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8 |
[서평] 「사랑 때문이다- 요셉 조성만 평전」- 송기역 지음
관리자(2011-08-17 19:05:15)
너무나 사랑해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 고영서 시인
‘조성만’이라는 이름 석자를 떠올리면 흩어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되살아난다.고3의 교실. 웅성거리는 아이들, 그중에 누군가는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조간신문을 펼쳐들고 등교를 했을것이다. 누가 고문으로 죽었고 누가 최루탄에 맞았고, 열사니 의문사니 하는 단어를 내뱉을 때는 입시로 초조한가슴이 마구 뜀박질을 해댔다. 그 즈음일 거라 생각했다,조성만 열사가 투신하던 때가.어쩌면 내 기억은 박종철, 이한열, 조성만을 한데 묶어버릴 수가 있었을까.원고청탁을 받고 내내 먹먹하던 가슴은 책장을 넘기면서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1988년 5월. 나는 입학한지 얼마 안 되는 대학의 새내기였고, 다니던 학교에서 마음만 먹으면 걸을 수 있는 거리에 명동성당이 있었다.카생(카톨릭 학생회)에 가입한 단짝 친구를 따라 집회에 나섰다가 최루가스에 혼쭐이 나서 뒷걸음질하기 바빴던 스무 살, 그 가까이에 조성만 열사가 숨을 쉬고 있었다니 울컥, 하지 않을 수가 없다.1964년 전북 김제의 모산 마을에서 태어난 조성만은가톨릭 전주교구 산하 해성고에 진학한다. 그해 5.18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며 사회적 자아를 만났고, 중앙성당에서 만난 문정현 신부의 삶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때 가슴에 품은 신부의 꿈은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았다.한반도를 이득의 땅으로 여기는 미국에 대한 증오와분노는 군 생활 내내 그를 정신적 고통으로 밀어 넣었다. 미군의 역사를 공부하고 매일 미군군가를 부르는 곤혹스런 상황에서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몸은 비록 미군부대에 있지만 정신은 명동성당과한반도의 현실에 있었던 것이다.제대 후 복학을 포기하고 신부가 되려고 했으나,가족의 반대로 뜻을 미루게 된다.1987년이 저물어가던 12월 대선정국.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는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민주화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정부는 언론을 동원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극적인 드라마를 준비한다. 115명을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 추락!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의 모습은 전국에 생중계 되어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부추기면서‘노태우 당선’이라는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를 목격한 조성만은 투표함을 지키기 위해 구로구청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저항했다.며칠 뒤, 유치장에서 나온 그가 보는 세상은 모두어두컴컴했다. 미사를 보는 명동성당조차 햇빛이들지 않는 지하실이었다. 그는 세상의 지하실에 불을 켜고 싶었다(281P)죽음을 앞두고 쓴 일기에는 유독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다.사랑 때문이다. 내가 현재 존재하는 가장 큰 밑받침은 인간을 사랑하려는 못난 인간의 한 가닥 희망때문이다. 이 땅의 민중이 해방되고 이 땅의 허리가이어지고 이 땅에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한 알량한 희망, 사랑 때문이다. 나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소시민의 삶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인간의 삶을선택했던 조성만. 그가 꿈꾸는 세상은 물질의 논리가 아닌 사랑의 논리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바탕이 되는 사회였다.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인간의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다는 유서의 끄트머리에서 목이 메인다.그가 가고 난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트라우마를그는 알까.한 존재가 사라져버린다는 것. 그것이 무언지 잘은 모르지만 해가 저물면서 갑자기 빠른 속도로 캄캄해지는 것, 바로 인생이요, 하던 작가의 말.만날 수 없는 사람의 흔적을 되짚으며, 짧은 생애를‘신부’로 살았던 조성만 열사를 알게 된 시간.“무리 속으로 들어가라. 하늘나라가 거기에 있다.”예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마음이 산란해지면 혼자서 훌쩍 갔다 오기 좋은곳, 망월동에 가야겠다. 구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을지나치고도 꽃 한 송이 올려놓고 온 적이 없었구나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