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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7 |
신귀백 영화엿보기 - 김사인·김종삼·이용악의 시를 닮은, <무산일기>
관리자(2011-07-12 16:44:36)
김사인·김종삼·이용악의 시를 닮은, <무산일기> 무산(霧散)된 기억 80년대는 광장의 시대였다. 광장의 깃발과 대오는 어정쩡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가 싶더니만 동구의 몰락과 함께 결승전도 없이 스러졌다. 예민한 촉수를 가진 시인은 흩어진 이 풍경을『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로 압축해서 말해주었는데. 최영미에 대한 화답으로 유하는 광장에서 물러난 사람들에게『바람 부는 날은 압구정동에 가야한다』고 딴청을 놓은 지 벌써 많은 시간이흘러갔다. 혁명의 깃발을 노래하던 시인들은 이제 피어나는 꽃과더불어 언어의 유희를 즐기고 그런 시인을 미래파라고 추켜세운다.그럴 수 있다.이제 세상은 시의 시대가 아닌 카메라의 날들이 되었다. 이름 있는여배우들이 유명한 사진사를 대동하고 아프리카로 가서 검은 피부에큰 눈을 가진 아이들과 슬픔을 나누는 장면을 화보로 전달한다. 좀 꼬인 마음으로 보자면 프로파간다다. 그런데 서른도 안 된 감독이 탈북자 세계에 카메라를 들이댔다고? 혹시 <무산일기> 역시 선전물은 아닐?탈북자 이야기란다. 사실일까 할 정도의 끔찍한 이야기를 사실처럼 보도하는 작태에 대해 긴가민가 하는 것처럼 애써 무시하며 사는 것이 오늘의 애매한 정서일 것. 그때 잔치가 끝났나는 말을 믿기 어려웠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북한 인민이 굶어죽는다는 이야기로 김정일에게 반기를 드는 반공영화란 말인가? 저쪽에다‘퍼’줬다고 또 한 소리하는 것은 아닐까? 임진강에서 비라 뿌리는 해병대 마크붙인 할아버지들과관계된 영화는 아닌지? 아니었다. 무산자(無産者)자의 바닥인생 계단을 오르며 나이든 남자가 말한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지마라. 살아남아야 할 것 아니냐?”고개를 끄덕이는 전승철(박정범)은 바가지 머리에 두툼한 볼이 그리 선량하게만 생긴 것은 아닌데. 홍콩 액션배우 홍금보젊었을 때를 닮은 이 친구는 취직이 어렵다. 주민등록 번호 때문에. “125로 시작하는 주민번호는 중국비자가 안 나와요.”가 취업거절의 이유다. 국가는 귀순자에게 국적을 부여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하지만, 125로 시작되는 숫자는 탈북자들에게 붙여주는 빨간 리본에 다름 아니기에.배경음악 없이 연민의 대상인 약자의 소외를 나타내기 위한 노력이 화면과 사운드로 계속되는데. 승철은 탈북브로커 모집책 역할을 하는 경철의 임대아파트에 얹혀 한뎃잠을 면한다. 그러나 칼바람보다 더 추운 것은 동포들의 차별과 무관심 또 냉대. 아파트에서 잔다고 하지만 무시로 여자를 데려와 앓는 소리를 들어야 하니, 노숙보다 나을 게 없는 삶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북한의 실상을 소개한 이야기가 아니라 남한의 실상을 소개하는 영화가 될 터.추울 텐데, 승철은 얇은 공사장 잠바에 현수막과 한 다발의 포스터 그리고 파란 테이프를 담은 배낭을 지고 다닌다. 탈북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기 힘든 승철은 벽보를 붙이는 일로 먹고 사는데. 자동차에 야한 명함을 꽂는 일도한다. 김사인의 시와 박정범의 영화 속 장면은 닮았다. 폐휴지 줍는 할머니와 탈북자라는 차이만 있을 뿐. 길거리에 야한 현수막을 걸고 나이트클럽의 포스터를 붙이는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 게다가 구청직원의 눈치 말고도 구역을 다투는 동네깡패에게도 허락을 받아야하는데. 