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5 |
[명인명장] 내가 살아온세상 - 탱화장 도원스님
관리자(2011-05-06 08:53:45)
절집 것, 불교 것, 선 긋지 말고 문화예술로 보면 돼
- 탱화장 도원스님
<걸어온 길>
1950년 김제 출생
1970년 전주 승암사에서 출가
1999년 김제 청운사 주지
2002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7호 탱화장 지정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린 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서 거는 불화의 한 유형을 말합니다. 탱화는 일반적으로 사찰의 각 전각(殿閣)안에 모셔져 있는 존상(尊像)의 뒤에 걸리는 후불화(後佛畵)와 좌우 벽면에 걸린 그림을 생각하면 됩니다.예로부터 전라도 지역에는 의겸(義謙)을 비롯하여 천여(天如)·익겸(益謙)등 뛰어난 화승(畵僧)들을 많이 배출됐습니다. 김제 청운사에는 그 전통의맥을 이어온 분이 머물고 계십니다. 탱화장(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7호)도원(道源)스님(속명 유삼영)을 만나봅니다.
너는 부처님 모셔야 될 팔자다
나 태어난 곳은 대웅전이야. 여기 옆에 대웅전. 거기가 옛날에 나 태어날 때는 초가집이었어. 옛날 토담집이라고 나무와꾸를 만들어서 흙을 채우고 다져가지고 올라가고, 올라가고 집을 지은. 여그 대웅전 자리에 요사채로 있었거든. 거기서 태어났어.우리 아버님이 전주 송광사에 출가하셨던 스님이신데. 그시절에는 인자 일제 강점기여서 스님들이 탄압을 받고 결혼들을 했어. 사실은 어떤 면에서 보면 부처님도 가족이 있었고 신라 때 원효스님 같은 분들도 가족이 있었던 분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지.어렸을 때부터 불교가가깝고 아버님이 스님이고 하셨으니까 계속해서불교에서 살아 온 게. 요새 기독교에서 모태신앙이라고 하는데 나는 모태 정도가 아니라 유전자 신앙이지.학교는 이제 여기서초등학교가 다니고 초등학교고 중학교 과정부터는 익산으로 나가서 다녔고. 그렇게 학교를 다니다가 20대 초반에 출가를 하게 됐어.인자 형제가 5남 2녀인데 우리 아버지가 내가 유독 어렸을 때 병약했대. 걸핏하면 아프고 이러니까 그리고 옛날 분들은 사주다 뭐다 이래가지고 그런걸 보잖아. 나 같은 사주나 나 같은 병약한 사람은 부처님 모시고 사는 게 좋다. 이렇게 말씀을 많이 했어. 조선시대에도 그렇게 해서 스님들 많이 됐지. 이 이야기를 자꾸 많이 들었지. 어렸을 때부터 유아심리교육이지. 그러다보니까 다른 형제들보다도 출가에 대한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들고 그랬겠지. 칠남매 중에 나만출가를 했어.내가 전주 승암사라는 곳에서 출가를 했어. 그전에 먼저전주 남고사 밑에 불정사라는 곳에서 출가를 했는데 몇 달살다가 그냥 와버렸어. 그때가 20대 초반인가. 속에 들어있는 자의적인 생각에서 출가를 한 게 아니라, 출가를 해야하나보다 그런 식으로 되다 보니까 자꾸 생각도 멀리 떨어져있고, 자발적인 의지가 약하니까 그래서 못 참고 나왔지. 그랬다가 다시 승암사로 가서 만응스님에게 인연이 되서 승암사에서 다시 출가를 했지. 그게 23살 때쯤이야.승암사로 간 것은 우리 스님(만응스님)이 불교 미술을 했어. 대웅전을 보면 우리스님이 그린 탱화가 있어. 인제 승암사에 갔을때는 두 가지를 생각했지. 스님으로서 스님의역량과 자질을 갖추는것이 1번, 2번은 인제불교 미술도 익히고 배우면 좋다. 그렇게 몇 년하면서 느끼는 것이 불교 미술자체도 중요하지만, 지금이나 그 때나 한국 불교에서는 스님네들이 생활할 수 있는 의식주, 주거는 절에서 사니까 해결이 되지만, 나머지는 너무나 신도들한테의존적이야. 서양의 신부님들이나 이런 분들도보면 전문적 직업들도 있더라고.조선 시대 스님네들이 장인이 많거든. 집 짓는 장인, 기와짓는 장인, 미장하는 장인, 단청하는 장인. 조신 시대 불교가억압받았으니까, 그래서 그 것을 많이 해오셨거든, 나도 어느 날 딱 보니까 내가 신도에 의존적이지 않고 내 주체적인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뭔가 생활할 수 있는 역량도 필요하겠다,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 불교 미술을 하기도 했지.출가 전에는 원래 미술 쪽에 특별나게 한 것은 없었고. 소년시절에는 그냥 학교 선생이나 시 쓰는 문학이나 하고자 하는 생각을 했지. 근데 그 방향으로 못가고 스님방향으로 방향이 되었으니.미술이라는 게 타고나면 훨씬 좋고, 어쨌든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지. 그래도 좀 수월케 익힌 것이 타고난 것이 좀 있었는갑다 하고 생각을 하지.
