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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8 |
꿈꾸는 노년 - 박완서의「촛불 밝힌 식탁」
관리자(2011-08-17 18:59:52)
노부모와 자식의 동상이몽 - 장미영 전주대학교 교수 노인의 삶, 노인의 자리 ‘촛불 밝힌 식탁’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사랑이 넘치는 연인들처럼 그윽한 눈길이 오가고 따뜻한 대화가 넘실거리는 오붓한 정경 말이다.그런데 소설가 박완서가 전하는「촛불 밝힌 식탁」은 억장이무너지는 씁쓸한 식탁이다. 그것은 노부모를 거부하는 자식 집안의 불편한 식탁이면서 동시에 자식으로부터 외면당한 노부모의 서글픈 식탁이기 때문이다.젊은 부부는 자신들끼리만 자족할 수 있는‘촛불 밝힌 식탁’을 노부모 몰래 은밀하게 차렸다. 그런데 또 다른 편에서 펼쳐지는 광경은‘집 안의 전깃불을 다 끄고, 귀여운 인형처럼 소년·소녀가 마주 보고 생긋 웃는 형상의 아름다운 양초 한 쌍을밝힌’노부부의 식탁이다. 그것은 젊은 부부의 낭만적 취향이라거나 노부부의 로맨스 그레이(romance grey)라고 할 수 없는것이었다. 젊은 부부에게 있어‘촛불 밝힌 식탁’은 노부모의 방문을 피하기 위해,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몰래 저녁을 먹으려는발칙한 심사가 발동된 메마른 식탁이었고, 노부부에게 그것은뒤늦게 자식으로부터의 소외를 알아차린 후, 서글픔과 분노로뒤범벅이 된 가슴앓이를 달래는 위무의 식탁이었다.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 2005년에 발표된 단편, 「촛불 밝힌 식탁」은 이미 문단의 거목으로 자리매김 된 박완서 외, 여성동아 장편소설 당선자들의모임인‘여성동아 문우회’소속 작가 17명이‘가족’을 소재로쓴 단편소설집『촛불 밝힌 식탁』에 실린 작품이다. 이 작품집은일상의 행복을 꿈꾸는 보통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상실의시대’라 일컬어지는 21세기에 가족은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의미를 갖는지를 가족 갈등을 통해 조명해냈다.2008년에 출간된 박완서 소설집『친절한 복희씨』에 재수록된「촛불 밝힌 식탁」은 작가가‘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중 하나다. 주로 노인들의 삶을 다룬『친절한 복희씨』의 말미에 작가는 이러한 글들을 한 권의 소설집으로 묶은자신에대해변명아닌변명을한다.‘ 웃을일이없어서내가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며‘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아마 추측컨대,노인이 된 작가의 입장에서 노인을 씁쓸하게 만드는 세태를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이 노인 스스로를 옹호하는 듯하여 못내 쑥스러웠나 싶다.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아니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만 있을 뿐정확하게 분간하기 어려운, 어색한 가족 간의 마음 속 갈등을박완서만큼 생동감 있게 그려내기는 쉽지 않다. 냉혹한 현실에대해 조금도 가린 것 없이 솔직하게 그려냈다고 느껴지는 소설속 노인의 마음 고백은 굳이 노인이 아니어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여실하여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전개와 결말이역동적이지 않다하더라도 오래 묵은 약술처럼 삶에 대한 성찰을 묵직하게 만드는 박완서의 필력은 노인 문제에서도 여지없이 그 진가를 발한다. 인사치레로 대신하는 노인 부양의 실체 노인 문제로 치부되는 세대 갈등은 육친애로 맺어진 부모-자식 간에도 넘지 않아야 하는 선이 있다는 것을 서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결혼한 아들과 함께 살고 싶었던노부부는 그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자, 창문에 불이 켜져 있는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를 두고 따로 아파트를얻는다. 왕래가 뜸할 때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노부부가 청국장이다, 눌은밥이다 하여 아들이 좋아하던 옛 음식을 해 나르는 빈도가 점점 잦아지면서 급기야 일이 터지고 만다.자식이 그리워 수시로 아들네를 찾아가던 노부부는 굳게 잠긴 현관문만 확인한 채 허탕 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창문에 불이 켜져 있을 때만 아들네 집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은 노부부는어느 순간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알게 된다. 언제부터인지 아들네의 집 꺼진 창은 딴 집의 불 꺼진 창하고는 달랐던 것이다. 불빛이 있기는 한데, 이상하게 어두웠고, 칠흑이 아니라모닥불의 잔광 같은 불확실한 밝음이 창 안 깊은 데서 일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온 것이다. 주인공인‘나’는 확인차 아들 집의 문을 두드렸으나, 집안에 누가 있는 것 같은데 벨소리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에도 감시하는 마음으로 지켜본다는 건 안 좋은 일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아들네의 불 꺼진 창이딴 집의 불 꺼진 창하고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칠흑이아니라 모닥불의 잔광 같은 불확실한 밝음이 깊은 데서 일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왔다. 