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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8 |
[기획특집] 배움이 있는 여행 2
관리자(2011-08-17 18:56:54)
이성계의 뜻, 조선을 지킨 힘의 여정 연일 계속되는 빗속에 주어진 숙제도 풀 겸해서 길을 나섰다. 주말이면 어딘가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딸아이와 함께 카메라 하나 들고 나선 길이다. 배움이 있는 여행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긴 한데 유명한 관광지는 피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틈새를 찾아야 했다. 전라도 땅은 어떤곳일까? 흔히들 전라도를 패배자의 땅이라 말하기도 하고, 배반ㆍ변혁의땅을 거론하기도 한다. 부정적 이미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전라도땅은 500년 조선의 역사를 지탱한 중심의 땅이다. 조선왕조에게는 모태와 같은 곳이고 임진ㆍ정유왜란 때에는 조선을 지켜낸 힘의 근원이기도했다. ‘변혁’이나‘개혁’의 이미지에 묻혀 버렸지만 이 땅 전라도가 가진긍정의 힘을 찾아나서 보자.“목자(木子, 李)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三韓)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진안읍 방면에서 마이산을 넘어들면 1380년 운봉 황산벌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상경하는 길에 마이산에 들렀을 때 자신이 꿈속에서 금척(金尺)을받았단 곳과 흡사해 마이산이 조선건국의 천명지 임을 강조한 이야기가전해지는 은수사를 만나게 된다. 은수사에는 태극전을 지어 몽금척도(夢金尺圖)와 금척, 몽금척무 복원품과 족자가 전시되어 있다. 마이산을 속금산(束金山)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국운은 하늘과 땅처럼 무궁하고 민족의 장래는 해와 달처럼 밝다” 마이산을 넘어 남쪽 주차장 입구에 위치한 이산묘 마이동 천에 주필대(駐?臺)라 새겨 놓은 것 역시 이성계가 이곳에서말을 메고 머물렀기 때문이다. 주필은 임금이 잠시 머무르거나 묵는 것을 말한다. 오목대에‘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 비석을 세워 놓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마이산에 가려 이산묘는관광객들의 눈에서 벗어나 있으니 이산묘 일대는 1907년 임실을 비롯한 순창, 장수, 남원, 곡성, 함양 등지의 의병들이모여 창의고천제를 지낸 호남의병 창의동맹단 결성지이다.창의(倡義)는 고종 황제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非禮勿動“) 한 뜻에 부응한 것이다. 고종황제의 현판은 현재 이산묘에 걸려 있다. 주필대 맞은편 은선골 암벽에는 1946년 백범 김구 선생이 조선개국 이래 충신과 유림 40위, 구한말 을사늑약 이후 충신, 열사 34위를 모신 이산묘이 건립에 찬동하여 보낸 ’대한건곤 청구일원(大韓乾坤靑丘日月‘)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마이산을 나와 마령면, 백운면을 거쳐 30번 국도를 타고달리다 평지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여 오봉마을쪽을 향하다보면 오른쪽으로 소충사가 위치해 있다. 소충사는 정재 이석용의병장과 휘하 28의사를 배향한 사당이다. 이석용은 1907년 9월 12일 마이산 용바위에서‘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한 의병장으로 1909년 3월 의병들을 해산할 때까지 진안,임실, 남원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1911년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壇團‘) 을 조직하여 일본 천황 암살계획을세우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1912년 10월 체포되어 1914년 4월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소충사를 나와 평지삼거리에서 성수면 삼봉리쪽으로 10여분을 차로 오르다 보면 삼양저수지 끝에 위치한 마을에 이르게 된다. 저수지 끝이 보일 때쯤 왼쪽으로 길이 굽어 돌기 전에 전면에 커다란느티나무가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느티나무 앞을 거쳐마을 속으로 2백여 미터를 들어가면 아담한 초가 한 채가 나오게 된다. 소충사 사당에서 북으로 2.7km 떨어진 이곳이이석용장군의 생가이다. 10여 집 정도 마을을 이루고 있는참으로 궁벽한 곳이다. 관음의 계시를 받아 나라를 세우다 빗줄기가 점점 심해지고 있지만, 성수면에 와서 꼭 들리지않을 수 없는 곳은 상이암(上耳庵)이다. 이석용 생가에서 30번 국도로 나와 1.5km정도를 진안 방면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성수산자연휴양림 표말이 나타난다. 성수산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면 휴양림 끝 숙소동에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난1차로 시멘트길이 나타난다. 상이암이라는 표지판이 없어 놓칠 수 있지만 이 길을 따라 2km남짓 계곡을 따라 오르면 상이암이 위치해 있다. 길이 좁아서 자칫 내려오는 차라도 만나면 교차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한참을 헤매야 하는 곳이다.