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8 |
신귀백 영화엿보기 - 주말의 영화에서 만난 두고 온 여인, <러브스토리>
관리자(2011-08-17 19:01:20)
주말의 영화에서 만난 두고 온 여인, <러브스토리>
눈밭의 그녀, 알리 맥그로우
(前略)…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後略)-윤동주「별 헤는 밤」부분-
어찌 윤동주에게만 패, 경, 옥 같은 이국 소녀들이 있을 것인가? 내게도 숙(淑), 미(美), 란(蘭)이 있었을 것이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못해도 인디오의 피가 섞여있는 알리 맥그로우라는 이국처녀 이야기는 할 수 있겠다. 물론 저 위 쪽에는오드리 햅번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클래식한 여신이 자리하겠지만, 이 정도 여자는 공들이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심하듯 올려다보는 맑은 눈 위의 진한 눈썹, 검고 윤이나는 긴 생머리, 길고 날씬한 다리,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그런 모던한 여자. <러브 스토리>의 알리 맥그로우는 대학에 가면 만날 수 있을 여인으로 생각했었다.에릭 시걸의 소설 원작『러브 스토리』를 읽고“러브 미인스 나레버 해빙 투 세이 유어 소리”를 외우고 다녔지만, 캠퍼스 잔디밭에는 전경들이 족구를 하고 있었고 여학생들은 머리만 알리 맥그로우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별로 닮지도 않은 처자와 연애를 하면서 편지를 썼고 누군가에게는‘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는 말을 써 먹은 적이있을 것이다. 그후, 선악을 넘어 거친 총 솜씨를 보여준 스티브 맥퀸과 주연한 <겟터웨이>를 끝으로 알리 맥그로우 그녀를 잊어갔다.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서 그들의 결혼보다도그 뒤에 참머리를 한 올리비아 핫세가 있어 주었고 진추하그리고 저 멀리 심은하까지. 편지를 썼던 여인과 헤어지고나서는 나는 일기를 썼다.눈과 함께 하던 음악들을 기억한다. <닥터 지바고>의 라라송, 통브 라 네즈(Tombe La Neige)를 좀 끈적하게 번역열창한 루비나의‘눈이 나리네’도 있었지만, 눈밭에 뒹구는알리 맥그로우와 라이언 오닐의 스노우 플로릭(snow flolic)을 지울 수 없다. <남과 여>를 작곡한 프란시스 레이가 만든, 낮은 음의 피아노를 빠르게 두드리는, ‘웨어 두 아이 비긴(Where Do I Begin)’을 자주 들었지만 현실은 눈 내리는겨울만큼 추웠다. 아니 청춘의 날들은 매일 얼음이었고, 눈내리는 날 나는 선을 보러 다방에 나갔다. 눈밭에서의 키스신이 압권이던 <러브 스토리>의 그녀는 곧 이와이순지와 <러브 레터> 속 눈 장면으로 완전히 잊혀졌다.
영화 <러브 스토리>
“스물다섯에 죽은 한 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름답고 총명했으며 모차르트와 바흐, 비틀즈를 사랑했고그리고 저를 사랑했습니다.”기형도의 시처럼, ‘사랑을 잃고나는 쓰네’의 청년 올리버(라이언 오닐)가 나직이 읊조리는독백으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이 남자가 사랑한 제니(알리맥그로우)는 가난한 집 딸이지만 판탈롱을 입어도 아름답고스코틀랜드 체크무니의 빨간 치마에 빨간 스타킹을 걸치면섹시했다. 그리고 베이지색 코트의 그녀는 모자를 써도 예쁘고 모자를 벗으면 검은 생머리가 눈부셨다. 이들은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 만나 운명적 사랑을 시작하는데.아이스하키 장면이 끝나자 캠퍼스를 거니는 선남선녀.우와! 신들의 세계는 그런 것인가? 이 두 분 좁은 소파에 서로 엉켜 책을 보신다. 요즘말로 하면 낭만간지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파리로 유학을 가려는 제니와 안 된다며 결혼을 우기는 올리버는 은행가로 부자를 넘어 부호인 아버지 집으로향한다. 클래식한 자동차를 타고 남자친구의 장원에 들어서는 알리 맥그로우의 표정이 불안하다.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엇나가기만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와 의절한 부잣집 철없는 아들은 알바를 뛰며 그녀와의 사랑을 이어간다. 제니를 향한 올리버의 마음은 깊어다른 영화 속 사련(邪戀) 같은 삼각관계가 어디 들어갈 틈도없다. 이러한 주인공 둘을 두고 트랙을 360°돌리는 촬영장면은 올드하지만‘우 우 우, 우’하는 메인 OST 장면의 스노우 플로릭(눈싸움)그림은 귀여운 전설이다.가톨릭에 이태리 이민 가정의 제과점 딸내미 제니는 경제적 신분의 벽을 넘어 스스로 결혼을 선택, 하버드 구내 교회에서 그들만의 결혼식을 치른다. 사랑을 선택하고 쟁취한 이들이 주례사보다는 자신의 사랑을 선언하는 방식은 새로웠다. 부모를 버린 덕에 무일푼이 되었지만 컨버터블 자동차를타고 하얀 면티에 면바지를 입은 채 부자의 요트를 고치며기름밥 먹는 알바 같은 리얼리티의 부족은 말하지 말자.올리버는 좋은 성적으로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가가 되어 맨션으로 이사하게 된다. 새로운 집이 생길 때마다 마님을 문 앞까지 안고 가는 장면은 7080 여학생들의 로망이 되었을 터. 그러나 행복은 짧고 불행은 길어, 신부에게 건강의이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제니에게 혈액암이라는 불치병이 찾아온 것. 