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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8 |
임안자의 내가만난 한국영화 - 되돌아보는 부산국제영화제 1
관리자(2011-08-17 19:01:57)
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 부산에서 막 올리다 - 임안자 영화평론가 이번은 부산국제영화제에 관한 이야기다. 올해로 16회를 맞는 국내 최대의 부산영화제에 대해선 그간 대중매체나 영화전문지 등을 통해 한국사회에 충분히 알려져 있으리라 싶어새삼스럽게 뭘 특별히 덧붙여 쓸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외려부산영화제의 공식기록에 들어있지 않는 부분에 속한 내 개인이야기를 말하려한다. 그러니까 내가 1996년 부산영화제 설립이전에서부터 2003년 영화제를 그만둘 때까지 8년간 영화제 고문으로 일하면서 몸소 겪은 경험담을 이번 문화저널의지면을 빌어 처음으로 발표한다.나를 부산으로 이끌어준 사람은 현재 부산영화제의 수석프로그래머 김지석 교수였다. 그를 내가 처음 알게 된 건 1992년 페사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이 열릴 때였다. 그런뒤 1994년 내 개인 프로젝트‘독어권 한국영화 회고전’이 스위스에서 진행될 때 김 교수가 프로그램의 영화선정을 도와주면서부터 차츰 가까운 친지가 됐다. 여기에 덧붙일 말은 김 교수는 부산영화제 설립을 추진한 제일인자로서 그는 아시아 영화의 전문가이다. 그러기에 부산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의 중심으로 출발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풍부한 전문성과 경험이한몫했다.1996년 베를린영화제서 나는 김 교수를 다시 만났다. 그 무렵 나는 한국의 월간지 <영화예술>의 기자로 영화제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베를린 영포럼에서 동경의 카바키타 메모리얼영화원의 국제담당자 하야시 카나코(현재 동경필름엑스영화제 집행의원장)를 만나 영포럼 사무실의 휴게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리에 김 교수가 나타나 두 가지 희소식을 나에게 전해줬던 것이다. 하나는 부산에서 국제영화제가 열린 다는 것. 둘째는 내가 부산영화제의 고문으로 선택된 점이었다. 그렇잖아도 언젠가부터 한국에도 근사한 영화제가 하나 생겼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터라 나는부산영화제의 설립 소식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는데 부산영화제 참여할 수 있다니! 내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렇다면 내가 뭘 도와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는데 김 교수가“부산 시내 남포동의 극장가와 해운대의 수영만 요트경기장을 야외상영 장소로 쓸예정”이라는 정보를 주었다. 수영만의 야외상영에 대한 말을듣는 순간 나는 얼른 피아짜 그란데의 야외상영장을 떠올렸다.피아짜 그란데는 1971년에 세계에서 가장 큰 화면(26×14 미터)을 설치하여 관객모집에 크게 성공한 로카르노영화제의 유명한 노천상영장의 이름이며 동시에 어마어마한 대형화면을 통해 영화를 보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영화제 때면 저녁마다 8천여 명의 관객이 모여드는 환상적인 영화의축제장이다. 그래서 나는 김 교수에게 피아짜 그란데의 성공담을 들려주면서‘피아짜 그란데의 대형화면을 수영만의 광장에 갖다 놓을 수만 있다면 관객은 저절로 모일 것’이라고과감히 내 의견을 덧붙여 말했다.그리고 한 달쯤 지나서 부산영화제로부터 피아짜 그란데의 대형화면에 대한 정보를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곧바로 로카르노영화제에 전화를 했으나 그 쪽 말은“스크린은 다른 영화제에 빌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됐지만, 로카르노영화제의 유명한 대형자막은 스위스 건축가인 베키오의 창작품으로서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그걸 내가 몰라서 실수를 했던 것이다. 어쨌든 몇 날을 수소문한 끝에 아는 친구의 도움으로 츄리히에서 대형화면의 전문회사‘시네렌트 오픈에어’를 찾아내고는 바로 부산영화제와 연결시켰다. 부산영화제와 관련된 내 첫 작업은 그렇게 시작됐으며, 수영만의 야외상영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어진다.베를린 다음으로 5월에 나는‘부산영화제의 사람’으로 칸영화제에 참석했다. 칸에 도착하던 날 김동호 집행위원장님을 우리가 머무는 호텔에서 만났는데 5년 만의 재회인 셈이었다. 5년 전에 김 위원장님은 영화진흥공사의 사장이셨고그 시기에 나는 영진공에서 페사로영화제의 아드리아노 아푸라 집행위원장을 도와주고 있던 중에 아푸라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만찬에서 위원장님을 처음 만났다. 그 뒤 소식을모르고 지나다가 칸에서 다시 만난 데다 위원장님과 부산영화제서 같이 일할 기회가 주어져 기뻤다.