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4 |
임안자의 내가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1-04-12 16:12:01)
임안자의 내가만난 한국영화 - 상 세바스찬 국제영화제 1
‘영화제 동안은 평화가 유지된다’는 이 위험한 도시와의 첫 만남
- 임안자 영화평론가
한국의 영화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상 세바스찬 국제영화제는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로서 1953년에 문을 열었다. 설립 동기를 보면“스페인어 영화를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자는 데”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기에 설립 초기에는 스페인을 비롯하여 남아메리카, 즉 전적으로 스페인어 사용 국가의 영화만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그러다가 1955년에 이르러 다른 언어권의 영화를 받아들이면서 국제영화제로 바뀌었고 다시 1957년에 국제제작자협회로부터 A급 영화제로 인정을 받음으로서 설립 이후 4년 만에 베니스와 칸 그리고 베를린 다음으로 유럽의 4대 영화제의 하나로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앞의 세 영화제에 비해 발전의 속도는 아주 더딘 편이었다. 물론 국제영화제로서의 출발이 상대적으로 늦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국내의 정치사회적 불안정성이 영화제의 발전에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독재자 프랑코의 통치기간(1936-1975) 동안에는 영화제뿐 아니라 스페인 영화계 전체가 극심한 검열로 얼룩진 문화정책으로 말미암아 40여 년간의 호된 암흑기를보냈다. 그리고 80년대는 바스크지역의 ETA‘( 바스크국가와 자유’의줄임말)의 지하운동이 거죽으로 드러나던 시기였다. 1980~1984년 사이에 상 세바스찬 영화제가 문을 닫아야 했던 데는“바스크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성과 무관하지 않았다”그러다가 80년대 말부터 차츰 안정적인 국면에 들면서 4대 영화제의 위치에 오르게 됐다. 상 세바스찬은 스페인의 북서쪽 끝에 놓여있는‘바스크’의 수도이다. 지리적으로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끼어 있는 인구 2백 십여만의 이 조그만 지역은 수 십 세기에 걸쳐 바스크 민족이 살았던 땅이었다. 그러다가 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뒤 파시스트 프랑코 군대의 침략으로 1936년 스페인에 통합되면서 자치권을 잃었다. 그럼에도 바스크 국민은 그들의 독자적인 전통문화를 저버리지 않고 꾸준히 지켜왔으며 통계에 따르면“국민의 33%가 통합 이후에도 바스크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다”. 참고로, 바스크어의 근원은 아직도 확실치 않으나 언어학자들은 대충 우랄알타이어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화전통이 전혀 다른 스페인의 영화인들이 굳이 바스크 문화의 핵심지인 상 세바스찬에 국제영화제를 세운 까닭은“프랑코 정권의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스페인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던 것”인데, 프랑코 정권이 끝난 뒤부터 상황은 바뀌어 그간 푸대접을 받았던 바스크 지역의 영화문화를 아우르고 활성화 하는데 중재 역할을 맡고 있다. 바스크 출신 감독들의 영화를 전적으로 보여주는 지네미라(Zinemira)의 부문이 열리고‘자발테기-열린 공간’의 부문에서 젊은 감독에게 주는 크툭자(Klutxa) 수상제도 등은 좋은 예로서 상 세바스찬 영화제의 시대적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생길의 첫 방문
이 자리에서 나는 본문과 직접 상관이 없는 상 세바스찬의 첫 방문에 대해 쓰려고 하는데 읽다 보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상 세바스찬 영화제에 참가한 건 1991년이었다. 그해 8월 중순에 나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스위스의 다큐멘터리 감독이며 친지인 알프레드 크누헐을 만났다. 그 시절 그는 상 세바스찬 영화제의 국제선정위원의 하나로서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독어권 국가의 영화선정을 맡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상세바스찬 영화제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나는 그를 만난 자리에서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알프레드는 내가 관심이 많다고 느꼈는지“가볼만한 영화제다. 가서 보고 좋으면 한국영화도 소개하라. 만일 가고 싶으면 프레스 초청장을 보내겠다는”등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이면서 내 호기심에 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로부터 초청장이 왔다. 그런데 그 무렵은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 사건이 잇달아 뉴스에 떠오르던 때여서 기쁨보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그러나 알프레드는“오래 전부터 영화제 측과 ETA 추종자들 사이에‘영화제 동안에는 절대 평화를 유지 한다’는 무언의 협정이 맺어져 있기 때문에 영화제 동안에 사고가 일어난 적은 없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남편도“스페인 쪽이라면 몰라도 바스크 중심지에서 ETA 추종자들의 테러가 일어났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며“알프레드 말이 맞는 것 같으니 안심하고 가라”고 했다. 