부처님이 머릿속에 가득 채워질 때까지 그렸지
미술을 배울 때는 아주 기초부터 배우지. 서양그림은 드로잉 데생을 많이 하지. 우리도 마찬가지여. 그걸 쳐낸다고 하고, 습화한다고 하지. 똑같은 것을 많이 계속 그려보는 거야.복사하듯이. 부처님을 그린다면 부처님이 머릿속에 채워져 있어서 모델을 안 잡고도 그릴 수 있게 그게 기초지.그 다음에 초 낸 것을 한지와 천 사이에 붙여서 밑그림이 은은하게 보이게 하는데 그걸 배접한다고 하거든. 배접도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지. 한지를 붙일 때 전부 초를 내서 그 크기대로, 예를 들어서 가로세로 1미터면 그 크기로 한지를 대서거기에 밑그림을 하고 그런 그걸 초 낸다 그런단 말이지. 5미터, 10미터짜리를 한다고 하면 그 크기대로 초를 내고 배접을해하지.그렇게 채색을 할 수 있도록 틀을 만들고 그런 다음에 위에다 물감 칠하고, 그런 다음에 위에다 선으로 다시 윤곽을 잡고그다음에 물감을 연마하고. 연마라는 게 글 쓰면 윤문을 하듯이, 거칠게 칠했거나 단색을 칠한 거를 다시 다듬는 작업을 해서 물감을 정돈하고 색감이 부드럽고 잘 나타내도록 덧칠하고닦아내고 하는 거야. 초채하고 재벌물감을 칠하고 다시 연마하고 교정하고. 얼굴 마무리는 맨 나중에. 선비나 신장을 그릴때는 수염하고 눈도 하고 그러는 거지.우리 때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 했어. 스승한테 실제로 이론과 실기를 동시에 학습해서 그 맥을 이어가는 것 그게사자상승이야. 예를 들어서 똑같이 물감을 칠한다는 말 한마디를 들으면 학자들은 물감이 스며들어가는 농담 이런 것도안 떠오르고 그냥 물감을 칠한다는 그 형태만 떠오르지만, 우리는 형태를 비롯해서 물감이 붓에 찐하게 묻었을 때 한번 칠하면 그 농담까지 떠오르거든. 많이 해봤으니까. 물감이 많이묻는 데는 진하고 쭉 뺐을 때 덜 묻은 데는 연하고. 우리는 칠한다 했을 때 그런 게 동시에 떠오르거든. 그런데 일반인들은그게 안 되잖아. 깊이가 다른 거지.학자들은 논리적으로 이론 체계를 잘 잡거든. 탱화를 완성시키는 것을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하려고해도 안돼요. 실기가 안 되니까. 이게 서로 언바란스 안되게 하려면 실기하는 분은 이론을 많이 갖추고 이론하는 분은 실기를 옆에서 많이 체험할 수 있으면 훨씬좋은데. 그게 사자상승이야. 공학도나 의학도나 이런쪽처럼 일반적인 문과도 그런 경험들을 좀 갖추면 좋겠어.
