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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4 |
[문화시평] 전주시립극단의 <시크릿 룸>
관리자(2011-04-12 16:19:45)
전주시립극단의 <시크릿 룸> (3월 19일 ~ 20일)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이질적인 이야기, 비밀의 방 안에 조합되다 - 진양명숙 여성다시읽기 회원 원고를 의뢰한 측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 연극평도 가볍게 써 달라 하여‘머리’를 식힐 겸 찾았으나, 결코‘머리’를 식힐만한 가벼운 연극은 아니었다. 연극이란 본디 공간이 제한된 만큼 이야기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욕망은 강하기 마련. 특히‘시크릿 룸’은 단막극 다섯 편을 모아놓았으니, 그 의미 찾기도 다섯 배로 늘어난 셈이다. 전주시립극단은 현대 명작으로 불리는 다섯 편의 단막극을『시크릿 룸』이란 주제로 묶어, 하나의 무대에 올려놓았다. 연출자의 얘기처럼 한장의 티켓으로 다섯 편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첫 번째 <틈입자(The Intruder)>는 앞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소리로만 직관하는 할아버지의 불안에서 시작된다. 무대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아파서 누워 있는 딸과, 그 딸이 낳은 듯 한 아이. 이 둘은 할아버지의 불안의 주요 모티브이다. 가족들은 불안에 떠는 할아버지를 안심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것도 아닌 소리에‘오버’하는 할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불안은 계속 공포를 낳고, 그 공포는 청중에게 전해져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극의 막바지 수녀가 딸의 방에서 나와 성호를 긋고, 가족들이 딸의 방으로 달려 들어가고, 다른 방에서는 아이가 울고. 관객은 분위기로만 딸이 죽었음을 감지한다. 작가는 딸과 아이를 통해 생과 사의‘틈입’, 이것의 절대적 상징성을 그리고자 한 것 같다. 두 번째 <불어를 하세요?(Tiger)>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납치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살해하려다, 서로 이야기가 통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지위가 전복되는 풍자극이다. 이 남자는 부조리한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여자를 살해해 성스러운 의식의 제물로 바치려 하나, 여자와 대화를 계속하면서 여자를 납치한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여자도 이 남자가 속내는‘선한’사람이라는 알게 된다. 그녀는 남자에게 불어를 가르쳐주고, 급기야 한바탕 정사까지 치르면서 사나운 호랑이였던 남자는 여자에게 고분고분 하는 순한 양으로 변신하다. 작가는 이 둘의 전복된 지위로 인해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표현한 듯한데, 나는 연극을 보는 내내 나쁜(?) 영화‘나쁜 남자’가 연상되었다. 세 번째 <위험한 커브(The Curve)>는 고속도로의 위험한 커브길 근처에서 살고 있는 두 남매의 이야기이다. 남동생은 이곳에서 사고 난 차량의 부품을 고쳐 팔아 생계를 꾸려간다. 시인 지망생인 누나는 죽은 사람의 묘지를 만들어 돌보아 주며, 죽은 영혼을 달래는 시를 바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은 교통사고와 공생(共生)하며 살아간다. 남동생은 노골적으로 교통사고를 반겨한다. 누나는 도로국장에게 고속도로의 위험을 알려 도로를 보수해달라는 탄원서를 계속 보내지만, 결국 지식인인 척, 시인인 척 가장하는 누나의 내심도 동생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어느 날 도로국장의 차량이 이 커브길 에서 사고가 난다. 국장은 죽지 않고 깨어나지만, 남매는 도로국장이 내연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도로국장을 살해하고 만다. 공생관계에 위협을 받자 도덕적 분노를 가장하여 죽인 것이다. 더욱 동생은 사고를 기다리고, 누나는 죽은 사람에게 시를 써주며 동생의 일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위선을 통찰력있게 그려내고 있다. 네 번째 < 버지니아 그레이의 초상(Pilate Wasn’t Jesting)>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얼마나 조작된 것이고 허구에 가까운 것인지를 드러낸 작품이다. 어느날 기자이자 작가인 딕은 남편 살해 혐의를 받고 수감되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한 후 세상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자살한 비운의 여성, 그레이의 빈 집을 찾는다. 그녀에 대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그레이가 남편을 살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얻고자. 이 때 서로 자신이 그레이라 우기는 네 명의 유령 그레이가 나타나면서 딕을 혼란으로 몰고 간다. 이 유령들은 초상화든, 전기든, 작가를 통해 전달되는 진실은 결국 작가가 보고 싶어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조소하고 있다. 딕이 쓰려는 그레이에 대한 전기는 결국 딕이 만들고 싶은 그레이일 뿐이다. 마지막 <청혼(The Proposal)>은 나탈리아를 향한 로모프의 청혼을 둘러싸고 벌어진 해프닝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심장이 약하고 유약한 로모프는 프로포즈를 하기도 전에 사소한 문제로 나탈리아와 말다툼을 하게 된다. 여기에 나탈리아의 아버지 츄브코프까지 가세하여 이 사소한 싸움은 둘의 관계를 더욱 혼란에 빠트린다. 하지만 결혼에 목말라했던 로모프와 나탈리아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이야기는 해피엔드로 끝이 난다. <청혼>은 인간이 전하고자 하는 진실이 얼마나 사소하고 비합리적인 것들로 인해 방해받는지를 표현하면서,인생을 지배하는 불합리한 요소들을 보여주고 있다. 연출자는“방 하나를 배경으로 시대도, 국적도, 이야기의 형식도 모두 다른 다섯 가지 이야기들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행해야 하는 선택, 주관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이기심, 자주 쓰는 위선의 가면들이 공통으로 녹아 있다”고 강변(强辯)하였다. 연출진의 의도대로 이 이질적인 이야기들은 하나의 방 안에 조합되고 있다. 사실 인간 세계의 단면을 꿰뚫는 요소들은 허구적 진실성, 진실의 우회성, 진실과 거짓의 조화 등 아이러니함이 아니었던가. ‘가벼운’마음으로 자리에 앉았으나 모순 덩어리로 가득한 진리의 내면을 발견한 순간 관객은 결코‘가볍지’않은 발걸음으로 극장을 나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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