운전이 미숙한 사람들은 꼭 성수산자연휴양림에 주차하고 걸어 올라야 한다. 상이함에 오르는 길은 햇빛을 받지 않는 천예의 숲길이다.상이암은 신라 헌강왕 1년(875)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전해지지만, 1958년 중건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중창한 소담한 절이다. 「상이암사적기」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성수산에르러 8명의 성인이 나올 산이라 하여 팔공산이라 했다고한다. 상이암은 특히 고려와 조선을 건국한 두 명의 태조 즉왕건과 이성계가 치성을 드린 곳으로 전해진다. 태조 왕건이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 던 중 관음의 계시를 얻어 기쁨을감추지 못해 환희담(歡喜潭)이라 글을 새겼다고 하며, 태조이성계 역시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감응이 없다가 3일을 더 기도 드리면서 계곡물에 목욕재계를 하자 관음보살의 계시를 얻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삼청동(三淸洞)’이라는 비석을세웠다고 한다. 비석은 어필각안에 놓여 있으며, 비각 옆에는 1922년에 세운 조선 태조고황제 어필 삼청동 비각 중수비가 있다. 용천(龍泉), 충국과 저항의 터 성수면을 나와 오수를 거쳐 남원에 이르면 서남대학교를 지나 전라북도공무원연수원 방면으로 가면 교룡산성에 이르는 길이 나온다. 남원은 춘향이의 고장으로 유명하지만 남원의 역사 속에는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를 빼 놓을 수 없다. 교룡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주둔지였으며,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김개남의 농민군이 주둔한 역사의장이기도 하다. 산성안에 있는 선국사에는 승병들이 사용한 구리도장이 남아 있다. 교룡산성은 일본의 침략에 맞선 충국의 터이자 지배자의 억압에 대항한 저항의 터인 것이다. 교룡산성은 산성내 산책로와 둘레길이 마련되어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않는 곳인데다가 연일 내린 비로 풀이 우거져 있기는 하지만 호젓하게 산성길을 둘러보는 맛은 일품이다. 차량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교룡산성에서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된 만복사지로 내려 갈 수도있다. 교룡산성에서 남원시내 방면으로 내려오면만인의총을 만나게 된다. 만인(萬人)의 뜻, 조선을 지켜라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 의 실패가 전라도를 공략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적국(赤國, 전라도)을 멸하라’라는 첫 명령을 내리고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그해 8월 12일 5만6천명의 왜군들이 남원성에 집결하였다. 3일간의치열한 전투에 성안에는 있던 6천여 명의 백성들과 4천여 명의 병사 등 1만여 명이 순절하였다. 왜란이 끝나고 난뒤 1612년 충렬사를 세워 8명의 충신을 제향하였으며, 1964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지금의 모습은 1979년에 완공된 것이다.만인의총의 경내에는 팔충신의 사적비가 이전되어있으며, 주차장 동편에는 정유재란 때 일본 가고시마에 끌려간 도공 심당길 등을 기리는‘오늘이 오늘이소서’라는 노래탑이 세워져 있다. 만인의총 앞다리를 건너 백여 미터를 내려가면 남원성벽에 이른다. 남원성전투의 흔적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남원성은 남원의 역사에 잊혀진 존재처럼 남아있다. 여원치, 이성계의 길을 따라 남원시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다 보면 여원치를 넘게 된다.여원치의 정상부에는 이성계의 황산대첩 승리를 예견하였다는 마애불 할매가 있다. 여원치 마애불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162호로 지정된 이 마애불은 이성계가 꿈에 나타나 황산대첩의 대승을 이야기 해 준 한 노파에게 감사하기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마애불을 여원치할매라 부르고 있다. 여원치할매의 예언 때문인지 이성계는 운봉에서 인월 사이에 있는 황산벌에서 왜구를 대파하게 된다.황산대첩비는 1577년 선조의 명으로 건립되었으나 1943년일본인들에 의해 글씨가 파여지고 두 동강 나버린 것을 수습해 파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1957년에 비를 다시 세웠다. 황산대첩비 옆 바위에는 어휘각이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못하는 이 어휘각은 1381년 이성계가 석벽에 황산대첩에 공이 있는 8명의 원수와 4명의 종사관 명단을 새겨 그 공을 기린 곳이다. 이 역시 일본인들 손에 의해 마모되어 글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황산대첩비가 있는 비전마을에는 가왕 송홍록과 국창 박초월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국왕의 성지가 조성되어 판소리를 체험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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