생 옻으로 금박 입히다 옻독 올라 고생도 하고
승암사에서는 13년 정도 머물렀지. 불교미술을 하다보면 많이 돌아다니게 돼. 그때 시절만 하더라도 한 곳에서 청탁을 하면 그 절에 가서 완성을 시키는 경우가많았어. 탱화는 크거든 규모가. 물론 작은 것도 있지만. 지금은 청탁을 하면 여기서 해가지고 가져다가 마무리를 해드리지만, 그 때는 불사라고 그러는데, 탱화불사를 하면 그 절에 직접 가서 끝날 때까지 기거하면서 그렇게 했던 거지. 대개는 만응스님이랑 함께 가서나는 머무르면서 하고 스님은 절이 있으니까 왔다 갔다 하시면서 하고 그랬어.저기 내소사 밑에 지장암이라고 있어. 아주 처음에 배우면서 했을 때인데 그때 순금으로 관세음보살을, 손이 천 눈이천 관세음보살을 했어. 지금도 모셔져 있는데 순금탱화를 하면 생 옻으로 접착제를 쓰거든. 생 옻을 칠하고 그 위에다가금박을 여러 번 입혀가지고 위에다 그림을 그리거든. 고 천수천안 순금탱화를 할 때 옻이 올라서 고생을 엄청 했어. 온전신이 퉁퉁 붓고 두드러기 가렵고 해서 한 20일을 엄청 고생했어. 옻을 여러 번 올라 보면 면역성이 생겨가지고 안 올라. 그 때는 옻을 많이 안 다루고 처음이라 고생했지.
30년을 돌아다니다 고향 청운사로 왔어
그렇게 돌아다니기도 하고 내 개인적인 수행도 했지. 무주구천동 설천에 있는 청량산에 가서 옛날에 담배 수확하고 말리던 초막, 그 흙집 속에 가가지고 혼자서 기도도 하고. 막한 겨울에 일부러 가서 3~40센치 되는 얼음 깨가면서 발이퉁퉁 붓도록 하루에 16~18시간 기도도 하고. 그런 것도 또해 봐야지. 젊은 시절이니까.그런 식으로 순천 선암사 가서 공부도 하고. 또 인자 전주에 관음선원이라고 완산동에 그 절에 묵자 담자, 묵담 국성우. 그 어른 묵담 큰스님을 내가 십여 년 이상 모시고 시봉도했어. 그러면서 불교 의식이나 불교의 의례, 또는 스님으로서 갖추어야 할 생각과 지식. 이런 것들도 많이 배우고 익혔지. 또 거의 요새 수행비서처럼 모시고 다녔으니까. 그걸 시봉이라고 그러거든. 시봉을 한 십여 년 이상을 했으니까. 입적하실 때 까지 그렇게 하고. 그리고 묵담 스님의 제자들이제주도에 많이 계셔. 제주도를 왕래를 하다가 제주도 가서도 한 12년 살았지. 그러면서 제주도 쪽에 절에 탱화도 많이 하고. 제주도 청소년들 교화 이런 것도 많이 하고.그리고 고향인 청운사로 돌아온 게 올해 만 10년째, 11년. 그렇게 오래는 안됐지. 출가하면서 떠나서 인제 한 삼십년 가까이돌아다니고 왔지.지금 스님들 중에서 탱화를 하시는 분들을 생각해보면…, 논산에 봉래스님이라고 하시는 스님이 계시는데 여든 둘이셔. 부산에 인제 석정스님하고 논산의 봉래스님하고 그 다음에 인자통도사에도 한분 계신데 그 스님이 인제 칠십대 중반. 스님으론그 세분이고 내가 육십대 초반 되었으니까 육십대는 거의 없고…. 오십대 사십대는 늦게 출가한 스님네들이 서넛이 있다고알고 있고. 그 밑에 삼십대쪽은 지금 학교 동국대학교에 불교회화학과가 있어. 거기 다니는 스님이 서울 캠퍼스나 경주 캠퍼스에 서넛이 있다고 들었어.