그러나 힘 좋은 신랑도 착한 아내도 울고 짜지 않는다. 힘든 상황을 두고 농담을 할 줄 아는 여유. 아니슬퍼도 울거나 꺼이꺼이 소리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원작 아니면 감독이 배우를 무릎 아래 누른 것이리라.고수머리에 우수 젖은 눈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끝까지 챙기는 책임감 넘치는 남자 올리버는 파리행 티켓을 끊어오지만 제니는 담담히 죽음을 맞기로 한다. “모차르트의 작품 번호를 모두 외웠는데, 이거 아무나 못하는 건데…”계속 음악이야기만 할 거냐는 올리버의 낙담에 제니는, “그러면 장례식 이야기를 할까?”라고 위로의 응답을 하는데.올리버는 아내의 죽음을 앞두고서“나 부잣집 아들이다,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다”고 의사에게 큰소리를 치고는완고한 아버지를 찾아간다. 아버지에게 수표를 빌려오지만의사는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가서 쉬란다. 영원히 쉬라는 말일 터인데. 아빠와 회전문에서 엇갈리며 만난 아들은 소외를나타내는 촬영 기법 그대로 언 눈길을 걸으며 영화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노스텔지어 상품 7080
2011년 7월 24일 새벽 한시, KBS 주말의 영화에서는 <러브 스토리>를 방영하고 있었다. 세시봉에이어‘나는 가수다’의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들, 또고등학교 레전드 야구까지노스텔지어의 상품이 넘쳐난다.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은퇴의 불안을 잊으라는 제스처일까? 이건 뭐은퇴예비자들을 위로하는종합선물세트 같았다. 스포츠 타월이 아닌 집 수건을 두른 김성한을 비롯한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레전드들은 웃고 즐겼지만,58년 개띠 최동원은 목에주름 깊은 수척한 얼굴로, 가슴쓰린 감정의 눈사태를 보여주었다.거참, 텔레비전 영화 속 알리 맥그로우의 앞니 한쪽이 안으로 기운 것이 보였다. 또 죽음을 앞둔 연인간의 운명적 사랑보다는 올리버와 그의 아버지가 벌이는 세대간의 갈등과신분에 따른 계급성까지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은행가도 못되면서 사사건건 권유를 가장한 명령을 하는 머리 빠진 올리버의 아버지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근데, 클로즈업만으로도기막힌 화면이 되던 알리 맥그로우와 라이언 오닐의 얼굴이새겨진 LP 백판은 어디 갔을까?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며 그 아름다움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이병률의「무늬들」전문-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사랑을 다룬 <러브 스토리>를 요약하면, 신파다.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와 거의 같은 수준일 것.하여, 오직 스노우 플로릭으로만 기억할 요새 젊은 것들에게는 거미줄 친 최루성 사랑이야기로 진부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래, 너희들이「접시꽃 당신」도 모를 터인데 명작이라고우기진 않겠다. 그러나 신파를 뛰어넘는 그리움 같은 것이있다는 것을, 니들이 그녀를 알아?눈을 던지며 장난할 때는 때 묻지 않은 청년이지만 귀족같은 얼굴에 반항의 피가 흐르는 오닐도 이제 70대 영감님이 되셨다. 알리 맥그로우의 최근 사진에 대해서는 말해 무삼하랴? 얼마 전 에릭 시걸에 대해 굉장한 호의를 보이는 하루키의 수필을 읽은 적이 있다. 『닥터스』『하버드의 공부벌레들』의 작가 에릭 시걸이 작년에 세상을 떴다는 부음 이후로 이제 그의 빈자리는 하루키가 채워주고 있을 터.몇 년 전 전주국제영화제 때, 1978년에 개봉된‘폭력의피카소’라 불리는 샘 페킨파 감독의 <겟터웨이>에서‘우리의 그녀’알리 맥그로우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폭력의 유쾌함과 시원한 영상 거기다 해피엔딩에 우리는 제법 고무됐었다. 지금은 필름이 멈춘 아카데미 아트홀을 나와 영화의 거리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친구들은 영화 <졸업>과 방황하던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를 이야기했었다.예비고사를 치른, 전두환 폭정의 갸륵한 시간을 보낸 우리세대를 베이비부머라는 사회학적 언어로 정의한다. 문화적유사성 때문에 붙인 말이라 해도‘아기 폭탄’이라니? 참으로싸가지 없는 말이렷다. 영화가 끝난 후, 스노우 플로릭 OST가 듣고 싶어 아기 폭탄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보았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등산복 입고 찍은 사진에 눈이내리는 효과까지 제법이다. 아니 애썼다. 그래! 그대들과 같이 들었던 팝 음악, 최루탄에 흘린 눈물들이 어제 같이 생생하다.친구들아! 우리는 아버지의 성화에도 꿋꿋이 흑백텔레비전으로 주말의 명화를 보았고 트랜지스터로 열심히 팝음악을 들었다. 그러니 알리 맥그로우도 모르는, 킹크림슨도 들을 줄 모르는, 집보다 차를 먼저 사는, 결혼한다고 아비에게손 벌리는, 어린 것들에게 치이지 말자. 우리는 <정무문>을지나 <영웅본색>에서 <와호장룡>까지 경험한 세대이니, 힘내자. 우린 이제 대부(代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