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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6 |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부안 3
관리자(2011-06-09 14:55:04)
지역문화 다시보기 - 부안 3 왜 부안을 돌과 절집과 저항문화라 말하는가 - 정재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삶터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대단하다. 부안 사람들 역시 태어나서 고향에서 한발도 밖으로 나가지 않음이 큰 자랑이고 지역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너도 나도 입에서 침이 튄다. 부안에 붙박이로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곳을 떠난 사람들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다양한 관점과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지역을 독립된 주체로 떼어내서 살펴볼 여유가 그동안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틈나는 대로 지역을 돌아보면서 느낀 몇 가지를 정리할 기회로 삼는다. 부안 사람들의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 부안은 산과 들, 바다를 두루 갖춰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옛 부터시인들의 찬가와 생거부안(生居扶安)으로 알려진 곳이다. 문화적으로는 전남 강진과 유사하니 너른 바다와 고려시대 청자 도요지, 실학자 유형원과 정약용, 시인 신석정과 김영랑 등 유사점은 더 많겠다.동진강과 고부천, 서해로 둘려 쌓인 물의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배와 나무다리가 없으면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계속된다. 물은 농사짓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요소이다. 그러나물은 인간들의 요구에 따라 농사지을 때 하늘에서 적당히 내리는 것은 아니어서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와 가뭄은 자연의 무섬을 더하여주기도 했다.부안은산살림과갯살람이가능한지역이었다.《 택리지》의저자이중환도, “골 바깥은 모두 소금 굽고 고기 잡는 사람들 집이며 산중에는 기름진 밭이 많다. 주민들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업(業)으로 하여 땔나무와 조개따위를 값을 주고 사지 않아도 풍족하다.”고 말했다.정조 15년에 부수찬 이우진은, “부안 고을은 사방이 변산 기슭에둘러싸이고, 3면은 해변에 바싹 닿아서, 온 경내의 백성들이 산에 살지 않으면 포구에 사는데 근년 이래 마을이 잔폐하여 7~8집은 비어서 산전(山田)은 태반이 묵정밭으로 황폐해지고, 해세(海稅)는 해마다 줄어드는데…”부안 사람들은 산이나 포구에 살면서 산전에서 농사를 일구고 포구에서는 고기잡이로 먹을거리를 삼았다.부안 곳곳은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곳이어서 산기슭이나 포구에 살던 지역 사람들은 축조 기술을 이용해서 바닷물을 서서히 몰아내면서 농사짓기가 가능한 땅으로 지역을 바꾸어나가 들살림이 가능한지역으로 만들었다. 부안이 오늘과 같은 지형이 이루어진 것은 동진강 방조제와 큰다리(大橋)방조제가 이루어진 이후이다. 두 방조제의완성으로 내륙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막아서 너른 들판을 만들었다. 동쪽에 백산면, 부안읍, 주산면, 보안면, 줄포면, 동진면에 큰 평야가 이루어지고, 중앙으로는 행안면, 상서면, 하서면 동·북부에 역시 넓은 들이 이루어졌다. 비로소 온전한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이가능하게 된 것이다. 돌과 절집문화 지역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고 돌로 만든 당산이 풍상을 견디며 마을을 지키고 있다. 지역에는 마을 공동체 신앙인 당산제가 남아 있다. 서문안 · 동문안 당산, 돌모산 당산, 우반동 당산, 위도 띠뱃놀이가 명맥을 잇고있다. 당산제는 일제시대와 이후 무분별한 경제개발과 서구의 문화에 밀려 거의 소멸되었지만 현재도 10여 곳에서 당산제가 이루어지고 있다.부안읍성에는 동과 서 · 남 세 곳의 성문 거리에 돌을 깎아 세운 석조신간(石造神竿)의 솟대당산과 한 쌍씩의 돌장승이 조성되어 있다. 독특한 돌문화로는 절에서 쓰일만한 서외리 당간이 있다. 조성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로 보는 것이 좋다. 당간 주변에 있는 마을은 향교마을이라 부르고, 당간 뒤의 산허리에는 부안 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절집이 향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편들이 주변에서 발견된다.