한국 탱화는 불교권 안에서도 독특해
탱화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우선 인제 색채 자체가 옛날에는 석채, 자연 물감으로 해서 주로 쓰다보니까. 예를 들어서 솔가루를 가지고 가루내서 거른 걸 가지고 녹색을 쓴다하면 분말이니까 물에 개면 천이나 종이에 흡착이 안 되겠지. 그걸 흡착해서 서로 달라붙도록 견고하게 하는 데 아교나 어교를 썼거든.어교는 글자 그대로 물고기 부레로 만든 풀이고. 아교는 소가죽을 고아서 만든 거고. 그걸 접착제로 썼거든. 옛날에는 요새같이 본드나 이런 화학성 접착이 아니라 자연 접착으로 그걸 적절하게 물감이랑 섞어서 썼고. 그래서 일단 물감 자체가 다른 그림들하고는 다르고.그 다음에 인제 그림을 그리는 자체가 원근이나 그런 것을 선으로 하기 때문에 선묘법이지. 아주 가는 실선을 그어서 선으로중심적으로 하니까. 서양에서는 원근을 색으로 하잖어. 걔네들은 우리처럼 붓질을 해서, 가는 붓으로 선을 그어가지고 하는것이 아니고. 러시아나 저쪽에 보면 이콘이라고 하는 성화는 선을 좀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서양 기법으로 하지.그 다음에 인제 저쪽 인도로부터 저쪽 중앙아시아를 거쳐서중국으로 해서 한국으로 온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짚어보면, 티벳에 만다라라는 것이 있는데 티벳 사람들은 한국처럼 액자형의 대형이 아니야. 족자형의 소형들이지. 그니까 가정이나 이런데서 주로 걸고 쓰지. 그리고 절이나 법당에는 불상 조각상을 거의 다 모시지. 만다라는 들고 다니면서, 티벳이나 저쪽은산악지역이 많으니까 그럴 때 걸고 쓸 수 있는 탱화지.중국도 조각상이 중심이지. 한국처럼 절 안에다가 불상 뒤에 회화형태의 탱화를 거는 것이 아니고. 그게 인제 들어와서한국에서는 회화형태의 탱화로 발달을 했어 그런 면이 인제전체 불교권 중에서도 독특하지.일본이나 저런 쪽은 탱화를 해도 변상도 형식이거나 아니면 단편화들이거든. 변상도가 뭐냐면 불교 경전을 그림으로풀어서 그린거야. 예를 들으면 관세음보살은 관세음보살 그부분에만 얽혀져있는 거지. 그런데 우리는 영산회상도라고해서는 종합적인 거여. 부처님 법문할 때, 설법을 할 때 많은사람들이 있는 그런 장면, 이런 것들을 그리지. 좀 더 규모도크고 경전중심적인 그것이 이제 한국 불교 탱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
탱화도 화사마다 개성이 있어
원래 이쪽 충청도 전라도에 불교미술에 뛰어난 분들이 많았어. 그중에서도 저기 김제 용지면의 부용사라고 거기 계셨던 일섭스님. 그 스님이 한국불교미술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지. 그 어른 말년에 전주 송광사 괘불탱화가 있거든 그게 이제 낡아서 그 스님이 거기다 색을 덧칠을 했어. 그걸 개채라고그러거든. 그 개채를 그 스님 모시고 했어. 근데 그 스님이 마지막 했던 게 그 전주 송광사 괘불탱화 개채야. 그리고 그 어른이 몸에 병이 생겨서 마무리를 못 짓고 만응스님하고 나하고마무리를 했었지.탱화가 다 비슷해 보여도 그리는 사람마다 개성이 있어. 예를 들어서 일섭스님이 하신 것 하고, 우리 만응스님이 하신 탱화하고, 내가 한 거 하고 색감이랄지, 필법이랄지 하는 부분이다르기도 하지. 데생한 초는 거의 같을 수 있지만 물감을 진하게 쓸 수도 있고 연하게 쓸 수도 있고. 고려불화처럼 세밀하게할 수 있고 조선불화처럼 약하게 할 수도 있고.후불탱화라고 부처님 뒤에 있는 탱화 같은 경우는 거의 형태가 같지. 다만 색채하고 연마한 기법은 다르게 할 수 있고. 인물숫자나 인물내용은 거의 같지. 그 담에 신중탱화라고 무서운장수들 있고 하는 그림은 가감이 있을 수 있지. 여덟 분하는경우도 있고 서른아홉 분하는 경우도 있고 백 팔분 하는 경우도 있고. 인물이 많으니까. 그거는 화사에 달려있는 거지.예를 들어서 운보 김기창 선생이 초기에는 세밀한 산수를했다가 나중에는 바보산수라고 해서 물감만 썩 칠해버리는이런 식으로 했듯이 탱화도 그렇지. 