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5 |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남원 2
관리자(2011-05-06 08:45:40)
지역문화 다시보기 - 남원 2
자부심만으로 전통이 지켜진다고?
남원을 수식할 말은 여러 가지다. 춘향으로 대표되는‘사랑과 정절의 고장’, 만인의 총이 보여주는‘저항과 애향의 고장’, 수많은판소리의 명인들을 배출한‘국악의 성지’까지. 어디 그뿐인가, 남원은 4대 고전문학의배경지이자 <혼불>의 터전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예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이 많은 수식어들은 남원이 가진 풍부한 문화적 자산들의 가치를 잘 보여준다. 지리산자락에서 이어지는 분지지형의 비옥한 토지는 남원에 풍요로움을 안겼고, 그 기반아래 다양하고도 특색 있는 문화예술이 꽃피었다. 남원시민들은 그들이 보존하고 전승해온 문화유산의 가치를 잘 안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자부심 역시 각별하다.
예술의 가치를 아는 고장
남원권번의 역사는 예향의 깊은 뿌리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권번은 일제시기 기생과 예인들을 배출했던 일종의‘조합’이다. 조선의 3대 권번을 꼽을 때면 평양과 진주, 그리고 남원의 권번이 빠지지 않는다. 1921년창립된 남원권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국축제인 춘향제 시작을주도했고 해방 후에는 남원국악동호회를 거쳐 남원국악원이 태어나는 주춧돌이 됐다. 그리고 남원국악원을 기반으로 국립민속국악원과 남원시립국악단이 탄생했다.남원국악원이 자리를 잡았던 남원시 노암동에는 지금도 시립국악단에서 운영하는 국악연수원이 국악인재들을 길러내고 있다. 남원 뿐 아니라전국의 국악 명인들을 키워낸 토양이 관이 아니라 지역의 예인들에 의해다져졌다는 것은 남원 문화예술의 저력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그러나 이 같은 바탕이 단순히 남원 예인들만의 힘으로 가능했던 것은아니다. 큰 권번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향유하고 후원할만한 계층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병채 남원문화원장은“남원은 예로부터 양반의 고장이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합격자들의 통계를 보면 호남에서 남원이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할 정도”라고 소개했다.남원권번이 춘향제를 시작할 때도, 남원국악원이 만들어질 때도 그 가치를 아는 지역유지들의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과거 이른바 예인들이 천민의 취급을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남원사람들은 누구나 판소리 한 대목쯤은 안다”는 통설은 허튼소리가아닌 것이다.실력 있는 예술인이 있고 그 가치를 알아주는 지역민이 있다. 그로 인해 더 많은 예술인들이 찾아오고, 새로운 예술인들이 양성되는 선순환이 일어난것이다.이 관계는 예인들이 신분적 차별을 받지 않는 오늘날에도 일부 유효하다. 남원의 한 국악인은“여전히 남원의 국악계는 실기인들과 지역 유지들로 구성되고있다. 과거와 같은 일방적 후원관계는 아니지만 떼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고 말했다. 춘향제를 주관하는 춘향문화선양회나 남원국악협회 등에서도 지역유지들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명인·명창의 산실, 어떻게 지킬까
여러 문화자산이 있지만, 남원문화예술의 중추는 역시 국악이다. 1992년 국립민속국악원이 남원에 개원한 것은 국악계에서 남원이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준다.남원은 <춘향가>, <흥보가>, <변강쇠타령>의 배경지이자 동편제 판소리의탯자리다. 가왕 송흥록을 비롯해 4대에 걸쳐 명창을 배출한 송씨 가문이 있고,박초월과 김정문, 장재백, 안숙선 등 수많은 명창들이 지리산 자락에서 소리를빚어냈다. 가야금과 대금 등 판소리 외의 기악에 있어서도 남원출신 명인들의활약은 크게 두드러진다.지난 2007년 남원 운봉읍에 개관한‘국악의 성지’는 이름에서부터 남원인들의 자긍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 운봉에서 거문고를 가르쳤다는옥보고를 비롯해 역시 운봉에서 소리를 닦은 송흥록 명창 일가와 박초월 명창의묘소와 위패가‘국악의 성지’에 모셔져있다. 