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 |
내인생의 멘토 - 명창 최승희 선생
관리자(2011-06-09 15:18:05)
음악의 플랑크톤에서 필그림으로
- 이형로 음악인
소리를 배우는 게 국악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좋을 것 같아 덜컥 판소리 수강 신청을 하게 되었다. 당시 50대 초반이던 명창 소리꾼‘최승희’국악원 2층 문틈으로 처음 보게 된 스승과 제자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얼추 열린 문틈은 그들의 소리를 격하게 토해낸다. ‘춘향가’중 느린 진양조의‘이별가’대목에 열 명 남짓한 학생들이 선생의 북장단에 매달려 위태위태하다. 오 분 넘게 이어지는 소리는 결국 선생의 훼방(중간지적)으로 다들 목구멍으로 줄행랑이다. ‘그냥 끝까지 가게 두지 끊기는 왜 끊남?’소리 훼방꾼‘최승희’. 정정렬제 춘향가 기능 보유자‘최승희’선생을 만난 건 이십대 중반을 넘어서였다. 민속악을 연구하고 창작하고 연주하는 현재 내 음악의 뿌리는 그 무렵에닿아있다.나비나 매미가 몇 번의 변태과정을 통해서 성충이 되어 자기 세계를 찾아가듯이, 나 또한 음악과정에 몇 번의 변태로움(?)이 있었다. 어릴 적 작은방에 형이 치던 기타가 있었고,몇 년 후엔 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던 피아노가 방 한 칸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내 친구가 되었고,점점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이렇게 음악을 취미삼아 벗 삼아 그룹사운드도 하고 교회반주도 하면서, 거칠 것 없는 음란서생(音亂書生)으로 십대를 달구었다.그러던 어느 날, 평소 잘 가던 서점 음악 코너에서 몇 권의악보집이 눈에 띄었다. 재즈 악보집이었다. 클래식이나 가요팝송과는 사뭇 다른 세계가 거기 있었다. 재즈음반도 사고테이프도 사서 들으면서, 점점 그 속으로 음악의 유충이 되어 기어들어갔다. 이십대 초반 재즈는 나의 신앙이자 계율이었다. 오로지 그 속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해체하고 다듬고 몰두하면서 서서히 음악의 틀을 잡아나갔다. 지금도 가끔듣는‘빌 에반스’나‘몽크’의 피아노를 통해 화성의 폭을 키워나갔고 리듬의 다양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 나갔던것이다. 실은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능동적이기보다는 바다의 방랑자라고 불리는‘플랑크톤’처럼 수동적으로 음악공간에서떠도는 부유자(浮流者)에 지나지 않았다. 본인이 선택해서자리를 잡는 삶이 아니라, 환경과 어느 계기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몇 년을 재즈의 바다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떠돌다‘음악의 방랑자’가 되어버린 나에게 도립국악원에 있는친구 동생이 무심코 말했다. “형, 재즈도 좋지만 한 번 국악을 배워서 접목을 시켜보면 어떨까요?”이때 문득 어떤 섬광 같은 게 뇌리를 스쳤다.
전통음악‘국악’
아련한 기억 옛날 구형무소 자리에 가끔 약장사가 들어오곤 했었다. 생전에 어머니는‘국극단’이라고 말씀하셨지만,나 어릴 땐 국악형태의 극단이 이미 쇠락해가는 시점이어서약장사라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때론동네 녀석들과 호기심에 이들의 공연을 보러갔다. 사도세자도 하고 장화홍련전도 했다. 기억의 끝 언저리에서 자리잡고있던 추억이 이 친구의 말과 합류하여 훗날 예술적 간질이될 줄 누가 알았으랴.국악은‘보쌈아비’그 자체였다. 외롭고 힘들지만 재즈란놈과 한 평생 살 줄 알았는데, 이 땅의 전통아비(국악)는 중매쟁이(동생) 말 한마디에 잽싸게 나를 보듬고 그 속에서 뛰쳐나와 새 음악의 길로 방향을 틀게 만들었다.처음 접하는 거라 쉽지 않은 거문고를 강동일 선생 밑에서1년 남짓 배웠다. 그 분의 거문고 성음은 음악의 제 4요소인‘톤’이라는 개념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계속해서 거문고를배우고 싶었지만 선생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셔서다시는 그 분의 모습을 뵐 수가 없었다.잠시 실의에 빠져 있다가 이왕 시간을 쪼개어 소리를 배우는 게 국악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좋을 것 같아 덜컥 판소리 수강 신청을 하게 되었다. 당시 50대 초반이던 명창 소리꾼‘최승희’. 국악원 2층 문틈으로 처음 보게 된 스승과 제자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아무래도 소리공부보다는 소리의 구조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악보 없이 선생의 선창과 제자의 후창으로 이어지는학습형태를 견디기가 여간 힘들었다. 당일 배울 가사를 공책에 넉넉히 써놓고 그 위에 가락과 장단을 적어 넣었다. 나중에 선생께서 무얼 열심히 적나 하시고 관심을 가져서“선생님 소리를 악보로 옮기는 중입니다”하고 말씀을 드렸더니,당신은 고개를 끄덕이셨다.정정렬제 춘향가에 빠져들수록 소리하는 선생님의 모습은왜소한 체구와는 다르게 점점 태산으로 다가왔다. 4~5년 동안 선생님의 소리를 가까이에서 작업하면서 내안에 그 어렵다던 춘향가가 다 들어왔다. 그 후에 채보한 악보집을 가지고 선생님과 정정렬제 춘향가집을 출판했다.전문소리꾼도 어렵다던 정정렬제 춘향가 한바탕을 온전히전해 주신 최승희 선생은 나에게 음악적 모성이다. 소리를통해 나의 음악의 길을 열어 주고 음악의 성충이 되어 훨훨자기 세계로 날아갈 수 있게 해주신 나의 멘토이자 길잡이이시다.10여 년 전이던가? 나름대로의 음악의 순례길을 떠나 서울 근교를 헤맸다. 그리고 전주에 와서 음악 작업을 하면서도 선생님께 통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그러다 얼마 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연세 탓인지 모습은 예전보다 더 쇠약해지셨다. 그러나, 카랑카랑한 음성과 반짝이는 눈빛은 여전했다. 숫기가 없는 성격이라 머뭇거리는 버릇은 여전했는데,선생님은 내 손을 꼭 잡고 자식을 찾은 듯 반가워하셨다. 밖에서 식사하는 게 불편하다고 한사코 사양하시는 선생님을뒤로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당신은 나의 스승이자 영원한 어머니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