그런데 피카소나 운보가 간략하게 했다고 해서 간략하게 하기만 한 게 하니라 그세밀한 것들을 다 함축하고 요약해서 들어있는 거지. 그래서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만들어주는 거야. 사람들이 미술적인 안목이 없이 그냥 보면 에이 저건 간단한 건데 이렇게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작가가 세밀하게 해오던 것을알면 다르게 보이거든.예를 들어서 선(禪)이라는 것은 잔소리 많이 안하거든. 한마디로, 그냥 단순하게 몇 마디로 정리하지. 그래서 그 시(詩)라는 말이 한자로 말씀 언(言)에다가 절 사(寺)야. 절의말들. 절에서는 잔소리 구구절절이 안했다고. 특히나 선불교가 발달을 하고부터는 그냥 선사들이‘할’하고 한마디로 그냥. 그런 것처럼 그렇게 봐야 피카소나 운보의 그림이 나오고. 그래야 퍼런 산자락에다 해하나그려놨으면 초여름이나 녹음이 짙어지는 때 아침을 그렸구나, 이게 떠오르고 이래야 되지.나도 처음 그림 그릴 때랑 달라진 게 있지. 시대적으로도 예를 들어서 천왕문이랄지 금강문을지날 때 무섭고 눈을 부라리고 하니까 아이들이 뭣허다, 또는 한문으로 다 쓰여 있고 하니까 저게뭔 말인지 모른다. 이런 것들은 가급적이면 한글로 써주고 색채도 좀 부드럽게 쓰고 가급적이면알기 쉽게 하고 이런 변화를 했지.
문화와 예술은 소통의 창구지
내가 불교미술을 지금까지 40여년 이상을 해왔지만 그 중에 중심을 삼은 것은 수행이지. 의무교육이 기본이듯이. 스님이 수행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는 잘못된 말이에요. 스님이면 수행은 많이 하고 열심히 하고 깊게 하는 건 기본인거에요. 이거는 말과 논의의 대상이 안 되는 거야. 스님하면 기본적으로 수행자인거지.내가 그림을 그리고 교화활동을 했다고 해서 내 수행이 그쪽에가 있다. 이거는 아주 불교를 잘못 보는 겁니다. 스님이라 하면 수행은 기본으로 돼야하고. 그 수행이라 하는 것은 모든 사물과경계와 내 앞의 대상들을 깊이 있고 면밀하고 포괄적이고 핵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유의 세계, 그래서 그 사유가 깊어져서 아까 운보선생처럼 큰 틀을 형성할 수 있고 그것을 단 한마디로표현할 수 있는. 이런 걸 구사할 수 있는 게 도를 하는 사람, 수행이 된 사람, 수행을 해가는 사람들의 언어와 생활들이에요. 이건 남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기의 삶을위해서 하는 거예요.교화하고 포교하고 여기서 청운사에서 백련축제하고 하는 게 불교미술과 연관이 안 된 것도 아니고, 또 내 수행과 연관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불교가 산중에 있으면서 불교만을 위해서 그냥불교인들이 왔다갔다만 하고 그러면 안 되지. 그런 게 아니라 부처님이 부처가 돼서 사바세계 중생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셨는가를 봐야지. 싯다르타란 사람이 없어도 그분이 했던 지금까지도 글을 통해서 전해져서 사람들이 수행을 하고 고통을 이겨내고 있잖아.여기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림을 주고 하는 것도 그 중간매체 역할을 하는 거지.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내말 듣는 것도 좋다 할 수 있지만, 이렇게 그림 한 장을 주면 그것 때문에 한번 더 올 수도 있지. 그게 소통의 역할, 창구 이런 거지. 탱화도 마찬가지야. 그런 게 문화고 예술이지. 그 문화와 예술이 얼마나 수행력과 상상력과 명상력이 깊으냐에 따라서 더 퍼지겠지.탱화가 불교의 내적으로 보면 신앙적인 예배와 공양과 공경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예술이고 문화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고려불화 관음도 같은 게 유럽에도 가있고 미국에도 가있고 러시아에도가있고 하잖아. 