현재 시립국악단이 상주하며 체험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국악의 또 다른 장르인 농악과 풍물 역시 남원의 자랑이다. 유명철 명인의 노력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남원의 농악은 1999년시립농악단이 창설되면서 기틀을 잡았다. 현재는 23개 읍면동에각각 농악단이 생길정도로 활성화됐다.시립국악단 국악연수원에서 농악과 풍물을 지도하는 김정헌 씨는“인구 8만의 도시에서 23개 읍면동에 농악단이 있고 별도의농악단도 있다. 여기서 활동하는 숫자를 작게 잡아도 1000여명가량이다. 아마도 풍물인구의 밀도로는 남원이 전국 최고일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이런 위상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것이라고 낙관할 수만은 없다. 지역의 인재유출 현상은 국악계라고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김정헌 씨는 남원에서 양성한 국악인재들이 타 지역으로 빠져나가는현상에대해우려했다.“ 시립국악연수원에서는주로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로 남원국악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이다.하지만 대학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돌아온다 해도 국립민속국악원과 시립국악단 자리는 한정돼있다. 특히 시립농악단의경우 정규채용이 아니라 연습보상비만 받는 무보수 명예직이다.대부분 방과 후 교사 등 다른 일을 병행하고 있다. 자연히 농악과풍물관련 인재들은 정규채용이 되는 광명시립풍물단 등 타 지역에서 직장을 구할 수밖에 없다.”열악한 재정자립도의 작은 도시에서 모든 예술단을 정규직화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김씨는“최소한의 임금만 지급하더라도 우수한 인재유출이 줄어들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한정된 재원, 장기적 안목이 아쉽다”
한정된 재정으로 인한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 남원시에서는 시립 국악연수원에 대해 민간위탁을 포함한 새로운 운영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남원시 국악진흥계 관계자는“국악연수원이 학생중심에서 일반인까지 확대 운영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민간위탁도 하나의 방안으로 논의되고 있다. 아직확정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존 문화시설의 민간위탁이 예산절감효과를 우선시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기 어렵다.김정헌 씨는“국악연수원이 민간위탁 될 경우 현재 정규직으로 채용된 강사들이 비정규직화 되고 연수생들이 부담할 연수비가 크게 올라갈 것은 뻔한 일이다. 또‘국악의 성지’등 다른 시설의 민간위탁도 자연스럽게 추진될 것”이라고비판했다. 김씨는 현재“시립국악원 노조에서는 민간위탁 문제를 예의주시하고있다”고 덧붙였다.언론과 관광객들의 호평을 받았던‘국악의 성지’체험프로그램도 올해 변동이 생겼다. 체험객을 담당했던 체험교사들이 사라지고 시립국악원 단원들이 그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남원시 국악진흥계 관계자는“그동안 중앙에서 지급됐던 체험프로그램 예산이 민간공모사업으로 바뀌면서 공모에 당선되지 못해 체험교사들을 운영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 역시 중앙예산에 의존할 수밖에없는 남원 국악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다.국악에 편중된 시의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이병채 남원문화원장은“문화예술분야 예산은 대부분 시립국악단 등 운영비로 지출되고 있다.그러다보니 장기적인 문화정책을 수립하기 어렵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에서는 문화를 관광산업의 악세사리 정도로만 보고 있다. 예산도 많지 않은데 대부분을 운영비나 행사 등의 이벤트성 경비로 지출하다보니 새로운 자원을 발굴하고 기반을 닦을 투자는 미비하다. 특히 정치인들이 문화관련 정책들을 치적사업, 생색내기 사업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이 원장은“현재 추진 중인 지리산권세계문화유산 등재도 본래 남원에서 먼저제기됐지만 전라북도와 시에서 소극적이어서 경남 쪽이 주도하게 될 상황”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