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4 |
[문화시평] ‘미친광대’의 <이판? 사판! 심청이야기>
관리자(2011-04-12 16:19:20)
‘미친광대’의 <이판? 사판! 심청이야기>
(3월 12일)우진문화공간 예술극장
군내나지 않는 깔끔한 김치맛
- 김정수 전주대 공연엔터테인먼트학과 교수
어릴 적 싫어했던 음식이 나이 들면서 은근히 좋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의 경우 토란탕이 그랬고, 갈치속젓이 그랬고, 푹 삭인 청국장이 그랬다. 청국장 냄새에 코를 싸잡던 습관으로부터 이제는 거의 매니아급 애호가로 변했다. 허나 청국장은 청국장, 아무리 입맛이 그를 용서했다 하더라도 역시 어울리는 곳은 따로 있다. 음식은 분위기와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유럽식 레스토랑에서 청국장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음식은 때와 장소에 따라 그 느낌을 달리한다. 판소리는 누가 뭐래도 곰삭아야 제 맛이다. 대청마루를 타고 전해지는 소리는 온몸을 전율시킨다. 한옥 지붕을 거슬러 올라 푸른 하늘로 솟구치는 유장한 소리 한 자락은 여유 그 자체다. 흐르는 시간을 붙들어 매어 놓는 신비한 마법이다. 음식이 그렇듯 소리도 역시 그 맛에 어울리는 공간이 따로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만나는 판소리는 가끔 대단히 낯설고 어색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 낯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 어색함을 한꺼번에 지워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혹 그것이 전통적인 우리 소리와 현대인의 감각적 간극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우리 소리를 지키면서도 현대인과 교유할 새로운 연행방식을 찾아야하는 것은 아닌가? 또는 그것이 서구적 공간과의 괴리 때문에 오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공간이 불가피한 대세로 자리 잡았다면, 그 무대에 어울리는 적절한 공연형식을 고민해야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갖게 한다. 판소리 퍼포먼스 그룹‘미친 광대’도 그 따위 고민을 지속적으로 했으리라.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룹을 만든 일 자체가 그 고민의 뺄 수 없는 증거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미친 광대’는 신선하고 멋져 보였다. 무대를 위해 고민하고 그 고민을 실행에 옮기는 행위가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들이 공연을 통해 자신들의 고민을 어떻게 해소하고자 하는 지 지켜보는 일은 실로 유쾌한 체험이었다.‘이판사판 심청이야기’는 묵은 된장의 군내를 제거한 깔끔한 맛을 지녔다. 김치로 치자면 분명 막 담근 김치는 아닌데, 김치냉장고에 잘 보관되어 왠지 맛깔스럽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 그런 김치다. 일단은 관객에게‘우리 것은 무조건(!) 좋은것이여’식의 넘쳐나는 권위를 보이지 않아 편안하게 다가온다. 깔깔대는 여학생, 여유 있는 추임새로 맞아주는 어르신만 봐도 일단 세대를 넘어선 화합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고 있다. 공연은 자신들의 소개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예요’라는 요즈음 아이돌 가수들의 자기소개와 흡사해서 조금은 낯간지러웠지만, 여하튼‘우리는 사인조 퍼포먼스 그룹’이라는 점을 강조해 보인다. 이 등장판을 지나 본격적으로 소리판이 열린다. 초두에 심청가 한 대목으로 출발한 공연은 꼭두의 해설을 곁들이며, 심청의 출생과 젖동냥 장면, 심청을 위한 인당수 씻김굿, 뺑덕어멈에 관한 고찰 부분을 지나 마지막으로 심봉사를 위한 살풀이를 마련함으로써 마무리 된다. 꼭두 지기학의 잘 정돈된 개입, 그리고‘미친 광대’정민영, 김대일, 정승희, 박추우의 소리와 연기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마이크를 쓰지 않은 깨끗한 소리는 간결한 무대와 이미지가 잘맞아 떨어졌고, 적절히 적재적소에 활용되는 소리는 대사로 변환되거나 배경음악으로 쓰여질때도 그 효과를 제대로 발휘해 보였다. 다양한 이미지로 활용되는 의상에 정확한 발음과 연기는 썩 잘 어울렸다. 소리를 들려주는 일을 넘어, 그 소리의 무대 이미지화에 성공한 공연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엇보다‘이판사판 심청이야기’의 미덕은 판소리를 활용한 다양한 무대공연예술의 가능성과 그 지평을 넓혔다는 데 있다. 흔히 판소리를 극화한다고 했을 때, 가장 쉽게 떠오르는 창극의 범주를 우회하여, 브레히트식의 서사적 기법과 현대적 극 전개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감을 주었다. 판소리를 극화한 것이 아니라 극을 구성하는데 판소리를 이용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의 대반전이었다. 하지만 아쉬움도 남았다. 서두에 꼭두의 설명대로 이판사판이‘다른 생각의 판’이라는 뜻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기왕의 심청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자 한 것이 확실하다면 그 목표에 근접하는 극적 진전이 있었어야 했다. 예를 들어‘뺑덕어멈을 위한 변명’에서 제시한 뺑덕어멈은 심청가에 왜 등장할까? 그리고 단순히 희화화되어 웃음코드로만 보여지는 이 여인내의 행각을 어떻게 풀어볼까? 라는 화두를 제시했다면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기다렸던 관객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 점은 마지막 극의 마무리에서도 드러난다.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이 부분에서 심봉사의 눈은 보이기도 안보이기도 한 것, 심청은 빠졌으면 빠진 거고 안 빠졌으면 안 빠진 것이라는,모호한 추상성 속에 몸을 감추고 만다. 그리고 미쳐야 미친 것이라는 비약된 논리로 정리한다. 차라리‘세심(洗心)’이라는 처음 던진 화두에 충실한 정리를 해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간절하게 들었던 대목이었다. 아쉬움은 아쉬움, 그럼에도 상큼하게 기억되는 공연이었다. 그 아쉬움이 이 공연이 갖는 미덕을 덮을 수는 없었다. 갈수록 화려해지는 무대공연예술에서 오히려 소박함과 순수함으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공연, 참 담백한 음식과 같은 공연을 만난 주말이었다. 자주 만났으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겼으면 하는 공연이었다. ‘미친 광대’의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활동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