그분들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자기나라의 보물처럼 깊고 아끼고 소중하고 아는 것이지. 결국은 그 예술 문화를 통해서 저쪽하고 소통하고 가잖아.그러니까 꼭 절에 와서 탱화를 보고 뭘 보고 하더라도 불교라는 종교를 굳이 거기다가 선을 안그어놔도 괜찮은 것이니까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걸로 접근해 들어가도 돼요. 그래서 수세기 전부터 선배들이 이렇게 해오고 이어져오고 하는 거지. 이걸 불교 것. 절집 것 이렇게 잘라놔 버리면문화예술로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게 좁아지죠. 인간이 갖춘 생활과 내면의 세계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그를 통해서 자기 내면의 세계와 삶이 세계를 한번 반추해볼 수 있는 이게 문화와 예술이지. 때로는 종교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지. 내가카톨릭 성화를 볼 때도 예수님 아니더라도 예수라는 한 사람으로 만날 수도 있고 마리아를 성모님이 아니더라도 한 아이의 어머니로 만날 수도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봐주는 게 중요하지.
해탈을 해탈 안에 가두면 해탈이 아니야
무형문화재는 2002년에 지정됐지. 나는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요. 내가 개인적으로 사회적인 명예가 되고 하는 것도 있겠지만 거기에 나는 생각이 별로 없고. 내가 진작에 그걸 안했어요. 내가 2002년이 아니라 90년대 초에서 주변의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권유하기도 했어. 그래도 안했어. 뭔 스님이 그냥 있다가 공기처럼 바람처럼 사라지면 되는 거지.이게 조선시대까지 왔던 스님네들의 삶의 방식과 정신세계거든. 그런데 자꾸 생각해보니까 사회가, 시대가 조금 그런것도 요구를 하는 것 같아요.작년, 재작년에 부천의 무형문화엑스포라고 해서 거기 가서 시연도 하고 체험도 해주고 했었는데 만약에 무형문화재라는 게 없었다면 가서 경기도 사람하고 불교미술을 통해서소통할 수 있는 게 없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2001년도에 신청을 내고 2002년도에 지정을 받았지. 그 뿐이야 그 걸로 내생활과 내면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이것도 하나의소통의 도구로 생각할 뿐이지. 그게 됐다고 해서 그전보다더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됐다고 해서 그전보다 해야 될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제자들은 아직은 많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시간 활용을 하지는 못하고 있어요. 왜냐면 스님이고 절의 주지를 하고 있고 또 다른 일도 있으니까. 100프로를 무형문화재, 탱화를위해서만 쓸 수는 없으니까. 아직은 안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대신 대학을 다니고 대학원 다니고 하는 제자들 방학 중에는 실기를 하게하고 학기 중에는 학교에서 배우게 하고. 아무래도 내가 배웠던 방식과는, 옛날하고는 달라야죠.근데 이게 도나 국가에서 그게 이론적으로만 정해놓으니까 문제예요. 1년 내내 전수하고 전승하는 걸, 해야 되는 걸로만 아니까. 그러니까 실무자들이 정해놓은 규정 안에서만생각을 하지 활용과 응용과 융통성이 없이 해버리면 전통도끊어지는 거예요. 후학을 양성하는 방식도 각자 달라야지.답답한 부분이 많아요.7월쯤 여기서 하소백련축제를 하거든. 