나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두 남자의 말에 용기를 얻고는 1991년 9월 14일 상 세바스찬으로 떠났다. 아침 일찍이 바젤에서 탄 비행기는 두어 시간 뒤 바르셀로나 공항에 닿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바르셀로나에서 상 세바스찬으로 가는 비행기는 그날 오후에 하나 밖에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탄 조그만 비행기는 그러나 공중에 뜨면서부터 이리저리 마구 흔들렸고 때로는 꼭 땅에 떨어질 것만 같아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비행기가 밑으로 내려칠 때마다 승객들의 절망적인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고 기내 방송에서는 계속 뭐라고 했으나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 이제 죽는 구나 싶어 남편과 애들을 생각하니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 비행기는 프헨타라비아 국내 공항에 내렸다. 살아남은 게 신기했다. 악몽의 비행기에서 내려 땅을 밟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가 영화제를 다니기 시작한 뒤부터 수없이 비행기 여행을 했지만 그날처럼 죽음과 직접 마주했던 일은 그게 처음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20분쯤 달린 뒤 상 세바스찬(바스크어로는 도노스티아)에 도착했다.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상 세바스찬의 풍경은 조금 전의 고통과는 대조적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3개의 호수로 둘러싸여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중세기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꽉 들어서있는 시내는 넓고 풍요로운 분위기를 띄웠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크고 금발이 많아 중도의 크기에다 검은 머리의 스페인보다는 오히려 북쪽의 유럽인들에 가까워 보였다. 상 세바스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빌바오는 스페인의 제일가는 산업지대로 꼽히고 있는데, 바스크 지역이 스페인을 먹여 살린다는 속담은 거기서 나온 말이다. 그 밖에도 상 세바스찬은 스페인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불행이도 영화제 이틀째 되는 날 점심에 해물요리를 잘못 먹어 지독한 설사병에 걸리는 바람에 몇 날을 물 밖에는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어 지역의 진미를 제대로 즐길 겨를이 없었다. 음식은 그렇다 치고 영화제 기간의 반절을 호텔방에서 누워있었으니 영화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폐막식 전날 나는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고 그날 저녁 상영되는 리차드 아텐보로 감독의 <간디>라도 보려고 영화제의 셔틀 버스 정류장 쪽으로 나갔다. 1991년에 상 세바스찬 영화제서는 아텐보로 감독이 1937년 바스크 지역의 수많은 어린이들을 영국으로 피난시켜 스페인 나치군대로부터 삶을 구해준 데 대한 공로를 기리는 뜻에서 그의 64편 영화를 회고전으로 소개했었다. 아무튼 나는 영화관으로 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 뒤쪽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짐과 동시에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내가 서있는 쪽으로 달려왔고 수많은 경찰들이 공포탄을 터트리며 이들의 뒤를 쫓아왔다. 그곳엔 나뿐 아니라 다른 영화제 손님들도 몇 몇 있었는데 모두 깜짝 놀라 꼼짝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다행히 젊은이들과 경찰은 다시 어디론가 재빠르게 사라졌고 공포탄 터지는 소리만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 영화관을 찾아 갈 용기가 있은 것도 아니어서 나는 <간디>를 보지 못한 채 호텔로 돌아갔다. 그 다음날 영화제의 프레스 담당자에게 전날의 데모에 대해 물어봤더니 그는“전에 없던 일이어서 잘 모른지만 일부 젊은이들이 경찰과 잠깐 충돌 한 듯하다. 그러나 사고 없이 바로 끝났다”면서 아주 가볍게 넘어갔다. 그의 싱거운 대답에서“영화제 동안에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알프레드의 말을 듣는 것 같아서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에 나는 귀국했다. 국내선 비행기를 타는 게 무서워서 기차로 마드리드에 가서 국제선으로 바꿔 타고 집에 돌아왔다. 그 리고 나서 나는 상 세바스찬에 갈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4년 다시 상 세바스찬을 찾게 되었다. 내가 추천한 정지영 감독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상 세바스찬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선정됐기 때문이다.