봉고차 속 사장은 일을 그만두란다.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와“제가 할 일 아니잖습니까?”사이에 북조선과 남한이 있다. 그러니 <무산일기>는 초보귀순자의 남조선 적응기라할까?불법 CD도 팔고 박스에 담아 강아지도 파는 노점상 남자가 버린 하얀 강아지 한 마리를 승철이 데려오는데. 강아지로 하여 쥔을 붙인 친구에게 갖은 모멸을 당하지만, 저 미물도 내 신세려니하고 승철은 애정을 담는다. 일상의 기쁨이 강아지 키우기라면, 승철에게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주어지는 평화의 시간. 친구의 옷을 빌려 입은 승철은 성경을 끼고 교회에 간다. 꼴에 남자라고, 승철의 눈에 교회성가대에 앉은 숙영(강은진)이 눈에 들어온다. 신인감독 박정범은 이야기를 잘 붙인다. 프레지던트 호텔 앞 롤러스케이트장을 지나 청계천 좁은 골목에서 승철은 먼발치로 숙영을 발견하고 뒤를 쫓는다. 그녀는노래방으로 들어가는데. 노래방 여자인가? 아니다. 노래방 쥔이다. 탈북자가 남한에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생각에 우울감도 느낄 수 있을 터, 거기다 놀면 뭐하나?승철은 숙영의 노래방 저녁 알바로 들어가는데.아픈 아버지를 위해서, 노래방에서 술을 팔고 접대부를 고용하는 곳이 남한이다. 그리고 교회에 다닌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숙영은 승철에게 교회에서 자신을 모르는 척해달라고 매몰차게 이야기한다. 노래방에서 도우미들과 찬송가를 부르는 인간을 이해할수 없으니.머잖아 승철은 해고 되는데, 이 사회부적응아는“제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묻는다.황지우의 시대로‘서울 사람들을 세련되게 하는 것이 신경질과 무감각’이란 것을 탈북자가어찌 알 것인가? 거기다 친구가 사준 나이키 오리털 잠바는 동네 깡패들에게 갈가리 찢기고강아지마저 잃어버린다. 경철이 갖다 버린 것. 경철의 돈벌이는 안보교육 강사. 안보교육일수록 아픈 다리 내놓고 장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가능하면 과장해야 그들의 입맛에 맞는다는 것을 익히 아는 경철에게 위기가 찾아오는데. 탈북브로커 두목 역할을 하던 삼촌이 돈을 떼먹고 달아나버린 것. 모집책 경철이 시급 사오천 원을 받는 친구들에게 뱉는“이러려고 목숨 걸고 넘어왔냐?”는 말은 탈북자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의 괴롭기만 한 현실을 대변한다. 승철은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있는 강아지를 찾아 빈집 장롱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데. 민간인 적응기 살기 위해 핏덩이를 물속에 쳐 넣어야 하는 비극을 이렇게 짧게 그릴 수 있을까? 심야의 바다에 월남하는 사람들을 그린 김종삼의 명시다. 신인감독 박정범은 시내버스에서 이 장면을 재현한다.허세에 묻어나는 연민으로 가득 찬 경철은 탈북자 브로커 일이 잘못돼 도망자 신세가 되고, 승철에게 자신의 전부가 달린 돈을 챙겨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하는데…. 구원이 될 돈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버스정거장의 친구를 스쳐 지나면서 몸을 숙여 강아지의 입을틀어막는 승철. ‘더’잘살기 위해 자신을 거둬준 유일한 친구를 버리고 정거장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은 한 사람을 죽이고서야 살아남는 반복을 보여주는 것. 