영화제 고문 또는 훼스티발 애드바이저로서 칸에서 내가할 일은 주로 부산영화제에서 쓸 만한 영화를 찾아보는 것이었으나 도착 첫 날에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다른 급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위원장님은 부산영화제를 위한홍보 차원에서 이틀 뒤에 유럽영화계의 귀빈들을 점심식사에 초청할 계획이었다. 그에 따라 나는 음식점을 고르고 초청자들의 명단을 짜서 전달해야 했는데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칸영화제의 거리는 1994년‘황금카메라’의 심사위원때 한번 다녀갔기 때문에 대충 알고 있었으나 내 돈으로 음식을 사먹은 적이 없어서 적당한 음식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나는 생각다 못해 다음날 아침에‘황금카메라’의 사무실로갔다. 그리고 거기서 2년 전에 심사위원들을 운전해주던 아저씨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 그는 나를 보자 아주 반가워하며 곧장 나를 차에 태우고 시중의 좁은 골목길에 있는“여행객은 모르는 싸고 맛있는”자그마한 음식점으로 데려다줬다.그날 위원장님은 동아일보 여기자와 이무상 영진공의 해외담당자 그리고 나와 함께 어제 찾은 음식점에서 시식 겸점심을 했는데“싸고 좋다”고 칭찬을 했다. 점심 다음에 나는부산영화제에서 온 최윤나(나중에 영화자막팀장이 됨)와 함께 영화제 본부에 가서 귀빈들의 이름과 이들이 머무는 호텔이 기록된 종이를 받아가지고 호텔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빨리 끝내고는 바로 일에 들어갔다. 초청 명단에는 위원장님과내가 아는 유럽지역의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11명과 평론과 언론의 유명 인사 5명이 올라있었다. 그중 일부는 전화로연락이 됐지만 대부분은 팩스로 전하든가 팩스가 되지 않을땐 새벽 2시까지 호텔로 직접 찾아가 방마다 초청장을 밀어넣었다.그리고 다음 날 음식점으로 갔다. 놀랍게도 늦은 초청이었음에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참석했다. 베를린의 더 하델른 부부, 영포럼의 그레고 부부, 낭트의 잘라도 형제, 토리노의 알베르토 바베라, 카를로비 바리의 에바 자오라로바, 로테르담의 사이몬 필드, 프리부룩의 마르시알 크네벨, 아미앙의 장 피에르 가르시아 집행위원장들에다가 뮌헨영화제 집행원장이며 국제평론협회의 사무국장인 클라우스 에더, 칸영화제의 아시아영화 선정위원 막스 테시에르, 칸영화제의동양영화 전문가 피에르 루시앙, 프랑스의 권위지 <카이에듀 시네마> 편집장 미쉘 푸르동 그리고 헐리우드의 버라이티 기자(이름을 기억할 수 없음)등 평론과 언론계의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점을 가득 채웠다.점심식사가 끝나고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 김동호위원장님의 부산영화제에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참석자 대부분은 새로운 소식에 귀가 솔깃한 듯상당히 관심을 보였으나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사람도 몇몇 있었다. 그가운데 나와 친하게 지내는 에더도 부산영화제 설립에 비판적이었다. 그는내 옆으로 오더니 독일말로“이제 막 생겨나는 부산영화제가 어떻게 오랜전통을 가진 동경과 홍콩영화제들을 제치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느냐? 살아남지 못 한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나는 에더가 1990년 뮌헨영화제서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을 주최하여 성공을 거둠으로 한국영화와 남다른 인연을 맺은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가 부정적으로 나오리라고는 미처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동경과 홍콩의 두 영화제가 처해있는심각한 현실 문제를 그가 간과한 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동양의 유일한 A급 영화제인 동경영화제는‘수준 미달’때문에 오래전부터 비평을 받아왔던 데다, 90년대 중반에 불거진 심사위원의 부정사건으로 국제영화제로서의 신임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홍콩영화제 또한 1997년 홍콩이 본토에 반환될 예정이어서 정치적으로 아주 불안정한 상황에 부딪쳐 앞날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이 두 영화제의 상황을감안하면 부산영화제의 설립이야말로 시기적으로 적절했을뿐만 아니라 동양지역 영화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산영화제에 대한 비판적인견해도 부산영화제의 성공으로 곧 사라지고 말았다. 어쨌든김 위원장님은 1997년 칸영화제의 방문을 계기로 내가 동반한 자리에서 에더와 만나 부산영화제에 국제평론협회의 수상제를 두는데 합의를 봤고, 칸의 모임을 바탕으로 부산영화제는 제2회 때부터 국제평론협회 수상 제도를 갖추게 됐다. 