기획부터 섭외까지내가 준비하고 있지. 이번에는 음악회를 좀 해볼까 하거든.이런 것도 좀 벌려놔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탱화도 쉽게 전달하고 이해시키고 소통하고 하지. 그런데 전통이라고 그것만 하고 있으라고 하면, 이건 답답한 일이지. 올해 10회째야.촌이 그렇고 절이 열악하고 그래서 시대적으로 해야 할게 뭘까 해서 백련차도 만들고 축제도 만들고 한 거지. 이게 보급이 되고 하면 농가의 부가가치 소득도 높아지고.옛날에 정신적인 내면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한가롭게 하는 걸 수행이라고 했다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행은 좀달라져야지. 이게 안 달라지면 시대적으로 무너져버려. 문화나 정신사조 자체가 정지돼버려. 지금 시대에는 뭔가 불교도사회와 산업에 대해 고민을 해야지. 이걸 스님이 하니까 스님 이상하다고 하면 아주 그건 불교 수행을 정말 모르는 소치에요. 그렇게 경직 돼버리면 안 돼요.수행한 것을 중생에게 전하기 위해서 수행을 한 것이지.인류가 수천 년 전부터 연구하고 고민해서 그렇게 해 온 거지. 그러니까 움막에서 한옥까지 왔고 이제는 서구적으로 빌딩으로 가잖아. 이런 부분을 터서 볼 수 있는 게 불교용어로해탈이에요. 어느 카테고리, 어느 울타리를 터서 나가서 볼수 있는 게 해탈이에요. 그게 자유로움이고. 그런데 해탈을 해탈 안에 놓고 봐버리면 그건 또 다른 해탈의 구속이에요.이건 수행 잘못 한 거야.
어려우니까 하는 거고, 안 되니까 해야 하는 거지
한국 불교미술, 특히나 단청 벽화 같은 게 경전 중심이 안돼 있어요. 예를 들어서 극락전 하면 아미타경을 중심으로 한 아미타불의 전각이거든. 그러면 아미타경 내용을 그려주는 것이 아주 뛰어난 논리와 이론에도 맞는 단청이라고 생각을 해요. 교육관에는 교육에 맞는 불경 속에 내용을 교육관에 그리는 것. 화엄종 사찰이라면 화엄경에 나온 그림들을주로 그려주면 되고.지금은 그런 거 상관없이 단청작업들을 하지. 그게 이런작업을 하는 스님네들이 별로 없고, 스님네들도 이런 논리와철학을 갖고 있는 분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한국불교 단청은 대부분 그냥 신앙을 갖고 단순기술을 배워서하는 분들이 8~90%야. 불자가 아닌 분도 있고. 그런 분들에게 불교 경전, 불교 이론을 못 가르치다보니까, 거기다가 스님네들도 그런데 신경을 못 쓰니까. 문제가 돼요.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를 시켜주려고 조각도 필요했고 회화도 필요했고 단청도 필요했고, 했는데 요즘은 그냥 문양 색채만 해. 그럼 격이 떨어지는 거지. 탱화도마찬가지야. 예를 들어 금산사 미륵전을 보수해서 단청을 다시 한다고 하면 지금 돼있는 것만 전통이라고 해서 그대로만하라고 하지.그 시대에 좀 부족한 부분이 있었으면 지금시대에 한 단계높여서 하고 왜 그랬는지 역사의 기록을 남기면 되는 것이거든. 그런데 공무원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대로만 하려고하니까 발전이 안 되는 거지. 이게 갑갑한 노릇이야. 자문을구하는 것도 쉽게, 틀렸어도 사인해주는 사람한테 가. 나처럼 따지고 논리적으로 고치라고 하는 사람들한테는 잘 안와요. 귀찮고 번거롭고 하니까.원론을 바탕으로 해서 어떻게 융통성을 부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해요. 원론을 무너뜨리면서 융통성을 발휘하면 그것도 위험한 거고. 원론을 무너뜨리지 않고 융통성을 부리려면원론을 잘 알아야 해. 그냥 원론을 표피적으로 알아서는 안돼. 그게 어려운 문제인데. 그래도 자꾸 자꾸 찾아가야 돼.그리고 새로운 세대로 물려가야지. 어렵다고 뭣하다고 안 된다고 하는 건 부정적이고 영양가 없는 소리들이야. 어려우니까 하는 거고 안 되니까 해야 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