변산 안에는 절 집들이 많아서 스님들을 상대로 하는 중시장(僧市場)이 우슬재 밑의청림과 호벌치 넘어 사창(社倉) 근처에서 성시를 이루었다. 변산에는 내소사, 선계사,실상사, 청림사 등 4대 사찰을 비롯하여 많은 암자들이 있었지만 사대사찰은 왜란과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불탔다.불에 탄 절집의 복구는 쉽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건축경기가 어려워지자건축가들이 생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서원과 향교 등의 공공건축물들을 획일적으로 대량 생산하는데 참여하면서 절집 복구는 점점 어려워졌다.부안의 내소사와 개암사가 왜란 이후 개축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인데, 전란때 참여한 승병들의 희생의 대가로 당시의 유교권력이 불교의 재기를 묵인하는 동안사찰의 재건축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많은 사찰들이 중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사찰 건축에 필요한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변산의 나무는 질이 좋고 무성했지만 조선왕조에서 필요하여 보호하는 금산(禁山)정책으로 함부로 벌목할 수 없었다. 지역사랑과 저항문화 부안이 사람살기가 좋은 땅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오래 전부터 줄포 항구와 변산의 모래와 변산의 목재가 유명했다. 목재가 풍성한 탓에 수탈도 많아서 몽고의 일본원정에는 변산의 나무로 배를 만들었고, 고려 왕실의 목재도 이곳에서 구했는데 이 일로 고려말 문장가 이규보가 부안에 3년간 벌목 책임자로 거주하기도 했다.나당연합군과 부흥 운동을 일으킨 백제의 최후의 결전이 부안의 주류성에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으며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입이 집중되었고 왜란을 겪는 과정에서도 전쟁의 상흔은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도 지명으로 남아 있는 장밭들(長田坪), 돼지터(大陣場), 하서의 왜몰치(倭沒峙)와 야방모퉁이 등은 왜구와 싸우면서 생긴 지명이다. 왜구는 서해에서도 부안 해안이 배를 상륙시키는데 유리하여 검모진(진서면 구진) 쪽을 택했는데, 조정에서는 피해를 막으려고 검모진포에 만호와 영(營)을 두었고 격포진, 위도진 등에 군사를 두어 해안지방의 방어에 힘썼다. 변산 해안에 있던 격포 월고리, 대항리 점방산, 계화도 매봉의 3곳봉수대는 서울로 향하는 연변 봉수의 선로로써 당시 국방의매우 중요한 지점에 위치한 봉수대였다. 부안을‘강화도의인후(咽喉, 목구멍)’라 불렀으니 이곳이 왜구에게 뚫리면 강화도까지 한달음에 내달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임금이 있는 한양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얘기다.조선시대에는 부안이 갖는 전략적인 점과 물산 때문에 주변 지역보다 중시되었다. 수령을 임명함에 있어서도 음직(蔭職)이나 무관(武官) 출신보다는 문관(文官)을 보냈는데과거 시험이 정기적으로 치러지기 어려운 한말까지 이어진다. 이것은 조선 정부가 요지에 문과 출신을 배치하여 주변연해읍의 무과 출신과 음직 수령들을 총괄하고 통제하려던것이다.한말의 의병들이 변산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해방공간의변산 빨치산도 이런 점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다. 2003년부터 일어난 핵폐기장 반대 운동이 일어났을 때, 주변 시군의시선은 차가왔다. 별로 위험한 것도 아니고 지역이 발전된다는데 뭐 그렇게 온 지역민이 일어나 반대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지적이다. 하지만 지역민들은‘핵 없는 세상’이라는 꿈과‘지속가능한 에너지의 필요성’을 내걸며 자신들의의견을 관철시켰다.부안은 서해바다와 동진강과 고부천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영향으로 호수 속의 섬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환경에서독특하게 형성된 지역 문화를 일컬어‘돌과 절집과 저항문화’라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저항문화는 백제 부흥운동과왜구의 침입을 막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지역에서 쫓기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절박함, 지역을 지극히 사랑하는 자부심과 삶터를 지키려는 열망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문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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