부산영화제 탄생의 영화사적 의미 1996년은 한국영화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탄생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도 국제 성격을 띤세 개 영화제가 해마다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다. 1993년부터 삼성영상사업단이 주최하던‘서울단편영화제’(6월호 참고)와 1995년에 시작한 CATV 채널의‘서울다큐멘터리영화제’그리고‘독립영화제작집단 인디라인’의‘서울국제독립영화제’였다. 그러나 이들은 재벌의 재단이나 사립 방송국또는 특수 영화집단에 딸린 특별 분야의 영화제로서 한국의영화계를 대표하기엔 역부족이었다.그에 비해 부산영화제는 중앙정부와 부산광역시의 경제적지원과 문화체육부와 영화진흥공사 그리고 영상자료원의 후원으로 세워졌으며, 그 뿐만 아니라 7개 부문의 프로그램과동남아시아 영화시장의 확대 가능성 등 국제영화제에 딸리는 여러 가지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출발했다는 점에서 단연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로 불릴만했다.부산영화제는 앞에서도 말했듯 홍콩과 동경의 영화제들이기울어져가는 시기에 태어남으로 시대적 행운도 좋았거니와과거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과 문화부 차관을 지낸 김동호집행위원장님의 풍부한 행정직의 경험에 힘입어 일찍이 국가기관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인 조직체가 됨으로국내 각 지역의 크고 작은 국제영화제들에게 좋은 지표가 됐다. 예를 들어서 90년대 중반까지 법적으로 수입이 금지돼있던 일본영화들이 부산영화제서 최초로 상영될 수 있었던데는 정부의 행정 구조를 환히 알고 있는 김동호 위원장님의노련한 타협기술이 한몫했다. 그 일로 정부는“일본영화 상영은 영화제의 상영장에서만 사용된다”는 조건을 앞세워 특별법을 만들었고 이때부터 국내의 모든 영화제는 일본영화를 자유롭게 상영 할 수 있게 됐다.역사적인 부산영화제의 첫 개막식은 9월 13일 오후 6시수영만 요트경기장 안의 야외상영장 무대에서 열렸다. 문정수 조직위원장의 개막선언이 끝남과 함께 무대 뒤에서는 스위스에서 들여온 시네렌트 회사의 대형화면이 서서히 푸른밤하늘을 향해 펼쳐졌다. 그리고 수영만의 야외상영장은 5천명 관객이 모여들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있었고 표를살 수가 없어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하늘높이 오르던 대형자막이 드디어 활짝 펼쳐지자 찬란한 불꽃놀이가 하늘을 덮었고 같은 시간에 객석에서는 오하! 하는감탄과 박수가 터졌다. 피아짜 그란데에 못지않게 수영만의광장은 아름다웠고 관객의 열기 또한 펄펄 끓듯 뜨거웠다.이날부터 수영만의 요트경기장은 국내외 스타들이 즐겨 오르는 인기의 무대가 됐다.수영만의 대형화면에 대해 정확성을 위해 한마디 덧붙이는데, 씨네21(제63호)은“화면의 크기는 33×18 미터 그리고 재료는 로카르노에서 직수입됐다”라고 썼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수영만의 화면은 로카르노영화제의 것보다 작은24.9×13.8 미터의 크기였으며 스크린 재료는 시네렌트 회사의 제작품이었다. 아무튼 제1회부터 15년간 수영만 야외상영장의‘신화’(?)를 낳는데 절대적 기여를 했던 시네렌트는 2011년 부산영화제의 장소 변화로 2010년에 작업을 끝마쳤다. 최근 김지석 수석 프로그램머가 보낸 정보에 따르면부산영화제는 올 16회를 맞아 새로 건축된 부산영상센터의“영화의 전당”(별칭 두레라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며 그에따라 영화상영의 장소들이 바뀔 예정이다.이야기가 좀 빗나갔는데, 나는 부산일보로부터 부산영화제 첫 개막식에 대한 소감을 서달라는 주문을 받고 글을 쓴바 있다.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경제 발전에 발맞추어 한국에서도 미술 음악 무용 인형극 분야의 축제가 속속 생겨나고 있는 시점에서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제 시대의 요구라고 본다. 여태껏 우리의 영화는 세계영화계에 단 한 번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진출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서구의 영화제에 의해 선택되어지고 그들에 의해 평가를 받아왔다...그런 시점에서 부산영화제를 훌륭히 치러낸다면 그것은 뛰어난 한국영화를 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국제무대에 내놓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아울러 이제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시각으로 해외의 영화를 평가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부산일보 9월 13일자의‘전문가 기고’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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