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 |
[문화시평] 송만규 초대전 <섬진강, 들꽃에게 말을 걸다>
관리자(2011-06-09 15:12:58)
송만규 초대전 <섬진강, 들꽃에게 말을 걸다>(6일~19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들꽃의 미학에 담긴 희망
- 최형순 미술평론가
‘무슨 병적인 순수주의자의 망상’만이 아니라면, 꽃을 그리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광기의 시대에 꽃을 그리고 있는 것이야말로 미친 일이라던 실존주의자들의 비난을 이해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민중미술의 핏줄을 지니고있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정점에서 앞장서온 송만규여서 예의그런 꽃그림 알레르기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그런 그가 꽃을 그렸다. 그리고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는 화려하게 현대적인 미감을 자랑하는 주목받는꽃이 아니라고 했다. 유미주의자들의 대명사와 같은 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꽃은 무언가 좀 다르다. 그가 말하는 꽃은 들풀과 잡초와 다를 바 없는 꽃이다. 그저 바람이 키운들꽃,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깊은 산속에 홀로 피어있는 꽃이라했다. 꽃은 꽃이되 꽃이 아닌 꽃, 들꽃은 그렇게 우리 감식의 안테나를 비켜난 것이었고, 거대한 자본의 사유에 포획되지 않는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전투적이고 온통 자본에 포획된 세상에 대한혁명을 꿈꾸고 있음이 분명하다. 10년을 훨씬 넘게‘섬진강화가’로 불려온 그로 본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섬진강이 그가 어떻게 살고, 사유하며, 작업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며 함께 지내는 친구일 수는 있지만, 그가 섬진강을 신앙할리도 만무할 테니까 말이다. 그에게 섬진강은 생명을 품고키우는 삶의 터이다. 섬진강 상류에 마련한 그의 작업실 <한들산방>에서 그는 강과 여전히 함께 지낸다.사람들은 이곳의 큰 너럭바위에서 여럿이 둘러 앉아 흐르는 강물에 넋을 빼앗기기도 하고 밤이면 쏟아지는 별빛을 품에 안기도 한다. 강물 가운데 버티고 있는 집채만 한 바위 틈새, 손바닥만한 옥토에는 생명 하나가 떨어져 삶을 일군다.철쭉꽃, 물버들 가지, 억새가 앙증맞게 혹은 위태롭게 매달려 있고 그 위로 황새의 큰 날갯짓이 어우러질 때, 그것은 차라리 물 위의 설치 작품이다. 바위에서 맞이하는 강바람은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고 서늘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한지에 섬진강물을 찍어 바른지 10여년이 흘렀나보다.(2005년, 작가노트)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섬진강 화가로 살고 있다. 너럭바위, 강물, 별빛, 한지와 섬진강물까지도 여전히 작품 속에 담아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혁명과 섬진강을 맞바꾸어 생각할 필요가 없듯이, 터무니없는 세상을질타하지 못하는 그를 상상할 이유도 없다. 하늘과 구름과산과 나무와 어우러진 들꽃은, 지금까지의 그가 그려 온 세상을 통찰하던 시선을 돌려놓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혹한의 한기를 걷어내지 못한 채 쌓여있는 눈밭을 뚫고 피어오른 <복수초>에서만 굳이 그의 의기를 찾아낼 필요도 없다. 어쩌면 꽃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풍경 속에 어우러진 작품 <민들레>의 꽃들은 그렇게 존재를 과시하지 않지만오히려 진한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꽃과같이 어느 한 지점이 전부가 아니라 지금껏 담은 모든 작품속의 부분들 하나하나가 작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보면 이번 작품들도 이전에 그가 그렸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묵과 여백으로 산하를 담고 있는 것도 여전하고,전후 맥락과 원근을 가려 그리는 것도 여전하다.섬진강 물길 따라 군데군데 풀밭이 솟아있고, 겹겹이 늘어선 산들을 멀리 배치한 <할미꽃>은 짧은 붓터치를 가득 중첩하여 만들어간 화면이다. 붉은 색 꽃이 다소 도드라져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그림 앞에 서면 강과 산과 풀들은 능히그 꽃을 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품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민들레>는 청전 이상범의 파선들이 모여 이루어진 그림과 같이 가득한 작가의 필치들이 모여 어우러진 그림이다.그렇다고 청전의 파선과 같을 리도 없으며 적묵을 놓아 음양을 처리하는 것과도 사뭇 달라 맑은 기운이 가득한 화면이되고 있다. 적어도 이 그림에서 여백은 흐드러진 꽃이 되기도 하고 어렴풋한 구름이 되기도 한다. 그 모두가 모여 투명하고 맑은 자연의 자태를 오롯이 담는다.작가는 이전의 작품들에 이제 한 가지 사유를 덧붙이고 있는셈이다.“ 높고, 큰것에치여낮고, 작은들꽃을잊고살았던 것 같다.”예술은 고귀한 정신의 높은 경지가 아니라, 웃고 울며 살아가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의 그“들꽃을 인간 세상에 비교하면, 소외와 억압 속에서도 질긴생명력을 갖춘 민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걸개그림으로 대변되는 민중미술의 역사를 직접 만들어간장본인인 그는,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장, 전국민족미술인협의회 중앙위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전북지회장 등을 지내며 오랫동안 그 현장을 지켜왔다. 세상 모두 뿐만 아니라 예술조차도 자본 속에 포획되고 획일화되는 세상을 바라보며 그는 아직도 타는 목마름을 호소한다. 동양사상을 다시금 공부하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그의꿈이 작게라도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들도 자본에 물들지 않은 세상에 대한 꿈의 현실화 하나가분명하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