 효자, 효부, 열녀가 있었을 것이다.임실 사람들은 위독하신 부모님, 지아비를 위해서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두꺼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았으며, 돌아가신부모를 위해서는 3년간 부모의 묘 곁에 살며 통곡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죽은 지아비를 따라 자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성에 하늘도 감복하였는지 잠시나마 부모가 되살아났고, 잉어대신 산삼을 낚을 수 있었으며, 시묘살이 하는 곳 옆에는 꽃도피지 않았다.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인물이 있다. 강주영의 아내 함안조씨로만 알려진 여인이다. 이 여인은 시부모가 위독할 때는 자리를 뜨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고, 남편이 병들어 죽은뒤에는 뒤이어 자결하였다고 한다. 1815년의 일이었다. 별유사, 임실의 유생들, 마을 사람들은 이 여인의 정신을 높이 사열녀로 지정해달라고 수차례 국가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열녀지정은 지지부진하여 60여 년이 지난 1874년에서야 열녀로공식 인정받았다. 이 과정에서 함안조씨가 살았던 마을 사람들은 1852년 함안조씨 후손의 잡역을 나누어지자는 약속을 하고그것을 문서로 남겼다. 국가가 열녀로 지정하기에 앞서 마을사람들이 열녀로 대접했던 셈이다.임실 사람들은 자기 고장을 충, 효, 열의 고장이라 자랑한다.이것이 다른 자랑거리가 없어 내세우는 빈말이 아님을 옛 사람들의 흔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실에서 그렇게 많은 충신과효자, 열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충, 효, 열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대접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미물에게까지 전해진 임실 사람들의 정신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오수’하면 무엇이 떠오르느냐 물으면, 곧바로‘의견’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의견 이야기는널리 알려져 있다. 의견 이야기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인 최자의『보한집』에 실려 있다. 때는 고려, 장소는 거령현 지금의 오수 땅이었다. 주인공은 김개인과 그가 사랑했던 개였다. 어느날 술에 취한 김개인이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마침 들불이일었다. 개는 주인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어 주인의 주변풀에 물을 적시기를 여러 차례 하여 주인을 살렸지만 결국 죽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모든 사람이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뒷이야기가 있는데, 주인은 자기를 대신해 죽은 개를위해 봉분을 만들고 노래를 지었다. 하늘도 감복했는지 개의무덤에 꽂아 놓은 지팡이에서 잎이 났다. 이 일로 지명도 오수로 바뀌었다고 한다.임실에는 또 다른‘충성스러운 개’이야기가 전한다. 유각의처 남양홍씨는 혼인 후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자 자진하였다고 한다. 이때 기르던 개도 10여 일을 굶더니 따라 죽었다고한다. 이와 더불어 죽은 주인을 따라 죽은 충성스러운 말 이야기도 전한다.이처럼 임실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많은 충성스런 짐승들의 이야기가 전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다른 어느 곳보다충, 효, 열의 정신이 남달랐던 임실 사람들의 마음이 미물인 짐승에게 전해졌기 때문 아닐까?이 글을 읽고 임실의 자연, 임실 사람들, 그들의 정신을 느껴보고 싶다면, 9월 18일까지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전북의 역사문물전 10, 임실>을 찾아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