휴전 음식을 더욱 분위기 있게 만드는 아름다운 양초가 켜진 식탁이 떠올랐다. 그 식탁에손자들도 함께 하고 있는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중략)…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나는 느낌으로 안에서웅성대는 인기척과 현관문에 달린 동그란 렌즈가 비정한 외눈으로 변하는 걸 알았다. - 박완서, 「촛불 밝힌 식탁」, 195면 위 내용은 아들 내외의 외면을 직감하고‘그쯤해서 조용히물러나려고’뒤돌아서는 늙은 아버지의 배신감과 쓸쓸함이 손에 잡힐 듯 살을 타고 전해지면서 전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노부모의 충격과 슬픔은 무엇으로 위로 받을 수 있는가. 굳이 효자, 효녀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가슴에 와 콕 박히게 하는그것, 콧날을 시큰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노작가 박완서를 새삼 우러러보게 한다. 노부모와 자식의 상호 몰이해 표제 작품인「촛불 밝힌 식탁」은 시골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한 노부부를 중심으로‘가족’의 의미와 가치관의 변화를짚어냈다.이전 시대에‘가족’이란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로서‘식구’와 동일한 개념이었다.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먹여 살리고책임지는 상호 부양 관계였던 것이다. 소설 속 노부부는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유난스러웠던 홀시어머니를 지성껏 모셨다.늙은 아들이 기억하는 자신의 어머니는‘푼돈도 어려웠던시절에 아낌없이 돈을 들여 절에 가지고 갈 초를 사서’부처님께 자신의 수명장수를 빌러 다니던 자애로운 분이다. 아내또한 자신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고아들의 입맛을 챙기면서 자식을 끝없이 사랑하는 자애로운어머니다. 더 나아가 이들 노부부는 평생을 근검절약하여 일군 귀한 재산을 아들 내외와 같이 누리고 싶어 하면서도 자식에게폐가될것을걱정하는이른바,‘ 경우바른부모’이기까지 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늙은 부모가 자식들에게 얼마나 거추장스런 존재로 전락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굳이 첨단을 가게 변하지 않아도 세태 변화는 부모-자식 간 세대 갈등을 낳기에 충분하다. 아들네 집에 처음 초대받을 때만 해도 아들네 식탁의 깔끔하고 장식적이고 국적 불명의 퓨전 요리를 신기해서 하나하나 맛보면서 그 요리법까지 묻던 마누라가 차츰 시들해하더니 나중에는 집에 와서 김치 국물로 입가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손자들이야 그 맛밖에 모르고 자랐으니까 할 수 없다손 쳐도 내 새끼 불쌍해서 어쩌나 탄식을 하곤 했다. - 박완서, 「촛불 밝힌 식탁」, 193면 노인인‘나’의 입장에서 보면,‘ 한달에 한 두번은 꼭꼭 노부모를 초대해서 손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같이하도록 했’던 아들 내외의 예의바른 처사는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노부모의 동거 욕망을 잠재우기 위한 제스처이자 식사 한 끼로부모 봉양을 갈음하려는 면피용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는 영악한 짓이었다. 그런데 젊은 부부의 입장에서는 그만하면 자식으로서의 도리는 지킨 것이었다.‘수프가 식지 않는 거리’는커녕‘자식이 부모 집의 불빛을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사는 것만으로도 효자나 효부로 칭송될만하다는 주인공 친구들의 자조어린 호들갑은 노인들의 뿌리 깊은 열패감의 발로다. 그 열패감은사람다운 삶에 대한 갈망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이와 같이 윤리적 잣대를 어느 한 편에 치우치게 들이대지않으면서, 부모-자식 양 세대의 입장을 거침없이 언급하는작가의 당당함은 균형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소한 일상에까지 도덕적 성찰을 요구한다. 부모의 도리, 자식의 도리란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등등.어느 세대건 간에 절실하면서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이러한 철학적 의문은 은밀하게 진행되는 인간의 편협한 이기심과 허위의식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만다.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아들 내외의 촛불 밝힌 식탁은 비애를 느끼게 하는 노부모의 촛불 밝힌 식탁과 대조를 이루며 인생의 아이러니를 짚어내는 작가 특유의 서사적 재치로 다가온다.평범한 사람들의 속악한 삶은‘효’니‘자애’니 하는 허울뿐인 관념을 무색하게 만든다. 남는 것은 오직 잡다한 욕망들이 빚어내는 인생의 무게일 뿐이다. 여기서 작가는,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소시민적 독자들에게 젊음과 늙음을 넘어서는 삶의 섭리에 대해 겸허한 각성을 기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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