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5 |
내 인생의 멘토- 연극 무대
관리자(2011-05-06 08:52:32)
1988년 초 여름, 전북예술회관 4층공연장 그 객석
- 김영오 재인촌 우듬지 대표
정말 하지 못 할 일이 아니면 하겠다는 답변부터 덜컥 해버리는 긍정적인 성격 탓에 이 지면의 원고 청탁을 일단 시원하게 받아놓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단 한 분의‘멘토’를 모시지 못 한 사람이라 쓸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사양하지 못했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가 될 것 이다.23년간의 연극 인생만이 아니라 마흔을 훌쩍 넘기고 이제쉰이 더 가까운 인생을 두고도 난‘멘토’가 없다. 힘들고 어려울 때 달려가 무릎 꿇고 깨우침을 받을 수 있는‘멘토’를내가 얼마나 모시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겐 그런 복(福)은 없었고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낫지 않는 깊고 커다란상처이다. 그러니‘내 인생의 멘토’라는 주제는 그 어떤 글보다도 내게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일 듯싶었다. 그래서 내심이틀 정도를‘내게 한 연락은 착오였으며 다른 분이 쓰기로했으니 걱정마시라!’는 반가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경험이 풍부하고 신뢰할 만한 친구, 상담자 겸 스승으로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조언자‘라는 사전적 의미의‘멘토’가 내게는 없다. 10년의 경력을 넘겨야 연극인으로인정받고 또 10년을 더해 20년은 넘겨야 조금 했구나라는인정을 받을 만큼 지독하게 어려운 작업을 하는 이 연극판에서 솔직히 나는 23년의 시간을‘멘토’없이 버터내고 있는 처지인 것이다. 그나마 무대 위의 연기자 시절에는 그리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극작을 하고, 연출을 하게 되면서‘멘토’를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내게는 거의 강박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난 직접 부딪혀가며배워 갈 수 밖에 없었다. 한 작품하고 조금 깨우치고 배우고,또 작품 하나를 끝내고 성장해가는 처지가 너무나 힘들고 외로워서 지난 3월까지도 난 늘 배울 수 있는 곳과 내게 깨우침을 줄 수 있는 분을 찾아서 꽤 여러 곳을 헤매고 다녔다.하지만 박복한 처지만 새삼스러워 질 뿐 찾아다닌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물론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주고 힘든 고비를 만날 때마다 힘이 되는 존재는 있다. 단지 그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는것일 뿐!지금까지의 글만 읽는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구구절절한 사연을 풀어보자! 스무해가 넘도록 어떤 것에도 애착이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다보니 주위사람들뿐 아니라 스스로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될 존재라고 생각할 정도로힘든 시간들을 보내던 즈음에 운명처럼 전북예술회관 3층의전북예총 산하 모 협회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전북 예술회관 4층 공연장은 유일한 취미가 영화와 연극 관람인 나에게 익숙했던 곳으로 지금이야 낡고 불편한 공간이지만 1988년에는 전북 최고의 공연장으로 가수들의 콘서트와연극 등의 공연이 많았었고 같은 건물에 근무하게 된 인연으로 난 거의 빠지지 않고 모든 공연을 챙겨보며 난생처음으로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초여름, 서울의 모 극단이 지방순회공연을 하면서 지역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극워크숍에 신청을 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그워크숍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워크숍을 지도했던 분들이 내 연극인생의‘멘토’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워크숍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워크숍 때문에 오르게 된 그 무대에서 난 내 인생을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대가 나에게 그랬다는 것이 아니다. 객석에 앉아서 바라보던 무대에 대한 경외심은 무대에서바라 본 객석에 대한 경외심 앞에서 그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줄 맞춰 반듯하게 자리했던 붉은 객석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줄지어 놓여져 있던 그 빈객석들. 난 벼락을 맞은 듯 전율을 느꼈다. 그것들은 내 심장을 뛰게 만들어 난생처음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환희였고 충만한 경이로움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텅 빈 객석으로 보였을 지도 모른 그 순간에 난 그곳에서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낭비되는생으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절망은 그 순간 내 영혼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난 죽을 때까지 연극인으로 살겠다는 맹세로 그 영혼을 채우고 연극인이 되었다.그 후로 올해 23년 차의 연극인으로 살면서 나는 단 한순간도 그 맹세를 후회한 적이 없다. 연극을 하면서 만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둔 행복한 가정을 갖게 되었고, 부부가 합심해서 2002년 창단한 극단은 벌써 10년 차에 접어들었으며 2008년엔 아주 작고 아담하지만 여한(餘恨)없이 공연하고 싶은 만큼 공연할 수 있는 전용소극장까지갖게 되었다. 그리고 난 15년간의 배우생활을 잠시 접어놓고이제 6편의 희곡을 쓴 극작가로, 11편의 작품을 연출한 연출가로 연극인생을 이어오고 있다. 난 대학에서 희곡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연출을 배운 적도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누구에게서도 난 가르침을 받지 않고 혼자서 이 길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멘토’는 커녕 단 한 분의 선생도 없이 치열하게 혼자서 배우고 익히면서 말이다. 그 길이 얼마나 외로운 길인지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말로‘그런 길을 안 가봤으면 말을 하지 마요!’연극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지 모를 만큼 그 시절의 절망감은 내 목숨을 갉아먹고있었다. 그러니 1988년의 초여름 전북예술회관 공연장의 객석은 내 생명을 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힘을 주는‘멘토’와 가장 근접한 존재이다. 가끔씩 내가잘 해낼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으로 새벽까지 잠 못들 때가있다. 그럴 때마다 그 순간의 객석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난 연극 앞에서 과하게 진지한 사람이 된다.내가 살 수 있도록 나를 구원해 준 존재이니까. 아니 어쩌면연극인이 될 수 있도록‘길잡이’역할을 해 준 존재가 그 붉은 객석이고, 내 인생의‘멘토’가‘연극’인지도 모르겠다. 비로소 삶을 살게 해주고, 넘고 나면 또 찾아오는 인생의 고비마다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며 살아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일깨워 주는 존재가‘연극’이니 말이다.그러고 보니 이 지면의 원고 청탁을 사양하지 않은 것이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 내게도‘멘토’가있다는 것을 (여전히 그 존재가 사람은 아닐지라도) 깨닫게되었으니 말이다.‘내 인생의 멘토’는‘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