무산(茂山)에서 온 청년 공중전화박스에서 벼룩신문에 동그라미를 쳐대며 전화를 하던 승철은 이제 새 옷을 뽑아 입고 뷰티숍에서 긴 머리를 말끔히 자른다. 이쪽에서 유일하게 친구로 지내던 후견인의 돈을 꼬불치고서야 그는 서바이벌 방법을 제대로 터득한 것. 승철은 교회에 간다. 교회가 오래된 절간이 아니고 위로해 주는 곳이 아니란 것을 이제는충분히 알면서, 왜? 교회가 신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기심 해소를 위한 공간으로 인식한 것일까?치욕은 옛일이 되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교회기도모임에서 그는 자신이 함경북도 무산(茂山)출신 탈북자임을 밝힌다. 마치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 하는 사람 앞에 태연한 척하는 것처럼 교인들은 그를 도울 수 있다는 우월적 위치에 있음을 확인해서일까, 그리 놀라는표정도 아니다. “옥수수 몇 알 때문에 친구와 싸우고 그 친구가 며칠째 일어나지못하더라. 그래서 이쪽으로 넘어왔다”는 간증에 교인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 그리고찬송가소리,“ 나같은죄인살리신주은혜놀라워.”전승철은그때죽은것이다. 버스에서 몸을 숨길 때, 교회에 가서 아픈 다리 내놓고 장사를 시작할 때 말이다. 함경북도 무산. 백두산 바로 밑 철광석이 많이 나온다는 곳, 자작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다는, 이용악의 처가가 있는, 느릿느릿 검은 지붕 화물차가 지나가는 곳이다. 그러나 두만강 삼림지대를 횡단하며 무산을 지나는 화차지붕 위에 내리는 눈의 아름다움은 스러지고 주인공 청년을 동정하고픈 마음은 복잡해진다. 왜? 탐색전은 이미 끝났으니까. 목숨을걸고 동포의 나라를 찾아왔지만 이곳은 민족의 나라가 아닌 자본의 나라일 뿐이란 것을 깨달은그에게 남은 것은? 곧 우아한 드리블 즉 지겨운 고백이 펼쳐질 터이니.이 영화 중반이 지루한 느낌이 있지만 뒷부분이 더 좋다. 핸드헬드로 흔들리는 스테디캠이 만든 화면은 곧바로 벽돌로 뒷머리를 가격할 듯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제대로다. 누군가 나타나서허리 좌측에 회칼을 쑤셔 넣을 것 같은 분위기의 마지막 신은 왜 외국의 영화제들이 신인감독에게많은 상을 주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이윽고 로드 킬이 되어 있는 강아지 한 마리를 두고 얼어붙은 한 남자. 그리고 엔딩크레딧. 남한사람 남한으로 탈북자 이만 명 시대란다. 이들은 저쪽 체제의 희생자이자 용감한 사람들. 대개 중국을 거쳐 들어온다. 못 들어 온 사람은 더 많단다. 재중동포감독 장률의 영화 <두만강>이나 <경계>는 그 객관성을 담보한다. 그래서, 이쪽으로 왔다면 그들 역시 분단의 희생자로 보는 것이 맞을진댄 이제 이들은 이쪽의 재정적 부담을 주는 사회복지 대상자들로 골치 아픈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곳이 피 묻히고 얼룩진 자리일 터인데.스토리에 감동은 있지만 스타일에 있어서는 새로운 영화가 아니다. 그래도 배경음악 없이 간 것은 감독의 배짱. 이야기와 화면으로 승부하겠다는 태도일 테니. 하지만 얼굴은 보여주지만 청년의 손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 더 있다. 관용이 있는 동네가 아닌 위선이 있는 동네로 선택한 교회와 기도하는 장면은이창동 냄새가 난다. 또한 비탈진 산동네는 실제로 그가 살았다 해도 억지스럽고. 삼만 원 주고 샀다는 강아지‘진도’는 조연상 감. 마지막으로, 형사 역을 한 배우가 감독의 친아버지라는 데서 한 방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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