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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7 |
내 인생의 멘토 - 우공 우한용 교수
관리자(2011-07-12 16:41:39)
그날 선생님과의 낮술이 아니었다면 제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 송준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뵙던 날을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그날 다른 분의 심부름으로 등산용 침낭을 빌리러 선생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저는 그때 전북대 국문과 석사과정을 이제겨우 한 학기 마친 스물다섯 살짜리 대학원생이었습니다. 세상에,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일이 논문이나 책이 아니라 등산용 침낭을 빌리는 일이었다니요.선생님께서는 그날 저를 오래 동고동락했던 옛 친구를 대하듯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연세답지 않게(당시 선생님께서는 우리 나이로 서른여덟이셨습니다) 이마가 훤하시고 구레나룻이 거뭇거뭇하신 선생님의 그 형형한 눈빛을 저는 한동안 기억에서 지워내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그날 이후 저는또 선생님을 자주 뵙지 못했습니다.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선생님의 강의를 신청해서 들을 기회가 한 번도 없었던 게가장 큰 이유였습니다.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난 겨울 어느날 저는 선생님 연구실을 노크했습니다. 막 인쇄되어 나온 제 석사학위논문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드리는 논문을받아드시자마자 제목만 쓰윽 훑어보시고는 다짜고짜 그러셨습니다. 그래요, 애썼어요. 그건 그렇고, 송 선생 오늘 혹시저녁에 별다른 약속 없으면 나한테 시간을 좀 내줘요, 동백장여관 근처의 허름한 식당에서 다시 만났을 때 선생님께서는 제게 소주를 먼저 따라주셨습니다.놀랍게도 그날 선생님께서는 제가 드린 논문을 꼼꼼히 읽고 메모지에 제 논문의 장점과 부족한 점을 꼼꼼하게 적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걸 제가 기죽지 않게 배려하시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짧은 시간에 그만한 논문을 쓴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석사논문으로는 손색이 없거든. 그런 뜻에서한잔. 본격적인 공부는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또 한잔. 연거푸 건배를 제의하시는 바람에 소주가세 병이나 쓰러져가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그해 봄, 저는 박사과정에 입학이 미뤄진 채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입시학원에서 강의도 했고, 생애 처음으로 입사시험이라는 것도 치러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찾으신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저는 선생님의 연구실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그러셨습니다. 그동안 공부한 게 너무 아깝잖아요.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다시 공부 시작해요. 뭘 따지고 계산해서는 안 되는 게 공부하는 세계거든요. 어때요, 우리 낮술이나 한 잔 하러 갑시다.그날 선생님과의 낮술이 아니었다면 제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다음날부터 저는 다시 박사과정 준비를 했고, 선생님과 함께한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저에게 무던히도 술을 많이 사주셨습니다. 선생님 댁에서 마시다 쓰러져 잠든 날도 있었습니다. 다음날 사모님께서 끓여주신 해장국을 먹는 자리에서 밤 새워 쓰신 원고라고, 한 번검토해 보라고 하시는 선생님께서는 꼭 철인 같았습니다.박사과정에서도 저는 선생님의 강의를 듣지 못했습니다.복잡한 사정 때문에 학위논문 심사위원조차 맡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제 논문을 꼼꼼히 읽고 내용과 자료를보완해 주신 분이 선생님이셨습니다. 단편소설 하나를 써서 보여드렸더니 그걸 컴퓨터 화면에 올려놓고 저와 함께 밤을 꼬박 새우시면서 소설 쓰는 요령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날선생님께 배운 것만으로도 뒷날 제가 소설을 가르치고 이러저런 글을 쓰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습니다.선생님께서는 공부가 지지부진하면 소설이라도 써야 하고, 소설도 잘 안 되면 술이라도 마셔야 한다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지요. 제가 등단했을 때도 선생님께서는 또그러셨습니다. 공부도 하고 소설도 쓰고 술도 마시라고. 일년에 단편 하나씩은 무슨 일이 있어도 써서 발표하라고. 선생님께서는 가난한 시간강사인 제게 일거리도 참 많이 갖다주셨습니다.그리고 선생님, 저와 함께 청주에 다녀오셨던 날을 혹시기억하십니까. 그날 저는 아침 일찍 선생님을 찾아뵙고 염치없는 부탁을 드렸습니다. 아무개 교수님께 전화라도 한 통해주십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무렵 시간강사를 삼년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친구가 전임교수로 일하는 청주의 한 대학에서 제 전공의 교수를 공채한다는 소식을듣고 무작정 지원서류를 제출했던 것입니다.그 친구는 제가 지원한 그 학과 교수들 중 한 사람이 선생님과 친분이 두텁다는 첩보를 전해주었습니다. 저로서는 망설이고 말고가 없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선생님께서는 오후에 연구실로 다시 들러달라고 하셨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선생님을 다시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가방부터 챙기시더니, 우리 지금 그 학교로 쳐들어갑시다, 하셨습니다.저는 청주로 제 고물차를 몰았고, 조수석에 앉으신 선생님께서는 지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려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학비가 없어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야간 고등학교에서 일할 때 대학원 입학원서를 사들고 학교로 직접 찾아오셨다는 선생님의 은사 구인환 선생님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습니다.그날 선생님께서는 연배가 아래인 그 대학 젊은 교수들이건네는 잔을 은사님을 모시듯 한 잔도 거절하지 않고 두 손으로 깍듯이 받으셨습니다. 민망하게도 저는 선생님께서 제주머니에 미리 찔러주신 카드로 몇 차례 더 이어진 술자리를모두 계산했지요. 우리 송 선생, 성실하고 재능이 많은 친구라 학과에서 여러 모로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밤늦게 그분들과 헤어지면서 선생님께서는 또깍듯이 인사까지 하셨습니다. 저는 민망하고 가슴이 먹먹해져서 그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전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저앞에 두고 선생님께서는 조금 일그러진 목소리로 차를 잠깐세워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길가의 메마른 풀밭에 그날 드신 걸 모두 토해내셨습니다. 선생님의 등을 두드리고쓸어드리고 하다가 저는 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연세가 40대 중반쯤이었을 텐데 저는 이미 그 시절을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선생님의 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저는 선생님을 뒷자리에 편히 앉으시게 하고 다시 출발했습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잠이 드신 줄 알았던 선생님의 말씀이 뒷자리에서 들렸습니다.송 선생, 오늘 일을 잊지 말아요. 송 선생도 언젠가는 교수가 될 거고, 그러다 보면 후배나 제자의 앞길을 여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 때도 올 테니 말이지요. 아, 그리고 이건 내말이 아니라 옛날에 내 은사님께서 들려주셨던 겁니다. 나한테 대학원 첫 학기 등록금을 주시면서 그 어른이 꼭 그렇게말씀을 하셨거든…….저는 또 가슴이 먹먹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이듬해 봄에 저는 지금 일하는 대학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날 선생님께서도, 이제 이곳에서 내 할 일은 다하셨다는 듯 모교인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공부하고 가르치고 소설 쓰며 바삐 살라고, 이곳을 떠나시며 선생님께서는 제게 그렇게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께서 주신 그 당부 말씀을 이렇게 저버리고 살아가는 저는 선생님께 면구스러워서 얼굴조차 들지못하겠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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